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87)화 (87/87)
  • 87

    꽂혀 있던 검은 새카만 연기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잔해처럼 남겨진 자욱한 연기가 흩어지며 하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한이 기울어진 얼굴을 받쳐 짚는 순간 내려앉은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람아!”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고, 온기가 올라왔다. 곧 눈꺼풀이 느릿느릿 올라가더니 밤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

    아주 긴 꿈을 꾸었다.

    곤룡포를 입은 이한, 가드처럼 지켜주며 장난치던 막내 차사, 어린 영진, 지금과 다르지 않은 우진, 아름다운 구미호, 자애로운 감은장아기와 삼신할머니. 익숙한 얼굴들이 나오는 꿈을 꿨다.

    꿈이 길어 현실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멍하니 하늘을 보는데 귀에 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동자를 움직여 울고 있는 이한을 보았다.

    “……이, 한 님?”

    입 밖으로 이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갑자기 꿈과 현실이 섞였다. 하람이 파드득 떨다 다급하게 이한을 끌어안았다.

    “아, 아…….”

    살았다. 가슴에 박힌 검이 사라지고 살아났다.

    기쁨에 이한을 끌어안고 다시 보고 싶은 얼굴을 더듬거리는데 무슨 일인지 이한이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하람이 안긴 상체를 들어 이한과 마주 앉았다.

    “이한 님?”

    “날, 날 용서하지 마라…….”

    “네? 무슨 말씀이세요?”

    “널 죽인 날, 절대 용서하지 마라.”

    널 죽인 날이라니? 이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좁혔다가, 꿈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날 위해서 죽을 수 있나?’

    아, 긴 꿈이 사실 제 전생이었구나. 깨달음과 함께 모든 것이 기억났다. 하람이 끝내 무너진 이한을 멀거니 보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이한의 양 뺨을 짚어 우는 얼굴을 마주했다.

    “늘 후회했어요. 그날, 오해하고 있는 이한 님의 말을 제대로 들을 걸 그랬다고, 그렇게 죽는 게 아니라 계속 설득을 했어야 했다고.”

    명부에서 심사를 받던 중 오도전륜대왕이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었다. 그때 이한을 설득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여전히 은애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말을 들은 오도전륜대왕이 믿을 수 없게도 윤회의 끝인 천상계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천상계에 있는 감은장아기와 삼신할머니를 도우며 아이들과 꽃을 키우는데 혼자 남은 이한이 걱정되고, 그리웠다.

    쌓이고 쌓이는 후회와 걱정, 그리움에 결국 다정한 두 신에게 부탁했다. 이한을 만나고 싶다고.

    “이한 님을 설득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도망간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외척 세력 탓에 이한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확신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확신을 주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트라우마를 주었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것은 오히려 저였다. 이한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이한의 눈물을 닦고 또 닦아 주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하람을 보던 이한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네 잘못도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널 오해하지 않았다면, 내가 죽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이한 님께 믿음을 주지 못한 제 탓이예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저를 안아 주세요.”

    하람이 이한을 끌어안았다. 이한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하람을 더욱 강하게 안았다.

    “……내가 널 죽였는데, 어떻게 너는 여전히 날 생각하는구나.”

    “은애하니까요.”

    이한을 웃기기 위해 슬쩍 웃는데 예상과 달리 이한이 더 운다. 하람이 어어? 했다가 이한의 너른 등을 토닥였다.

    “이한 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지도, 울지도 마세요.”

    이한이 그랬듯이 너른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데 별안간 이한의 몸이 점점 검은 재로 변해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하람이 헉, 숨을 삼키며 굳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하, 람아.』

    사람의 목소리처럼 또렷하게 들리던 이한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고 머리에 울렸다. 그리고 몸을 끌어안고 있던 팔 하나가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이, 이한 님?”

    『……은애한다.』

    이한의 입술이 하람의 입술에 닿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졌다.

    “……이한 님!”

    이한이 사라졌다. 다급하게 흩어져 사라지려는 검은 재를 부여잡고 이한을 큰소리로 찾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하람이 원귀를 데리고 명부로 향하는 차사들과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구렁덩덩신선비, 노앵설을 훑었다.

    “……아, 안 돼. 이한 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차사의 팔을 부여잡았다.

    “이한 님이 사라졌어요. 이한 님 좀…….”

    『소멸한 자는 우리도 모른다.』

    기계적인 음성에 멍해졌다. 차사를 가만 응시하다 풀썩,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왜…….”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불현듯 ‘용서’가 생각났다.

    이한에게 아무 잘못 없다고 용서했다. 이한이, 소멸했다.

    “아, 아…….”

    이한을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터졌다. 하람이 소리 높여 오열하다 안 된다고 울부짖었다.

    “안 돼요! 이제야 진심을 알게 됐는데, 이대로 헤어질 수 없어요! 아아!”

    하늘에 있는 명부 문이 닫히려고 했다. 문을 향해 소리치다 급하게 일어섰다.

    “오도전륜대왕!”

    끼이익 소리 내어 닫히던 문 너머에서 쿠르릉, 꼭 천둥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눈물에 젖어 명확하지 않은 시야로 문을 노려보는데 닫히던 문이 멈췄다. 곧 익숙한 얼굴이 걸어 나왔다.

    『말하지 않았느냐. 소멸은 말 그대로 소멸. 윤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고.』

    슬픈 얼굴을 한 오도전륜대왕이 주저앉아있는 하람의 앞에 섰다. 하람이 떨리는 입술을 이로 강하게 깨물었다.

    “그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본인이 바라고 또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길도 있다고. 이한 님께 물어봐 주세요…….”

    『까마득히 살아 소멸하고 싶어 했다. 바라던 대로 됐는데 왜 물어야 하는가.』

    “아…….”

    오도전륜대왕의 말대로 이한은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 살아왔다. 소멸을 바라고, 준비했다. 하람은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눈앞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멍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엉엉 소리 내어 눈물을 쏟아내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게,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원귀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 원귀를 처리하면 제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다고 하셨죠.”

    언젠가 이한 모르게 오도전륜대왕과 거래한 적 있었다.

    원귀 주제에 원귀와 잡귀를 선동해 일을 벌이기도 하고, 하늘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원귀를 처리하면 이한의 기억 일부를 주고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하람이 이전에 했던 대화를 생각하며 말하자 오도전륜대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마…….』

    “제가, 제가 원귀를, 부원군을 죽였으니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여기서 소원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듯 당황한 오도전륜대왕에게 소원을 외쳤다.

    “이한 님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 * *

    “이왕 온 김에 손 봐야 하는 곳 다 봐 주면 안 돼?”

    “간단한 건 매형이 할 줄 알 텐데?”

    “에이, 전문가가 아니잖아.”

    현장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진에게 전화가 왔다. 수도가 터졌다고 봐 주면 안 되냐는 말에 황당했다가 급한 일이 없어 오랜만에 집에 왔다.

    한 시간이면 가겠거니, 하고 왔는데. 수도뿐만 아니라 현관 등이 나갔다, 화장실 타일이 깨졌다, 안방 문고리를 바꿔야 한다 등. 영진이 별별 것을 다 부탁했다.

    “교체할 수는 있는데, 교체할 거 필요해.”

    “에이, 알고 다 준비했지.”

    너튜브와 설명서만 보면 할 수 있는 것을 제가 전문가라고 다 떠넘긴다. 하람이 뭐가 많이 든 상자를 내미는 영진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다 결국 한숨을 쉬며 상자를 받았다. 영진이 히히 웃었다.

    “다 하면 시원한 커피 타 줄게!”

    “고작 커피?”

    “고작이라니. 내가 커피 직접 타 주는 거 흔치 않다?”

    “……그냥 밖에서 커피 사 마실게.”

    “아이! 밥 어때? 밥해 줄게!”

    상자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영진이 재빨리 상자를 잡아 막았다. 하람이 눈을 가늘게 한 채로 영진을 빤히 보았다.

    “진수성찬!”

    “……알았어.”

    최근 일이 바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수성찬에 맘 약해졌다. 하람이 상자를 바로 들었다. 영진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사랑채 방충망도 보수해야 한다. 부탁해!”

    “…….”

    영진이 일을 또 맡기고는 저녁 식사 예약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떠났다. 하람이 멀거니 서 있다 영진이 부탁한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식당을 하고부터 자잘한 문제가 생겼다. 하람이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보수한 뒤 상자에서 몇 가지만 챙겨 사랑채로 넘어갔다.

    “……오랜만이네.”

    이한이 소멸한 그 날. 사랑채에서 지내던 노앵설과 우렁 각시, 우렁 도령, 구렁덩덩신선비가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하람은 인간 외의 존재를 볼 수 없게 됐다. 자연스레 본가에서도 나가게 되었다.

    쓰는 이 없어 방치된 사랑채는 식당 직원들이 쓰는 공간으로 변했다. 하람이 이한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사랑채를 훑어보고는 영진이 시키지 않은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보수하고 안채로 갔다.

    “밥 다 먹으면 갈 거야?”

    “가야지.”

    이전에 우렁 각시가 차려 줬던 밥상이 생각나는 화려한 교자상 앞에 앉아 밥을 먹는데 별안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하람이 화면에 떠 있는 [우진 대표님]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볼일 다 끝났어?

    “……이제 가려고요.”

    하람이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 다른 게 아니라 바쁘지 않으면 클라이언트 만나러 가줄 수 있을까 해서.

    “어떤 건이에요?”

    소리 없이 가냐고 묻는 영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일어섰다.

    ―주택 리모델링. 클라이언트가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내가 갈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보다 네가 더 잘할 것 같아.

    지네 각시 집을 리모델링한 후 사진을 올리고부터 리모델링 건이 늘었다. 하람이 주차장으로 가며 알겠다고 하고 약속 장소를 전달받았다.

    약속 장소가 그리 멀지 않은 카페다. 무슨 커피를 마실지 고민하며 운전하는데 문자 알림이 떴다. 차가 신호에 걸린 틈에 문자를 확인했다.

    [아직 연락 없나요?]

    구미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하람이 답장 버튼을 눌렀다.

    막내 차사를 잘 가르친 대가로 구미호가 찾는 ‘님’이 사고로 죽어 윤회 중임을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하면서 구미호와 연락을 주고받게 됐다.

    연락이라는 말에 이한이 소멸한 날이 생각났다.

    하람은 오도전륜대왕에게 이한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에 오도전륜대왕이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본인이 원치 않으면 윤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답했다. 하람은 이한이 저를 기다렸듯이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나 연락을 받지도,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하람이 한숨 쉬며 아직 없다고 답장 보낸 뒤 다시 운전했다.

    차가 막히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클라이언트를 만나기 전에 앞서 차에 있는 태블릿 PC를 챙겼다. 배터리가 충분한지 확인한 뒤 약속 장소인 카페로 들어갔다.

    유명한 카페인지 1층에 사람이 가득하다. 놀랐다가 클라이언트의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는 것이라고는 2층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뿐.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찾아야 하지? 하고 걱정하며 2층 갔다가 발이 굳었다.

    “……바쁘다면서 왜 안 가는 거지?”

    “바빠 죽겠는데, 네가 놓치는 게 있을까 봐 남아 있는 거거든?”

    “영감 진짜 할 일 없나 보군.”

    “아비한테 영감이라니!”

    2층에는 나이가 느껴지는 중년 남자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만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꿈에서 보았던 그 얼굴에 설마 하고 급하게 다가가자 아옹다옹하던 두 남자의 대화가 뚝 끊겼다. 하람이 홀린 듯이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한…….”

    손끝이 뺨에 닿으려는 순간 남자가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뒤로 훅 물렸다.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뭐지?”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 얼굴에 하람이 깨어났다. 굳어 있는 손을 거두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는 분이랑 닮으셔서 제가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클라이언트를 향해 엄청난 실수를 했다. 시작도 전부터 망했다고 생각하며 의자를 꺼내 앉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건축 사무소 휴에서 온…….”

    “아는 분이랑 많이 닮았는가 봅니다?”

    브리프 케이스를 탁자에 두며 인사하는데 중년 남자가 말을 끊으며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하람이 꼭 오도전륜대왕 같은 중년 남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네. 착각할 만큼 닮았습니다.”

    “오호, 닮았다는 그분은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이한이라고 합니다.”

    “음? 우리 아들도 이름이 이한인데?”

    중년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람이 움직임을 멈추고 중년 남자를 보았다.

    “이한, 이요?”

    “네. 그러고 보니 우리 앞에 계시는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될까요?”

    “저는 하람, 이하람입니다.”

    “……하람?”

    중년 남자가 무어라고 하든 조용히 커피 마시던 남자가 소리 내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름이 하람이라고?”

    “……네.”

    제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의아한 얼굴을 하자 남자가 손을 드는데 별안간 딱, 소리와 함께 움직임이 멈췄다.

    “어린 주인.”

    꼭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남자가 굳었다. 응? 하는데 중년 남자가 익숙한 단어를 말했다. 놀라 중년 남자를 보자 웃었다.

    “소원을 들어주었네.”

    “……오도, 전륜대왕님?”

    “이한이 어린 주인을 만나고 싶어 했어. 새로이 윤회하려는데 그렇게 되면 만나는 데 오래 걸리게 되지. 그래서 일찍이 생이 다한 몸에 영혼을 넣었는데,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네.”

    “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글쎄, 자네의 이름처럼 이한이 반응할 말을 하면 기억을 찾겠지.”

    하람이라는 이름처럼 이한이 반응할 말. 무슨 말이 있을까 생각하는데 오도전륜대왕이 일어났다.

    “잘 해보게.”

    “가, 가시는 건가요?”

    이렇게 간다고? 하람이 당황스러움에 벌떡 일어났다. 오도전륜대왕이 하하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을 방해하면 쓰나. 이 카페가 한이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원 없이 대화하게나.”

    오도전륜대왕이 파이팅! 하고 떠났다. 하람이 얼굴을 구겼다가 천천히 움직이는 남자의 팔에 다급하게 의자에 앉았다. 동시에 땡, 하듯이 남자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하람? 하람…….”

    “제, 제 이름이에요. 이하람.”

    이름을 말하자 남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람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한 님. 사랑해요.”

    “……뭐?”

    이마를 꾹꾹 짓누르던 남자가 미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하람이 다시 한번 더 마른침을 삼켰다.

    “이한 님, 은애합니다.”

    “……날 언제 봤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거지?”

    “아주 오래 전부터 봤어요.”

    “나는 널 처음 보는데.”

    “아니에요. 우린 아주 오래 봤어요.”

    “……미친 건가?”

    아무래도 더 강한 것이 필요한 것 같다. 하람이 이한과 했던 대화를 생각하다 번쩍 떠오른 말에 두 손을 들었다.

    “실례 좀 할게요.”

    두 손으로 이한의 양 뺨을 짚었다. 질색하는 이한을 마주 보았다.

    “이한 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지도, 숨지도 마세요.”

    알았죠? 하고 웃는 순간 구겨진 이한의 얼굴이 천천히 펴졌다. 얼마 있지 않아 놀란 얼굴이 하더니 뺨을 짚고 있는 손 위로 손을 겹쳤다.

    “……하람아.”

    오랜만에 듣는 조심스러운 부름에 하람이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 하람을 두 팔 가득히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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