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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1화 (21/228)
  • 던전 안의 살림꾼 21화

    * * *

    허공에 붕 뜬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중력의 이끌림에 따라 몸뚱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꺄악!”

    희나는 사지를 바동거리다 결국 양팔로 얼굴을 가리길 선택했다. 그리고 엉덩이에 닥칠 충격을 각오했다.

    ‘……어?’

    하지만 몇 초가 지나도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폭삭,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단단한 품 안에 안겼다.

    희나는 본능적으로 가슴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희미한 비누 냄새가 났다.

    ‘향기 좋다…….’

    희나가 제정신을 차린 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침착한 목소리를 들은 후였다.

    “괜찮으십니까?”

    강진현이 품에 안긴 희나를 천천히 내려다 세워 주며 물었다.

    “어…….”

    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신을 무사히 받아 준 남자의 가슴에 안겨 킁킁대며 냄새를 맡다니……. 아무리 무심결이라지만 이건 너무 파렴치한 같은 행위였지 않은가!

    “가, 감사합니다. 강진현 헌터님. 헌터님은 괜찮으세요?”

    희나는 허둥지둥 강진현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살폈다. 그는 아까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해 보였다.

    덕분에 사정없이 콩닥거리던 희나의 심장이 좀 진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닦던 조각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이 사태가 벌어진 것 같은데.”

    “그 쇳조각이요? 아, 이거 말씀하시는 거죠?”

    희나는 주먹 쥔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에서 은빛 쇳조각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시선을 주어 살피니, 아이템 정보가 떴다.

    <깨끗□진 □□의 조각(□): 특별한 손길이 닿아 깨끗□진 □□의 조각. 아직 사용처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소유주: 이희나)>

    □□의 조각에 관한 설명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몹시 미흡했다.

    거기다…….

    “귀속 아이템이 되었군요.”

    강진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낯선 용어에 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귀속 아이템이라뇨?”

    “그쪽 성함이 이희나 씨가 맞습니까?”

    난데없이 나온 자기 이름에 희나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예. 맞는데요.”

    “아이템 설명 뒤에 이희나 씨의 이름이 붙은 것이 보입니까? 이는 귀속 아이템의 특징으로, 특정 인물이 소유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건 이제 타인에게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강진현의 설명에 희나는 헉, 했다.

    “던전 공략 중에 나온 아이템이 저한테 귀속되면 어떻게 해요?”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대로 보고할 수밖에요.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 두십시오.”

    “네에…….”

    희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의 조각’을 인벤토리 안에 수납했다.

    뭔지 정체 모를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찜찜했지만, 귀속 아이템이 됐다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희나는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장소였다. 잿빛 황야 너머로 이글이글한 태양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딘가요?”

    “던전 같습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아까 쇳조각의 녹이 닦이면서 이곳으로 이동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던전이라면, 게이트를 찾아 나가야 하겠지요.”

    강진현이 차근차근 상황을 되짚으며 정리했다. 놀라울 정도의 침착성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상황에 대경실색했을 희나마저도 침착해질 정도였다.

    “그럼 어디로 가야 밖으로 나갈 수 있나요?”

    묻자, 강진현 대신 시스템 창이 반응했다.

    ‘이건 또 뭐야?’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스킬이 난데없이 시전되더니, 허공에 네모난 지도 같은 것이 떴다. 어린애가 그린 조악한 보물 지도 같은 모양새였다.

    “무슨 일입니까?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강진현은 희나의 이상을 금세 눈치챘다. 그의 추궁에 희나는 얼떨결에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설명해 버렸다.

    “그게, 처음 보는 스킬이 시전되더니 눈앞에 지도 같은 게 떴어요.”

    “지도…… 말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습니까?”

    “대충 그려 놓은 약도 같이 생겼는데……. 잠시만요. 스킬 설명 좀 확인하고요.”

    희나는 시선을 옮겨 스킬 설명을 확인했다.

    <내 집은 어디에(D): 넓디넓은 던전에서 ‘홈 스위트 홈’의 위치를 표시해 준다. 보스 몹과 게이트 위치는 덤. 액티브 스킬.>

    그러니까 ‘내 집은 어디에’는 일종의 내비게이션 같은 스킬이라는 소리였다. 던전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희나의 집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지도 역할을 했다.

    “이희나 씨, 어떤 스킬입니까?”

    강진현이 멍하니 생각에 빠진 희나를 재촉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견딜 수 없었기에, 희나는 적당히 내용을 꾸며 말했다.

    “지도 스킬인데, 보스 몹이랑 게이트 위치를 표시해 준대요.”

    희나는 집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희나가 아무리 뭣 모르는 각성자라지만, 우민아의 거듭된 충고로 ‘홈 스위트 홈’ 스킬은 비밀로 해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홈 스위트 홈’ 이야기를 빼더라도, 이건 엄청난 스킬이었나 보다. 순간, 강진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런 스킬이 존재하다니. 엄청나군요.”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던전의 보스 몹 위치와 게이트 위치를 알고 있으면 던전 토벌 속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첫 던전 공략이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건 이 때문이었다.

    헌터들은 어디에 보스가 있고, 어디에 게이트가 있는지 몰랐다. 그저 막연하게 던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런 맥락에서, 희나의 스킬은 엄청나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로 대단했다.

    “이희나 씨, 이런 스킬을 가진 분을 환경 미화팀에서 썩히는 건 아주 아까운 일입니다. 던전 공략팀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습니다.”

    천하의 강진현이 이 모든 상황을 잊고 다짜고짜 스카우트 제의를 할 정도로 말이다.

    “헉. 던전 공략팀이요? 절대 안 돼요. 저 전투 스킬도 없고, 체근민 합도 30도 안 돼요. 일반인이에요, 일반인!”

    희나는 질겁해서 손을 휘저었다. 돈을 얼마를 더 준다고 해도 던전 공략팀에 들어가는 건 질색이었다.

    희나는 청룡 길드 건물을 쓸고 닦으며 중간중간 김밥으로 체력을 채우고 지내는 지금 이 상태가 아주 딱 마음에 들었다.

    규칙적이고 안전했다.

    “하지만……!”

    “절대로 싫어요! 던전은 너무 위험하단 말이에요! 제 꿈은 아늑한 집에서 가족이랑 함께 평범하고 즐겁게 사는 거예요.”

    이미 던전 안에 집을 마련한 것만으로도 특이한데, 그 이상의 특이점을 가지고 싶진 않았다.

    희나의 격렬한 거부에 강진현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나누도록 합시다. 우선은 이 던전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니까요.”

    “……맞아요.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죠.”

    희나는 달싹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했다. 그리고 돌멩이로 바닥에 눈앞에 보이는 지도를 따라 그렸다.

    “지도는 별로 자세하지 않아요. 거의 약도 수준인데, 이렇게 생겼어요.”

    정사각형의 지도를 기준으로, 희나와 강진현은 가장 왼쪽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게이트’라고 표시된 부분은 좌측 상단, 커다란 산이 그려진 곳 위에 있었다.

    참고로 희나의 집은 우측 하단에 있어서, 게이트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희나는 집의 위치는 쏙 빼놓고 삐뚤빼뚤 지도를 그렸다.

    강진현은 진지한 태도로 희나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허접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다 그렸어요.”

    희나는 손을 뗐고, 강진현은 덧붙여 질문했다.

    “보스의 위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건 안 보이던데요.”

    “그렇습니까? 그럼 보스를 제거한 안정화된 상태의 던전이라는 건데…….”

    그의 혼잣말에 희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다행인 거지요?”

    “예. 일단 몬스터가 거의 제거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 한 번의 경험일 뿐이었지만, 몬스터는 정말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강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희나를 곁에 두고 먼 곳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다행히 방향을 확인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게이트가 산 위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저 멀리 산이 보이는군요.”

    희나는 강진현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아주 멀어 보였다.

    “엄청 멀어 보이는데요?”

    강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박 하루 정도는 이동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곧 어두워질 것 같으니, 여기서 야영 준비를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척척 꺼냈다.

    순식간에 모닥불을 만들어 피웠고, 침낭도 꺼내 펼쳤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무언가를 꺼내 뿌리기도 했다.

    “환영의 마석 가루입니다. 몬스터들이 이곳을 인식하기 어렵게 해 줍니다.”

    심지어 친절하게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도 해 주었다.

    강진현은 상식적이고 매너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무뚝뚝한 사람처럼 보였으므로 이런 상냥함은 의외였다.

    “이희나 씨, 의외로 던전 공략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하기도 하고, 이런 도구들이 있으니까요.”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이건 희나를 던전 공략팀으로 꾀어내기 위한 과잉 친절이 분명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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