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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5화 (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5화

    어쩐지 시스템 멘트가 야바위꾼 대사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그래도 집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으니까.”

    희나는 깨끗해진 상태 창과 더러운 집 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자기 위안 삼아 중얼거렸다.

    더러운 집은 치우면 되는 일이고, 어쨌든 집이 생겼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뭐, 물은 잘 내려가네.”

    시험 삼아 화장실의 수압을 확인해 보니 물만은 힘차게 나왔다.

    적어도 부동산 매물 보러 다닐 때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는 갖춘 셈이었다.

    방 이곳저곳을 살펴본 후 한구석에 쪼그려 앉았을 때였다. 눈앞에 시스템 창과는 또 다른 알림 창이 반짝거렸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것 축하!」

    “……이건 나를 조롱하는 건가?”

    희나는 불쾌해하며 알림 창을 껐다. 그러자 곧바로 다시 창 하나가 떴다.

    「이곳을 따스하고 쾌적하게 가꾸어 가는 건 집주인이 해야 할 일.」

    “내가 전업 청소부도 아니고 이런 데를 어떻게 치워?”

    혼잣말하자 시스템은 아닌 무언가는 희나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살림꾼의 본분.」

    “본분은 무슨…….”

    「집주인 능력 미흡. 수많은 수련 필요.」

    “뭐야, 내가 D랭크라서 이렇게 더러운 집을 줬단 뜻이야?”

    지적에 희나는 버럭 화를 냈다.

    이상한 각성 능력에 랭크가 낮은 것도 서러운데, 그래서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집을 받았다고 하니 더 열이 뻗쳤다.

    “너 누구야? 시스템은 아닌 것 같은데, 나와서 이 상황 좀 설명해!”

    희나는 가게 매니저 부르는 진상 손님처럼 몸을 바동거리며 마구 떼를 썼다.

    사실 이러면서도 속으로는 ‘이’ 존재가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분을 좀 풀어야 할 것 같았다.

    희나의 정신은 매우 지친 상태였다. 지난 새벽부터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몇 번이나 담금질당했는지 모른다.

    희나는 담금질하면 할수록 단단해지는 무쇠가 아니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감정 변화에 짜증과 피로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어? 나한테 이딴 집을 집이라고 넘길 거였으면 뭐든 변상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허공을 향해 틱틱거리고 있는데, 바닥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제법 커다란 형체였다. 희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꺅! 벌레!”

    부웅,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인가 퍽 하고 손에 맞아 벽을 향해 튕겨 나갔다.

    무언가 젤리처럼 말캉말캉한 것이었다.

    툭.

    벽에 부딪친 그것은 금세 더러운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희나는 손을 탈탈 털면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희나의 짐작처럼 벌레는 아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그것은 힘겹게 꿈틀거리며 떠들었다.

    「능력에…… 합당……한…… 분양……. 변상…… 무필요.」

    “뭐야, 여태까지 대답하던 게 얘였어?”

    희나는 금세 경계를 풀고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달팽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인데도, 실제 달팽이처럼 징그러운 모양새는 아니었다.

    귀여운 회색 껍데기에 젤리같이 통통한 살구색 몸체를 가졌다.

    「폭력적…… 대응…… 투……쟁…….」

    달팽이는 희나의 손맛에서 한참 동안 헤어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였다.

    자그맣고 귀여운 몸뚱어리로 투쟁을 외치는 그 모습은 조금 애잔하게 느껴졌으므로, 희나는 달팽이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집주인 성향 파악 완료! 다혈질! 폭력적!」

    달팽이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희나의 폭력성을 비난했다.

    희나는 달팽이에게 사과했다.

    “아팠으면 미안. 그런데 갑자기 벌레 같은 게 튀어나와 가지고 깜짝 놀랐거든…….”

    이런저런 집 상태에 대한 짜증과는 별개로, 희나는 실체를 가진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게 비록 달팽이일지라도…….

    순순히 사과하자 달팽이가 삐쭉 튀어나온 안테나 같은 촉수를 휙휙 휘둘렀다. 짜증이라도 내는 것 같은 섬세한 무브먼트였다.

    「손버릇, 섣부름. 고약한 성향!」

    “놀라면 그럴 수도 있지, 말이 조금 심한 것 아니야?”

    「가해자 유구무언.」

    별소리를 다 하는 달팽이였다.

    희나는 몸을 낮추어 달팽이를 들여다보았다. 눈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눈처럼 보이는 부분에 아이 콘택트를 했다.

    “아까 내 집 마련의 꿈 이룬 것 축하한다고, 집주인의 본분이 어쩌고저쩌고하던 게 너였어?”

    그러자 안테나 두 개가 기역 자로 까딱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긍정.」

    “그럼 넌 뭐야? 시스템도 아니고, 갑자기 이렇게 희한하게 나타나기까지 하고……. 이런 건 처음 들어 보는데.”

    「당연. 본 달팽이. 몹시 특별.」

    달팽이의 안테나가 빳빳하게 섰다.

    고작 그뿐인데도 주먹만 한 달팽이에서 범접할 수 없는 거만함이 느껴졌다.

    「본 달팽이, 스킬 ‘홈 스위트 홈’ 주택 관리자.」

    * * *

    던전 게이트에 휘말린 피해자로서 희나는 해야 할 일이 몹시 많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청결을 되찾는 일이었다. 희나는 대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새 옷을 사서 갈아입은 후에야 개운하게 다음 목표를 생각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돈은 있었다. 지갑 챙기기 귀찮아서 주머니에 대충 꽂아 넣어 두었던 신용 카드 한 장이 큰일을 했다.

    “주민 센터 가서 임시 신분증 받아 오고, 휴대전화 개통하고…….”

    희나는 해야 할 일들과 필요한 물건들을 손가락을 꼽아 가며 셌다. 졸지에 백수가 된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잡다하게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생활용품이랑 청소 도구, 옷가지도 사야지.”

    정말로 많았다. 이렇게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희나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주민 센터로 향했다.

    어제 던전 게이트 피해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 둔 덕에 임시 신분증은 금방 발급받을 수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던전 피해자가 속출한 덕에 정부의 관련 일 처리 속도는 거의 광속에 가까워졌다.

    참고로 던전 관리처 산하 공무원들은 야근에 갈려 나가기로 유명했다.

    아무튼 희나는 발급받은 임시 신분증으로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국민 대접을 받고 살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휴대전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했다.

    당장 오빠와 연락할 수단도 수단이거니와, 새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저금해 둔 돈이 있어서 한동안 걱정은 없겠지만, 언제까지 실직 상태일 수는 없지.’

    희나는 오빠에게 자기는 무사히 살아 있으니 던전에서 나오면 연락 좀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던전 안에서는 현실 세계의 통신 기기는 먹통이 되는 터라 오빠가 이 메시지를 당장 볼 수는 없겠지만, 연락은 해 둬야 했다.

    “어휴.”

    오빠에게 연락을 남긴 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새 직장을 구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뒤숭숭해졌다지만 아직도 대학 졸업자는 넘쳐 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든 희나로서는 스펙이건, 연봉이건 그들보다 한 발짝 뒤였다.

    “요즘 경기가 어려워서 경력자 재취업도 힘들다던데……. 금방 취업할 수 있겠지.”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복잡한 상념을 털어 냈다.

    “축 처져 있으면 안 돼! 당장 해야 할 일부터 생각하자, 이희나!”

    적어도 지금은 던전이란 것이 처음 생겼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오빠와 단둘이 남았던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비규환이었던 세상은 훨씬 안정되었고 던전 피해자 지원도 생겼다.

    ‘거기다 나도 일단 각성자가 되었으니까.’

    살림꾼이라는 이상한 클래스였지만, 덕분에 목숨도 구하고 공짜 집도 얻게 되었다.

    행운이라면 엄청난 행운이었다.

    능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집 안에서 희나를 기다리고 있을 회색 껍데기의 달팽이가 생각났다.

    달팽이는 한시라도 빨리 집 안을 치워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다.

    “첫인상부터 이상하게 박혔는데, 늦기까지 하면 더 난리겠지?”

    희나는 말랑말랑해 보였던 달팽이의 머리통을 상상하며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친해져서 그 머리통을 통통 튕겨 보고 말리라…….

    * * *

    “으악, 무거워!”

    희나는 양팔 가득 물건을 짊어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행동. 굼뜸. 살림꾼 소양 부족!」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잔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사회생활 5년 차인 희나는 이런 사소한 잔소리 따위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한 내공이 있었다.

    “어휴. 집 현관문을 어디서나 불러올 수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팔 부러질 뻔했네. 집 안 꼴이 엉망이라 청소 도구 사는 데만 20만 원이 넘게 들었어!”

    들으란 듯이 투덜거리자 달팽이가 깐깐하게 안테나를 휘저었다.

    「집주인. 알뜰함 부족! 마트별 가격 비교 필수.」

    대체 집 스킬에 딸려 온 관리자 달팽이 따위가 어떻게 알뜰하게 장 보는 방법을 아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에 희나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오늘 처리할 게 너무 많았어. 그런 와중에 이곳저곳 다니면서 가격 비교하는 건 시간이 더 아까워. 그냥 마트에서 적당히 싸고 좋은 물건 골라 오는 편이 더 낫지. 시간이 금이란 소리 못 들어 봤어?”

    희나는 오늘 자기가 얼마나 바빴는지 푸념하며 물건을 늘어놓았다.

    욕실 청소용품은 욕실 청소용품대로, 집 청소용품은 집 청소용품대로, 그리고 희나가 쓸 기초 생활 품목은 또 따로.

    장 본 후 곧바로 물건들을 정리하는 건 희나의 습관이었다.

    달팽이는 희나의 재빠른 손놀림을 감시하듯 안테나를 까딱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정했다.

    「……합리적 사고. 인정.」

    “그치?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달팽이구나.”

    희나는 씨익 웃었다.

    혼자 있었더라면 앞날이 막막해서 울적했을 텐데, 귀여운 달팽이가 말동무라도 해 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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