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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는 제게 늘 중요한 것을 숨기시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출정 사실을 숨기게 됐는데, 하람이 상선에게 출정 소식을 들었다며 먼저 말을 꺼냈다.
“말한다는 게 그만, 이런, 울지 말거라.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구나.”
얼마나 화났는지 이한 님이 아니라 전하라고 한다. 난감한 가운데 곧 울 듯 꽃잎 같은 속눈썹을 바르르 떨더니 예상대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이한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하람을 끌어안았다. 하람이 이한의 등을 마주 안았다.
“어째서, 어째서 전하가 가셔야 하는 겁니까?”
“이 나라에 나만큼 유능한 장군이 없어서 그렇다.”
“말도 안 됩니다.”
“왜, 내가 약해 보이느냐?”
슬쩍 농담하자 하람이 대번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알겠다, 알겠으니 화를 풀거라.”
머리를 쓸어 주자 하람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이한이 다음 날까지 슬퍼하는 하람을 달래 주고 또 달래 주었다.
“……제가 검을 배우면, 함께 갈 수 있습니까? 제가 활을 쏠 줄 알면, 저도 이한 님 곁에 있을 수 있을까요?”
출정 당일. 하람이 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한 님을 돕고 싶은데 또 그만큼…… 홀로 있는 것이 외롭고, 너무 힘이 듭니다.”
매달리고, 붙잡는 하람이 어여뻐 이대로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어렵게 떼어내고 시선을 맞췄다.
“하람아.”
“너무, 걱정됩니다…….”
떠나기 전에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계속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이한이 하람의 두 손을 잡았다.
“길을 걷다 넘어지진 않을까. 누굴 잘못 따라가지 않을까. 무얼 잘못 먹고 체하진 않을까. 나는 하람이 네가 늘 걱정된다.”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내 눈에는 여전히 아이로 보이는구나. 그보다, 다녀오면 네게 큰 상을 주마. 그러니 날 기다리고 있거라. 알았느냐?”
“……그렇게 말씀하시고 육 년 동안 저를 한 번도 찾지 않으셨습니다.”
“……약조하마. 응?”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하람 모르게 짓고 있던 집이 다 지어졌다. 그 안을 하나, 둘 채우고, 꽃을 심고 있다고 하니 돌아오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이한이 걱정 어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하람에게 웃어 보이고는 출정 길에 올랐다.
하람에게 서둘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무리해가며 서둘렀다. 그 결과 위험한 순간이 잦았으나 예상보다 이르게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제가 죽기를 바랐던 외척에게 보란 듯이 살아 돌아온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 다음 환하게 맞이해 주는 하람에게 갔다.
“계속 걱정하고, 기다렸습니다. 많이…… 그리웠습니다.”
“많이 그리웠느냐? 내 말하지 않았느냐, 살아 돌아오겠다고.”
울먹이는 하람에게 아직 울지 말라 하고 그를 위해 지은 집으로 이끌어 돌아보았다.
“네가 맘 편히 쉴 수 있는 집이다.”
어느 양반집보다도 더 크고, 튼튼하게 지은 집은 하람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담았다.
“네가 좋아하는 궁궐의 후원을 닮은 정원부터 맘 편히 쉴 수 있는 정자, 잉어, 모란, 연꽃 등. 모든 것이 다 있다.”
“세상에…….”
“그리고 뒤뜰에 내 키보다 큰 은행나무가 있다. 연꽃과 은행나무를 따서 연행…….”
“너, 너무 과분합니다!”
집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는데 하람이 큰소리로 말을 잘랐다. 이한이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분하다니? 궁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다.”
“구, 궁이라니요! 저는 지금 지내는 집도 좋습니다. 이렇게 큰 집은…….”
정말로 부담되는지 하람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그 모습에 이한이 고민하다 그래, 하고 웃었다.
“그럼 나와 함께 지내는 건 어떻느냐?”
“네? 이한 님은 궁에서 지내지 않습니까?”
“내가 궁을 비우든, 말든. 관심 가지는 이 없다.”
궁은 이미 왕대비와 그의 아버지 부원군이 장악하고 있다. 정무만 잘 보면 제가 궁에 있든, 없든. 상관없을 테다. 이한이 침울해하는 하람을 데리고 집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저는 다시 태어나면 하람 님의 누이가 되고 싶습니다.”
새집을 관리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한이 하람에게 맞춰 상선, 지밀상궁과 함께 직접 사람을 고르고 골랐다.
“왜 제 누이가 되고 싶습니까?”
하람과 사랑채 앞 정자에 앉아 다과를 먹으며 늘어져 있는데 부엌을 관리하는 자의 딸이 꽤나 당돌한 말을 한다.
이한이 어쩐지 하람의 어릴 때가 생각나는 아이를 보는데 아이가 히죽 웃었다.
“하람 님과 진짜 가족이 되고 싶고 또 하람 님이 제게 잘해 주신 만큼 저도 하람 님께 잘해드리고 싶습니다.”
“색시가 아니라 누이? 거참 특이하구나.”
듣자 하니 나쁜 이유가 아니다. 이한이 하하 웃었다. 하람이 당황했다가 작게 웃으며 아이에게 손대지 않은 정과와 약과를 주었다.
“영진 님이 제 누이가 되면 저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생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영진이 두 손 가득히 다과를 들고 떠났다. 이한이 떠나는 영진을 보다 하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하는 자들이 모두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하람을 지키는 별감도 하람을 좋아하더니 집에서 일하는 자들도 하람을 좋아한다. 이한이 안도하는데 하람이 참, 하고 운을 뗐다.
“최근에 인간 외의 존재에 대해 기록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
“인간으로 둔갑하는 여우, 은혜를 갚기 위해 대신 죽은 두꺼비, 백 년을 산 구렁이 등. 이한 님이 궁금해한 것들을 보기 좋게 책으로 엮는다고 합니다.”
“한 번 만나봐야겠구나.”
이한은 이전부터 인간은 이길 수 없는 인간 외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호기심을 풀어줄 자가 있다는 말에 하람이 말한 자를 만나고자 사람을 풀어 찾았다.
“저, 저는 그저 떠돌이 나그네일 뿐입니다.”
남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있었는데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인간 외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록한다고 말했다. 이한은 남자에게 여행에 필요한 돈을 지원하고, 남자에게 정보를 받는 것으로 거래했다.
연행헌 책방채는 지금까지 비밀리에 하나, 둘 모았던 서책과 정보들로 채워져 갔다.
* * *
궁에서 일과를 보낸 뒤 연행헌 사랑채에서 하람과 보내길 며칠.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을 외척 세력이 눈치챈 듯 잠행 길에 습격을 당했다.
“왜 이리 다치십니까. 어찌…… 저 보고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저를 가장 많이 울리는 거 아십니까?”
습격이 한 번에서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날수록 상처가 늘었다.
하람이 알면 놀랄까, 상처를 어찌어찌 숨겼는데 하필이면 얼굴을 다쳤다. 습격이 한 번에서 끝난 줄 알았던 하람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런,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그만 울어라. 응?”
이러다 울다 쓰러지겠다. 하람의 손에 잡힌 약을 다 치워내고 끌어안아 달래 주었다.
몸이 다치든, 말든. 하람과 있으면 그저 행복했다.
그만큼 상황이 안 좋게 흘렀다.
왕이 남색에 미치다 못해 궁 밖에서 지낸다, 하람이 감히 왕을 홀렸다 하여 죽여야 한다, 반정 등. 소문이 쌓이고 쌓였다.
“나는 욕 먹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하람은 그렇게 둘 수 없다.”
“전하…….”
“상선은 내가 결국 다시 주색에 빠졌다고, 기생에게 홀렸다고 소문을 흘려라. 그리고 하람을 잊을 만한 외모와 능력을 가진 기생을 데리고 와라. 별감은 하람의 곁을 지키는 자를 늘려라.”
언제 어디서 일이 터질지 몰랐다.
하람을 지키기 위해 하람에게 현 상황을 조금 속여 말하고는 돈을 주고서도 만날 수 없다는 유능한 기생에게 빠진 척 굴었다.
하람이 보는 앞에서 기생과 방탕하게 놀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척 굴었다.
“……전하, 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몸이 상하도록 기생과 어울렸으나 하람에 대한 소문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상선이 각자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궁으로 돌아오기를 권했다.
“하람아, 네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널 구한 게 아니라 네가 날 구했다.”
잠시 헤어진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는 하람의 두 뼘을 짚었다.
“잊지 마라. 날 구한 것이 너라는 것을. 알겠느냐?”
“……네.”
슬퍼하는 하람을 달랜 뒤 궁으로 돌아가 왕대비가 질릴 정도로 매일 같이 기생들과 어울리고 또 어울렸다. 그러는 동안 좋았던 상태가 빠르게 나빠졌다.
* * *
“전하, 오늘은 그만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좋지 않다.
일어나지 못하자 함께 상황을 꾸미고, 기생들을 선동하는 일패기생이 걱정해왔다. 이한이 비식 웃고는 어렵사리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눈치 좋게 물을 가까이한 일패기생이 이한의 좋지 않은 낯빛을 가만 보다 상궁을 불렀다.
“후원에 가겠다.”
곤룡포로 갈아입고 늘어져 앉아있는데 속이 영 답답했다. 참지 못하고 일패기생의 도움을 받아 일어났다.
“이러다 전하께서 승하하실까, 걱정됩니다.”
하람과 걸었던 그 길을 걷는데 일패기생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한다. 이한이 코웃음 쳤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언제까지 이리 살 것입니까. 반정을 꾸미는 자들을 살려둘 겁니까.”
“아직 때가 아니다.”
외척 세력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 또한 이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한이 의아한 낯을 한 일패기생에게 짧게 일갈한 뒤 돌아가는데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하람 님이시군요.”
하람인데, 하람 혼자가 아니다. 옆에 웬 장신의 남자가 있다.
“저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낯선 얼굴에 남자를 가만 보자 일패기생이 눈치 좋게 상선에게 남자의 정체를 물었다. 상선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선공감소장 박우진이라는 자이옵니다.”
박우진이라면 제가 하람에게 스승으로 붙여준 자였다.
소장이라 하여 나이가 제법 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젊다. 거기다 하람과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서로 웃고 있다. 순식간에 속이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