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86)화 (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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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알아볼까요?”

“……그래.”

멀거니 응시하고 있자 일패기생이 눈치 좋게 의중을 물어왔다. 이한이 조용히 답하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하람과 우진을 보고부터 조금 나아졌던 속이 다시 나빠지다 못해 정무에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짜증스레 사람을 모두 물리자 일패기생이 안으로 들어왔다.

“알아보니 사이가 무척 좋다고 합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만큼 대화하고, 함께 자주 나간다고 합니다.”

하람이 저와 상선 외에 친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예상 못 한 사실에 당황스러운 가운데 밖에서 박우진이 왔다고 알렸다. 들어오라 하였다.

인사하는 목소리가 적당히 낮고, 가까이에서 본 얼굴 또한 사내답다. 체격도 별감만큼이나 좋은 것이 영 불쾌했다.

“그래. 하람과 잘 지내고 있나?”

“……처음에는 불편했으나 지금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편?”

“아무것도 몰라 어디에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몰라 어려웠습니다.”

설마 궁에서 도는 소문 때문일까. 지그시 보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가 하람과 어떤 공부를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등을 물었다.

우진이 조금이라도 대답을 이상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로 듣는데 대답이 막힘없다.

“하람을 어떻게 생각하지?”

책잡을 만한 구석이 없다. 끝으로 마지막 질문을 하자 지금껏 반듯하던 우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질고, 영민한 제자, 라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느리다. 그 목소리에 알아차렸다. 단순한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속이 완전히 뒤틀렸다. 박우진을 신경질적으로 내보내고 일패기생과 상선, 도승지를 불렀다.

“박우진이라는 자와 그 가족, 소문을 알아보아라.”

하람의 곁에서 치워야 한다.

서둘러 알아보라 하고 침전으로 가 며칠 후에 사용할 인검(寅劍), 사인참사검을 닦으며 기다리길 몇 시간. 바삐 떠난 세 사람이 돌아왔다.

그런데 세 사람의 얼굴이 다 좋지 않다. 이한이 미간을 좁히자 상선이 입을 열었다.

“……박우진이 중전마마와 친인척 관계이었습니다.”

“……선공감에서 평판이 좋으나 최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한다 하옵니다.”

“타인이 하람 님에 대해 묻거나, 소문에 대해 말하면 민감하게 반응한다 합니다.”

검을 닦던 이한의 손이 멈췄다. 세 사람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중전과 친인척? 하람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

들리는 것들이 하나같이 불쾌한 것들이다. 이한이 보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주안상을 들여라.”

아무래도 맨정신으로 더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술을 가지고 오라하며 장죽을 입에 물었다.

“전하…….”

일패기생이 핼쑥한 이한의 낯에 무어라고 하려다 이내 조용히 일어나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이한의 앞으로 거나한 주안상을 놓았다. 이한이 일패기생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장죽을 태우고 또 태웠다.

금세 희부연 연기가 자욱하게 번졌다. 그 너머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던 이한이 손을 들었다.

“하람을 데리고 와라.”

술을 마시고, 담뱃잎을 태워도 속이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하람을 불렀다. 상선이 주저하다 나갔다.

빈 술병이 계속해서 늘었다. 반복해서 술을 따르던 일패기생이 잠시 쉬는 게 어떻냐고 말하는 순간 하람이 왔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이한이 장죽을 입에 물며 손짓했다.

“왔군.”

오랜만에 제대로 본 하람은 낯빛이 상할 대로 상한 이한과 달리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한이 천천히 다가오는 하람을 보며 연기를 길게 뱉다 장죽을 아래로 내렸다.

“잘 지내는가 보구나.”

하람의 소식을 들으면 보고 싶을 까. 하람이 어찌 지내는지 묻지도, 듣지도 않았다. 그저 위험할 때만 말하라고 하고 일부로 반쯤 잊고 지냈더니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는데, 잘 지낸 것 같다.

저와 헤어지고 박우진이란 자와 지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놈이 있는 걸까. 의심을 담아 보는데 하람이 고개를 숙였다.

“예…….”

“어떻게 지내고 있지?”

넌지시 묻자 하람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조심스레 시선을 맞췄다.

“스승님들에게 배우고, 집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뿐인가?”

“……선공감소장 스승님을 따라 선공감을 둘러보거나 토목 현장을 가서 보기도 합니다.”

선공감소장을 따라 움직인다고. 이한이 장죽을 입에 물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선공감소장과 친한가 보군.”

우진과의 관계를 물을 줄 몰랐는지 하람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에 띄게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느리게 움직이더니 다시 시선을 맞췄다.

“……예.”

하람은 평민 출신이라는 제 신분에 누구와 크게 친해지지 않고, 친하다고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몇 번 만나지 않은 선공감소장인 우진과 친하다고 답한다. 이한의 입술이 비틀렸다.

“둘의 사이가 정말 그저 스승과 제자 사이가 맞느냐?”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제 전부를 내어 주었는데. 잠시 떨어져 있는 그 사이에 다른 사내를, 그것도 제 외척과 관련된 자를 만날 줄이야. 배신감과 분노에 장죽을 쥔 손이 떨렸다.

“저,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물음에 답해라.”

어떻게,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람 네가 나를 배신할 줄이야. 당황한 하람을 보며 장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전하,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대답해라.”

“아니,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람의 다급한 답에도 한 번 벌어진 틈이 다물려지지 않듯이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한이 눈매를 찌푸렸다.

“손을 잡거나, 입을…….”

“전하!”

나와 한 것을 우진과도 했을까. 우진에게도 은애한다고 속삭이며 안겼을까. 우진의 품에서 신음했을까. 우진과 함께 잠들었을까.

이한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앞에 있는 주안상을 옆으로 치워냈다. 거친 움직임에 주안상 위에 놓여 있던 것들이 바닥으로 형편없이 쏟아져 내렸다. 하람이 숨을 삼키고, 일패기생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하람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양팔을 부여잡았다.

“박우진과 무슨 말을 했지? 박우진을 은애하나?”

“저, 전하…….”

“말하라!”

“가, 가르침만 받았습니다. 은애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나를 은애한다고 했으면서, 나를 믿는다고 했으면서! 이한이 겁에 질린 이한을 내려다보며 증명하라고 외쳤다.

지금껏 이한의 자상하고, 듬직한 모습만 보았던 하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육식동물을 눈앞에 둔 초식 동물처럼 덜덜 떨며 떨리는 입술로 아아, 소리만 냈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하람의 모습에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이한이 일그러지는 하람의 얼굴을 보다 내던지듯 팔을 놓았다.

“……그래. 너도 날 하찮게 생각하는구나.”

낳아준 어머니도 천치에 모자란 놈이라고 욕하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하람이라고 다를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과 온갖 패물, 금은보화를 주어도 다른 자들과 같다. 이한이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가 풀썩 주저앉았다.

“가라. 내 눈앞에서 꺼져라.”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지켜보던 하람이 축객령에 한 박자 늦게 놀랐다. 뒤늦게 이한에게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저, 전하. 아니,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전하를 하찮게 생각합니까!”

“꺼지라고 하지 않았느냐!”

“전하가 제 전부입니다. 어떻게, 제가 어떻게 증명하면 믿겠습니까?”

쫓기듯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하람을 보던 이한이 비소하며 보료에 늘어져 앉다, 방금까지 닦았던 검은 검을 보았다. 이내 하람의 앞에 툭 던졌다.

“박우진을 은애하지 않는다면 죽일 수도 있겠지.”

“……아.”

“감히 내 것을 탐내고, 마음에 담은 박우진을 참해라.”

어렵사리 들린 하람의 상체가 무너졌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일패기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너무…….”

“시끄럽다!”

이한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들이켰다. 지켜보던 하람이 떨리는 손으로 검 위를 짚었다. 동시에 툭,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제겐, 전하가, 전부입니다. 오직, 전하뿐이라 전하를 위해, 서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날 위해서 죽을 수 있나?”

눈물에 젖다 못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하람의 말을 듣던 이한이 말을 자르고, 입술을 비틀었다. 하람이 혼이 반쯤 나간 얼굴로 이한을 응시했다. 곧 이한을 향해 더없이 공손하게 절했다.

“……전하, 부디 강녕하시옵고 태평성대를 이루소서.”

하람이 상체를 들며 검을 부여잡았다. 그대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제 가슴에 검을 깊게 찔렀다.

* * *

“……아, 아아!”

하람을 처음 만날 날, 함께 웃었던 날, 나란히 걸었던 날, 입을 맞췄던 날, 밤하늘을 보았던 날, 함께 미래를 그렸던 날……. 하람과의 수많은 추억과 하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충격에 연행헌 사랑채에서 하람의 흔적을 찾다 결국 미쳐 외척을 학살하고 스스로 가슴을 찔러 죽은 날까지. 지금껏 잊고 있었던 모든 과거가 기억났다. 그리고 제가 죽기 위해 필요한 ‘용서’란 바로 하람의 용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내가 널…… 아, 아!”

너무 사랑해서 아끼고 또 아끼던 하람을 제가 죽게 만들었다. 아니, 제가 죽인 것과 다름없다. 이한이 하람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하면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하람에게 죽으라고 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충격에 검이 박혔던 가슴이 너무 갑갑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전신을 떨며 소리 내어 울던 이한이 하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제발, 눈을 떠…….”

몇 번이나 이어진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하람의 가슴에서 계속해서 새어 나오던 검은 액체가 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검이 점점 사라졌다. 이한이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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