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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9화 (9/228)
  • 던전 안의 살림꾼 9화

    하늘 높이 쌓여 있는 고기 그릇들을 옆에 두고, 희나와 우민아는 뒤늦게 대화를 시작했다.

    뭔가를 함께 먹으면 ‘라포’라는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이 둘은 고기를 함께 뜯고 씹고 맛보며 엄청난 신뢰를 쌓은 셈이었다.

    덕분에 희나는 우민아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이거 다 하면 얼마 정도 할까요? 비싸겠죠?”

    걱정스러운 희나의 표정에 우민아가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왜? 네가 사게?”

    “그러려고요. 저 구출해 주셨으니까 감사의 의미로 한 끼 대접하고 싶었거든요.”

    “됐어. 너한테 얻어먹으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 아니야. 거기다 네가 고기를 이렇게 잘 굽는 줄은……. 솔직히 이 정도면 내가 너한테 돈을 더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우민아가 희나의 고기 굽기 스킬을 극찬했다.

    “내 눈앞에서 굽지 않았으면 고기에 약이라도 바른 줄 알았을지도 몰라. 그 정도로 맛있었다니깐.”

    ‘약이라도 바른 줄 알았다’라는 평가에 희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었다. 약은 아니었지만, 뭔가를 하긴 했기 때문이다.

    “저기, 우민아 헌터님.”

    우민아가 털털하게 손을 저었다.

    “정 없게 우민아 헌터가 뭐야? 나 스물일곱인데, 나보다 어린 거 맞지? 딱 봐도 어려 보이는데. 언니라고 해, 언니.”

    “그, 그럼, 민아 언니.”

    “어여 말해 봐.”

    우민아는 나른한 암사자처럼 기대앉아 희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든 경청하겠다는 태도였다.

    희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것도 제 스킬이에요.”

    “뭐? 나물 따는 스킬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고기 굽는 스킬도 있어? 대박이네.”

    흥미로운 것을 보았을 때처럼 우민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살림꾼’이라서 진짜 살림에 관한 스킬은 다 있는 거야?”

    희나는 자기의 스킬들을 잘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희한한 능력이 다 있었다. 고기를 잘 구울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에서부터, 청소할 때마다 능력치가 올라가는 스킬, 집을 주는 스킬까지…….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지만, 다 이런 생활 관련 스킬이에요.”

    “어디 가서 내 스킬이 뒤지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고기 굽는 스킬은 진심으로 탐났어…….”

    우민아가 아까의 고기 맛을 떠올렸는지 입맛을 다시며 제안했다.

    “고기 1인분에 껍데기 2인분 더 시킬래? 이번엔 진짜 천천히 얘기하면서 먹자. 그래, 이왕 먹는 김에 술도 좀 마실까?”

    “언니가 더 드실 수 있으시면 더 시켜도 괜찮아요. 고기 굽는 게 힘들진 않으니까요. 그리고 술은……. 음. 저도 마실래요.”

    그렇지 않아도 기름진 걸 잔뜩 먹었더니 맑은 이슬이가 생각나던 참이었다.

    우민아는 일곱 번째 추가 주문을 했다.

    그리고 둘은 지글지글 고기와 껍데기가 익어 가는 불판을 앞에 둔 채 본격적으로 대작을 시작했다.

    “시원하게 첫 잔 짠!”

    우민아가 호쾌하게 첫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희나도 목이 탔던 터라 술잔을 쭉 들이켰다. 쌉싸름하면서 달큼한 향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기름칠한 위장을 시원하게 소독하는 느낌이었다.

    “맛있네요.”

    희나는 입맛을 짭짭 다시며 우민아와 자기의 잔을 채웠다. 맑은 술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만큼 우민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술 좀 하나 봐?”

    사실 희나는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술을 잘 마셨다. 누군가는 말술이라고 하던데,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희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호칭이었다.

    게다가 희나는 사회생활에서 술 잘한다는 이미지가 얼마나 귀찮고 해로운 것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시치미를 뚝 뗐다.

    “그건 아니고, 남들만큼만. 완전 못 마시는 수준은 아니에요…….”

    “그래? 손목 젖히는 스냅이 보통이 아니던데…….”

    어디 고랭크의 헌터 아니랄까 봐, 우민아는 눈썰미가 좋았다.

    그렇게 의례적인 술자리 토크가 지나가자 무겁던 입이 좀 트인 느낌이었다. 희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민아 언니, 이런 걸 여쭤봐도 되나 싶지만…… 원래 시스템 설명은 성의 없는 편이에요?”

    “무슨 말이야?”

    “그게, 제 스킬 설명은 전부 알아보기 어렵게 모호하게만 되어 있어서요. 예를 들어, 방금 고기 구우면서 썼던 스킬은 ‘이 맛이 바로 손맛’이라는 스킬인데요, 설명 창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요. ‘최고의 MSG를 맛보게 해 준다. 그것은 바로 손맛. 액티브 스킬.’ 이게 다예요.”

    희나는 시스템 창의 설명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그러자 두 번째 술잔을 비우던 우민아가 풉, 하는 소리를 내며 술을 뿜었다.

    희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휴지를 챙겨 주었다.

    우민아가 쿨럭쿨럭 사레 기침을 뱉어 내며 대답했다.

    “……시스템 설명이 모호하긴 하지. 그래서 설명을 얼마나 받아들여서 이해했느냐에 따라 스킬 사용 범위도 완전히 달라져.”

    “그런가요? 그런데 저는 ‘최고의 MSG를 맛보게 해 준다. 그것은 바로 손맛. 액티브 스킬.’이라는 문구에서 어떻게 문자 그 이상의 이해도를 보여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특이한데. 다른 건 어떤데?”

    우민아의 물음에 문득 희나는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안전’이라는 표현을 보고 나뭇잎으로 침상을 만들었더니, 진짜로 은신 효과가 있었던 것 말이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우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데. 네 경우는 공격 스킬이 아니라서 내가 도와주기에 좀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식으로 스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가면 될 거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술 한 병이 완전히 비었다.

    “저기요, 이거 한 병 더 주세요!”

    희나는 이슬 한 병을 더 시켰다.

    가게 주인은 두 여자가 벌어다 준 매출액에 싱글벙글했다. 이슬에 사이다를 한 병 끼워 주며 서비스라고 생색을 냈다.

    서비스가 오건 안 오건, 우민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희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이 ‘살림꾼’이라는 각성 능력으로 뭘 하려고? 생각해 둔 것 있어?”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 희나의 모습에 우민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바싹 구운 돼지 껍데기를 잘근잘근 씹었다.

    “당장 F급 헌터로만 각성해도 떼돈 벌겠다고 하던 일 다 때려치우고 던전 들어오는 놈들이 허다한데, 그런 것도 생각 안 해 봤단 말이야?”

    “어…….”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자, 우민아가 또다시 물었다.

    “아니, 일반인을 각성자로 만들어 준다는 각성자 학원까지 잘나가고 있는 판에! 정말로 각성하면 뭐 할지 생각해 본 적 없어? 네 미래가 걸린 일이잖아.”

    우민아의 진지한 물음에 희나는 말없이 작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각성을 하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직장과 집을 동시에 잃어버렸다. 그래서 정신이 없었다. 이건 좋은 핑계였다.

    하지만 희나는 알고 있었다. 자기 능력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을 일부러 회피해 왔다는 사실을.

    “……사실 저는 각성해도 헌터 활동 같은 거,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희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희나는 D급으로 각성한 오빠 덕분에 헌터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된지 잘 알고 있었다.

    난리 통에 부모님을 잃고, 단 하나 남은 피붙이였다. 그런 오빠가 돈을 벌어 오겠다고 몇 주일, 몇 달이고 연락이 끊기면 걱정에 희나의 속은 절절 끓었다.

    “……저한테 오빠가 하나 있어요. D급 헌터 일을 하고 있고요.”

    희나는 술잔에 술을 조르륵 따르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10년 전에 돌아가셔서 세상에 기댈 사람은 우리 남매 서로뿐이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오빠가 헌터 일 해서 위험한 일을 많이 겪는데, 저까지 위험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 같아서는 오빠도 일을 관두라고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고……. 대신 언제든 마음 놓고 돌아올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가족으로라도 남아 주고 싶어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온갖 수모를 받고 자란 희나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

    오빠와 함께 남들처럼 오순도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가족이 어느 날 다칠지도, 죽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희나는 조로록 따른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구운 고기 한 점을 먹었다. 희나의 손길이 닿은 고기는 조금 식었어도 아주 존득존득하고 탱글탱글했다.

    “저는 안정적인 회사에서 적당히 월급 받으면서 오래오래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어요. 각성자니, 헌터니 하는 모험적인 일은 저한테 안 맞아요.”

    진심 어린 대답에 우민아가 끙, 하고 신음했다.

    “내가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깊은 얘기까지 들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 정도 얘기가 뭐 별거라고요.”

    희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사실 10여 년 전의 사건 때문에 몬스터에게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들은 어딜 가든 넘쳐 났다. 희나만 특별히 고생한 게 아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다 힘들고, 슬펐다.

    “그래도 네 능력은 너무 아깝단 말이야.”

    우민아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희나의 능력에 집착했다. 희나는 우민아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돈을 벌려면 헌터 일을 해야 하는데, 고기 굽는 능력 같은 걸로 뭘 하겠어요? 차라리 고깃집에 취직하는 편이 낫지……. 헉, 진짜 저 고깃집에 취직해서 고기 구워 주는 일 할까요? 아니다. 그건 오래 하기는 좀 힘든 일이니까 안 되겠네요.”

    희나는 혼자 이런저런 결론을 내 버리고 자기는 평범한 회사원이 적성에 딱 맞는다고 단언했다.

    우민아는 그런 희나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희나야, 너 너무 각성자의 범위를 좁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야? 헌터는 각성자가 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일 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헌터 일을 하니까 각성자는 헌터다, 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지.”

    그녀의 말에 희나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럼 뭘 하는데요?”

    그러자 우민아가 테이블을 탕, 치며 말했다.

    “우선 네 스킬 얘기부터 들어 보자. 남의 스킬 같은 거, 자세히 캐는 건 매너가 아니지만, 넌 아예 능력을 제대로 쓸 생각 자체가 없어 보이니까.”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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