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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3화 (3/228)

던전 안의 살림꾼 3화

이제 살았다는 기쁨에 희나는 여자를 끌어안으려 했다.

“워, 워. 진정해.”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그제야 희나는 자기 상태를 눈치챘다.

늪지에 빠져서 온몸은 축축했고, 풀을 뜯느라 온몸이 흙투성이에, 나뭇잎이 잔뜩 붙어서 거지꼴도 이런 상거지꼴이 없었다.

얼굴엔 아마 땟국물이 흐르고 있을 거다.

“일대가 다 던전 게이트에 휘말려서 난리 났거든. 근처에 있던 헌터들 급하게 비상 호출해서 일반인 구출하고 있어.”

“다행이다. 던전 보스는 클리어했어요?”

“그건 한참 전에 끝났지. 여긴 고작 E급밖에 안 되는 던전이거든.”

아, 그렇게 힘들게 살아남았는데 고작 E급 던전일 뿐이었던가?

어쩌면 고작 D랭크짜리 스킬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던전 랭크가 낮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이 와중에 운이 좋다면 좋은 편이었네.’

희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던전 출구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지, 여자가 잡담을 걸었다.

“근데 너, 각성자야?”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희나는 깜짝 놀라 얼결에 대답했다.

“그, 그런데요. 어떻게 알았어요?”

“금방 감지되는 걸 봐선 랭크가 낮은 것 같기는 한데, 기척을 숨기고 있었잖아. 그런 건 각성 스킬이 아니면 못 하지.”

날카로운 지적에 희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실종자 명단엔 각성자 없던데. 능력 숨기고 일반인인 척하는 쪽이었어? 그거 벌금 무는 거 알고 있지?”

여자는 당장 던전을 나가면 희나를 신고할 것처럼 말했다. 희나는 급하게 변명했다.

“아뇨! 저, 던전 떨어지기 직전에 각성했어요!”

“진짜?”

“정말로요! 새벽에 야근하다가 각성해 가지고…….”

절절한 사연에 여자가 “오…….” 하고 탄식했다.

“큰일 날 뻔했는데 잘됐네. 어떤 계열로 각성했어?”

여자는 무서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성격이 꽤 털털했다. 방금 처음 본 사이인데도 별걸 다 물어봤다.

희나는 쥐구멍에 기어들어 가는 듯한 소리로 대꾸했다.

“……꾼이요.”

“뭐? 무슨 꾼?”

“……사, 살림꾼이요.”

괴상한 호칭을 고백하려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여자 또한 희나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눈을 크게 떴다.

“살림꾼? 헌터 일을 꽤 오래 했는데, 그런 클래스는 처음 들어 보네!”

“히든 클래스라더라고요. 스탯도 엄청 낮고 스킬명들도 다 이상해서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락한 침상’이랑 ‘나물 뜯기’ 스킬 덕분에 겨우 살았어요.”

“푸하하. 안락한 침상? 나물 뜯기? 그게 스킬 이름이야? 완전 생활 친숙형 이름이잖아!”

희나의 대꾸가 어지간히 웃겼는지 여자는 잠깐 멈춰 배를 잡고 웃었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희나는 어쨌든 목숨을 살려 준 대가로 웃음이라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무념무상인 상태로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희나는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1차로 놀랐고, 2차로는 등장인물의 정체 때문에 깜짝 놀랐다.

“가, 강진현 헌터?”

남자는 희나 같은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에 익숙한지 고개를 까딱 끄덕여 보였다. 매우 간략하고도 재수 없어 보이는 자기소개였다.

‘하긴, 저 사람은 자기소개가 필요 없지.’

희나는 그의 재수 없음에 납득했다.

이 남자는 대한민국 사람이면 백이면 백,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강진현이고, 직업은 헌터였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헌터!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로는 ‘재앙의 손길’, ‘파괴하는 손’ 따위의 낯부끄러운 표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호칭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았는데, 그건 그의 강력한 무위와 잘생긴 얼굴 때문이었다.

잘생긴 사람은 무얼 하든 잘 어울리는 법이었고, 무엇보다 주먹은 법보다 강했다.

아무튼, 그는 깔깔 웃고 있는 여자에게 사무적인 낯으로 다가갔다.

“우민아 헌터. 일반인 구출 작전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희나는 그제야 자기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의 이름이 우민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나가고 나면 인터넷에 검색해 봐야지.’

감사의 표시로 소속 길드에 화환이라도 보내고 싶었다.

“아. 여기 갓 각성한 햇병아리 각성자가 있어 가지고……. 얘길 듣다 보니까 능력이 재미있어서 그만.”

여자, 그러니까 우민아는 웃음으로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강진현은 그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작게 찡그렸다.

그러자 고작 D급 살림꾼에 불과한 희나로서는 오금이 다 저려 왔다. 전 세계에 몇 명 없는 S급 헌터의 기세가 대단하긴 했다.

“타인에게 자기 각성 정보나 능력치를 함부로 공개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는 희나에게 조언했다. 그러면서 우민아에게 한 소리 하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뭣 모르는 신참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상급 헌터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기본적인 매너는 지켜야지요.”

“꼬장꼬장한 영감탱이 같기는. 내가 얘 골수를 쪽쪽 빨아먹을 것처럼 말한다, 너? 나 그 정도로 빈한 사람 아니야.”

우민아가 투덜거렸다. 희나도 망설이다, 끼어들어 그녀의 편을 들었다.

“저는 괜찮아요. 랭크가 낮기도 하고 썩 대단한 능력도 아니거든요. 좀 특이할 뿐이지.”

그러자 우민아가 편을 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강진현은 그 모습이 달갑잖은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전을 위해서는 각성 정보는 되도록 감추고 있는 편이 낫습니다.”

“알겠습니다, 강진현 헌터님…….”

희나는 순순히 답했다.

강진현이 희나보다 두 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네 살 많은 친오빠에게 혼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른에게 혼나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민아는 그의 잔소리에 굴하지 않고 신이 나 입을 놀렸다.

“그런데 얘 각성 클래스가 진짜 재밌어. 너도 들어 볼래? 너도 어딜 가서 남의 능력 막 떠벌리고, 그런 놈은 아니잖아.”

강진현은 딱 잘라 거절했다.

“됐습니다. 남의 각성 정보 따위 별로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정말 사무적이면서도 싸가지 없는 말투였다.

‘엄청 냉정하네.’

사실 희나 또한 이렇게 무서운 사람에게 자기 능력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S급 헌터 앞에서 D급 살림꾼이라니……. 비웃음이라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쳇, 냉랭하기는. 아무튼, 할 말 끝났으면 가 봐. 나도 농땡이 그만 부리고 내 일 할 테니까.”

우민아는 강진현이 무섭지도 않은지 벌레를 쫓아내듯 손을 훠이훠이 휘둘렀다.

‘이러다 싸움이라도 나는 거 아냐?’

희나로서는 가슴이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강진현은 의외로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휙 돌려 사라졌다.

“진짜 꽉 막힌 인간이지?”

강진현이 사라지자마자 우민아는 그의 뒷말을 했다.

희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피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 하하.”

“뭐, 사실 이런 거 함부로 물어보는 게 아니긴 해. 내가 좀 철없이 굴긴 했다. 미안.”

이어지는 호탕한 사과에 희나는 땟국물로 더럽혀진 뺨을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 목숨도 구해 주신 분한테 그 정도쯤은 가르쳐 드릴 수 있죠. 거기다 각성 클래스가 원체 희한해서 우민아 헌터님 아니었어도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했어야 할 일이었어요.”

조곤조곤한 대답에 우민아가 감탄했다.

“와. 너 되게 말 예쁘게 한다.”

“예? 제가요?”

평범한 사회인식 겸양의 말투가 언제부터 ‘예쁜 말’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민아에게는 꽤 인상 깊게 느껴졌나 보다.

“내 주변에 너처럼 사근사근하게 얘기하는 새끼들은 한 명도 없어.”

“목숨 구해 주셔서 감사하단 말은 많이 들으실 것 같은데…….”

“보통은 오줌 지리고 질질 짜느라 감사 인사할 만한 상태는 아니거든. 너처럼 침착한 애는 처음이야.”

“아하…….”

희나는 자기 담력이 의외로 대단히 셀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민아는 그런 희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품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너, 마음에 드는데 나중에 연락 한번 해. 밥이라도 한 끼 하자. 각성 관련으로 물어볼 것 있으면 물어보고.”

의외의 친절에 희나는 얼떨떨하게 답했다.

“어?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괜찮아. 나 빈말 안 하는 사람이야. 정말로 나중에 연락하기다? 요새 웃을 일이 없었는데 덕분에 실컷 웃어서 좋았거든.”

그러면서 다시 한번 명함을 내밀기에, 희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명함을 받아 누추한 주머니에 넣어 모셨다.

우민아는 그 모습을 몹시 흐뭇하게 내려다보고는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럼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게이트 밖으로 데려다줄게. 밖에 응급 구조 인력들이 있으니까 거기서 검사받고, 재난 피해 관련 상담도 받고 그래.”

말을 끝내자마자 우민아는 성큼성큼 정글을 헤쳐 갔다.

희나는 그녀를 잃어버릴까 봐 헐레벌떡 그 뒤를 따라 뛰었다.

* * *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희나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주변의 풍광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던전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로부터 어찌어찌 겨우 살아났더니, 현실이 희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환자분, 다리 다치셨어요? 들것 불러 드릴까요?”

지나가던 구조대원이 털썩 주저앉은 희나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희나는 그의 질문도 눈치채지 못한 채 넋 놓고 중얼거렸다.

“내 직장……. 내 집……. 어떻게 둘 다 한꺼번에 없어질 수가 있어?”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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