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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20화 (20/228)

던전 안의 살림꾼 20화

* * *

화원호 때문에 물난리가 난 8층을 수습하기 위해 미화팀은 함께 모여 야근을 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희나는 급작스러운 야근에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미화팀원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야근도 오래간만이야. 그래도 요즘에는 이 난리가 좀 줄어들긴 해서 편했어.”

“아이구. 좀 줄어들기는. 나는 다음 달 야근 수당이 하도 줄어들어서 월급 반 토막 나는 줄 알았지 뭐야.”

“호들갑 떨기는.”

팀원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물난리가 난 휴게실을 치웠다.

침대를 옮기고, 시트를 꺼내어 갈았다. 희나도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르고 열심히 일을 도왔다.

“희나 씨는 일손이 빨라서 참 좋아. 일머리도 좋고.”

옆에서 누군가가 희나를 칭찬했다. 희나가 온 이후로 헌터들이 사고 치는 횟수가 훅 줄어들어서 야근 횟수가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헉. 예전에는 이런 일이 많았어요?”

질겁해서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그럼. 자기들끼리 싸워서 8층 전체 싹 다 리모델링한 적까지 있었다니까!”

누가 목소리를 낮추어 맞장구쳤다.

“아이고, 아이고. 어찌나 사고를 많이 치는지……. 동네 건달패가 따로 없어. 우리 월급이 괜히 센 게 아니라니깐.”

환경 미화팀원들은 길드 소속 헌터들이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는지 험담을 했다. 희나는 멍하니 이야기를 들었다.

‘힘이 센 사람들은 사고를 쳐도 스케일부터 다르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치우다 보니, 어느새 청소가 마무리되어 갔다.

“나머지 잡무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먼저 들어가 보세요.”

희나는 8층 담당자였으므로 잡무가 몇 가지 남아 있었다. 같이 도와줄까, 연거푸 물어보는 팀원들을 겨우 보내고 8층에 홀로 남았다.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청소 도구들을 한데 모아 옮겼다. 그리고 8층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물기가 남아 있는 곳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어, 이게 뭐지?”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짙은 물방울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청소 도구를 옮기면서 구정물이 튀었나?’

희나는 대걸레를 가져와서 다시 바닥을 박박 닦았다.

물방울은 마치 조약돌처럼 드문드문 이어졌다. 희나는 검은 물방울의 흔적을 따라 대걸레와 함께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여기다.’

마침내 얼룩의 마지막 근원지까지 도달한 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진현 헌터님?”

또다시, 라고 말하기에는 사이 기간이 조금 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또다시 강진현 헌터였다.

강진현은 빈 사무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와 펜 몇 자루, 뭔가 가득 들어 있는 검은 비닐봉지와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와 동시에 희나는 검은 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로 커피를 흘린 자국이었다.

‘커피를 마신 건 맞나? 저 정도면 거의 다 흘리면서 가지고 온 것 아냐?’

슬쩍 커피잔을 보니, 반쯤 비어 있었다.

희나의 추측에 따르면 저건 마신 게 아니라 바닥에 흘린 거였다. 희나가 여기까지 오면서 닦은 액체의 양이 그 정도 됐다.

말없이 자기 커피잔을 응시하는 희나에게, 강진현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희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바닥에 뭐가 떨어져 있길래 닦으면서 따라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커피 자국이었나 봐요.”

강진현은 자기 커피잔을 내려다보더니 아, 했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뭘 좀 잘 흘리고 다니는 편입니다.”

좀 흘리는 게 아니라 좀 많이 흘리는 것 같았다.

희나는 그 말을 정정해 주는 대신, 궁금한 걸 물었다.

“던전 공략 중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돌아오셨나 봐요?”

“예. 계획보다 조금 이르게 마무리한 덕에 오늘 나왔습니다. 아직 언론에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 말하시면 안 됩니다.”

강진현은 무뚝뚝해 보였지만, 꽤 상식적으로 답변해 주었다.

그동안 희나가 보아 왔던 천둥벌거숭이 같은 헌터들과는 다른 묵직함이 있었다. 커피를 반 바가지나 질질 흘리고 온 사람답지 않은 침착함이었다.

그 모습에 인간 강진현에 대한 흥미가 불쑥 돋았다.

“오늘 나오셨으니 피곤하실 텐데. 일이 있으신가 봐요?”

“보고서를 쓰는 중입니다.”

“보고서요?”

“던전 공략을 다녀오면 써야 하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이전 공략과 비교하여 변동 사항은 없었는지, 특이 사항이 있지는 않았는지 의례적으로나마 기록해 두는 겁니다.”

강진현은 귀찮을 수도 있는 희나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자기 할 말만 쌩하고 가 버려 재수 없게 느껴졌던 첫 이미지와는 영 다른 성격인 듯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타입인가 봐.’

첫 만남도 그랬다. 고작 E급 던전인데도 A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처럼 진지하게 일에 임하고 있었다.

희나는 이래서 강진현이 한국 랭킹 1위인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역시 첫인상은 믿을 게 못 되나 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강진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미화팀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그러면 혹시 적당한 걸레나 행주 따위 좀 찾아 주실 수 있습니까? 필요해서 찾으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더군요.”

“아. 오늘 8층 스프링클러가 터졌거든요. 청소하느라 한데 모아 뒀는데, 그래서 찾기 어려우셨을 거예요.”

희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마른행주를 하나 꺼내 건넸다.

강진현은 행주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리고 500원짜리 동전처럼 생긴 쇳덩이 하나를 벅벅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쇳덩이는 전혀 깨끗해지지 않았고, 행주만 북 하고 반으로 찢겼다. 대체 어떻게 하면 행주를 그렇게 찢어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건 뭔가요?”

희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쇳덩이의 정체를 물었다.

그 물음에 강진현은 한숨과 함께 쇳덩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공략부대장이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서 챙겨 왔는데, 용도와 출처는 아직도 불명입니다. 위험해 보이진 않아 이렇게 보여 드리는 겁니다만…….”

희나는 허리를 굽혀 동전처럼 생긴 쇳조각을 바라보았다.

잔뜩 녹이 슬어 있는 조각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글자 같은 것이 보였다. 던전의 부산품이긴 한지, 시스템 설명이 떴다.

<더러□진 □□의 조각(□): 지워지지 않는 녹에 뒤덮여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특별한 손길이 닿는다면 녹이 사라질까?>

“지워지지 않는 녹에 뒤덮여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특별한 손길이 닿는다면 녹이 사라질까……?”

희나가 설명 창을 읽자, 강진현이 깜짝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헌터였습니까?”

희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냥 평범한 미화팀 직원이에요. 각성자긴 한데, D급이고 공격 계열은 하나도 없어요.”

“아.”

강진현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다른 헌터들처럼 신기해하거나 놀라는 투는 아니었다. 그 태도에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제가 이걸 좀 닦아 봐도 될까요? 만지면 안 되는 거면 말씀해 주세요.”

괜한 제안을 해 본 건 그 때문이었다. 이 담백하디담백한 S급 헌터에게 무언가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다.

“만져도 괜찮습니다. 워낙 녹이 슬어서 누가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요.”

강진현은 마음껏 만져 보라는 듯 희나 앞으로 쇳조각을 밀어 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아마 닦으려고 노력해 봐도 아무 효과가 없을 겁니다. 이미 많이 시도해 보……”

“행주로 닦으니까 닦이는데요?”

“……았지만, 그때는 안 닦였던 것인데.”

희나의 대답에 강진현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희나의 손안에서 반짝반짝 윤기를 되찾아 가는 은빛 쇳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부지불식간에 그는 희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앗!”

희나는 손목을 감싸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한편, 강진현은 희나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잡은 손목을 이리저리 살펴보기에 바빴다. 그 모습이 마치 마술사의 트릭을 찾는 관객처럼 보였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그냥 행주로 닦았더니, 닦이던데요?”

희나는 솔직히 대답했지만, 강진현은 그 말을 쉽게 믿는 구석이 아니었다.

“물리적, 마법적 자극을 아무리 가해도 흠집 하나 나지 않던 것인데? 고작 행주로 이렇게 쉽게 닦인다고?”

강진현의 독백에 희나 또한 동조하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이렇게 쉽게 닦이는 걸 왜 못 닦고 계셨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희나는 이 쇳덩이를 닦으려고 했던 헌터들이 모두 똥손이 아니었을까 하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당장 강진현만 해도 쇳조각을 닦기는커녕, 애먼 마른행주를 북 찢어 버리지 않았던가?

희나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빛 쇳조각을 강진현에게 보여 주었다.

“이제 다 닦았으니까, 손목 좀 놓아주시겠어요? 조금 아파요.”

“아, 미안합니다.”

강진현이 사과를 하며 손을 놓으려던 때였다.

희나의 손에 들린 쇳조각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이 멀어 버릴 듯한 흰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읏!”

강렬한 빛에 희나와 강진현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무엇인가, 원인 모를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

쐐애애액!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희나의 비명이 순간, 딱 끊겼다.

그로부터 몇 초 지나지 않아, 방 안을 가득히 밝혔던 빛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방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쓰다 만 보고서와 반쯤 빈 커피잔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방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희나와 강진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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