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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시들까, 평소보다 서둘러 돌아가 물에 꽂아 넣고 아침 수라를 들었다.
조강과 상참의, 주강을 거쳐 일과를 거의 끝낼 무렵 기다리던 하람이 왔다. 귀한 모란을 선물로 주고 활짝 핀 모란 같은 화사한 웃음을 답례로 받았다.
* * *
하람과 지내는 사이 그에게 선물할 집이 태를 갖추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잠행에 나섰다.
하람이 말했던 남사당패를 보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을 지나 집을 꼼꼼하게 살피고, 이것저것 물었다.
무엇 하나 아끼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궁으로 돌아가는데 장시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하람아?”
“네? 헉! 전…….”
물건을 사고 있는 하람의 어깨를 짚으며 이름을 부르자 하람이 깜짝 놀라 하더니 전하라고 부르려 했다. 이한이 급하게 손으로 입을 덮었다.
“잠행 중이다.”
놀라 동그랗게 뜨인 눈이 그제야 본래 크기로 돌아갔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 입가를 덮은 손을 내렸다.
“예서 무얼 하느냐?”
“서책이랑 붓을 사러 왔습니다. 저, 아니, 그…… 나으리는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오랜만에 나으리 소리를 들었다. 반가운 소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으리는 볼 것이 있어서 왔다.”
“그, 그렇습니까?”
“서책은 다 골랐느냐?”
별감을 뒤로 물리고는 하람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사고 싶은 서책에 대해 말하는 하람과 함께 서책을 고르고, 사주고, 대신 들어주었다.
“저, 나으리.”
장시는 정적인 궁궐과 달리 활기가 넘쳤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인절미를 파는 집 앞에 나란히 앉았다.
갓 만든 인절미를 먹으며 잠시 쉬는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곁을 보자 하람이 무슨 일인지 인절미를 먹지 않고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어디 불편한 것이냐?”
걱정스레 묻자 하람이 달싹이던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
“……혹, 제게 숨기는 게 있지는 않으십니까?”
“숨기는 것?”
“말하지, 않은 것이나…….”
하람에게 숨기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지 않아 글쎄, 하고 말하자 하람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하람이 영 기운이 없다. 아쉽지만 장시를 더 둘러보길 그만두고 그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푹 쉬라는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
이한은 하람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궁으로 돌아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람이 말한 것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알게 됐다.
“하람이 중궁전?”
편전에서 지방의 사정을 듣고 있는데 지밀상궁이 하람이 중궁전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지방관원들을 모두 뒤로하고 급하게 중궁전으로 향했다.
“저, 전하?”
지금껏 단 한 번도 오지 않던 왕의 방문에 중궁전이 뒤집어졌다. 이한이 눈에 띄게 당황한 상궁들을 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엉망으로 어질러진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머리에서 피 흘리는 하람이 보였다. 크게 기함하며 덜덜 떨고 있는 하람을 일으켜 세웠다.
“하람아, 날 봐라. 어디가 아픈 것이냐?”
“전하, 괘, 괜찮습니다…….”
“남색을 즐기신다는 말이 참이었습니까!”
하람이 무어라고 울먹이며 힘겹게 말하는데 찢어지는 것 같은 중전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하람의 머리를 살피던 이한이 중전을 보았다.
“중전까지 천치가 된 것이오?”
“……전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지. 한 번만 더 이자를 건들면 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이한이 흉흉하게 경고한 뒤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람을 반쯤 안은 채 중궁전에서 대전으로 향했다.
“당분간 머리에 물이 닿지 않도록…….”
어의가 단단한 물건에 머리를 맞은 것 같다고 하며 피가 나오는 부위를 꼼꼼하게 치료했다.
“많이 아프냐?”
어의가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하고 떠났다. 이한이 끙끙 소리 내어 앓는 하람을 제 기수에 눕혔다. 놀라 일어나려는 하람의 이마에 묻어있는 식은땀을 닦아 주며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괜찮, 습니다.”
“보는 내가 아픈데, 괜찮기는.”
머리통이 어찌나 작은지, 저도 쓰다듬을 때마다 조심하는데 단단한 물건에 맞았다고 한다. 걱정과 안타까움에 꽉 막힌 한숨을 쉬는데 하람이 전하, 하고 작게 불렀다.
“어찌, 어찌하여 남색을 즐기신다는 말에,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저와, 전하 사이의 소문을, 알고 있습니다.”
하람이 어떻게 소문을 알고 있는 걸까. 상선이 말했을 리가 없는데. 당황스러운 와중에 하람이 궁에서 도는 소문 몇 가지를 찬찬히 읊는다.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저도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 했더니. 하람이 궁으로 오가는 사이 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이한이 낭패감에 침음하는데 하람이 이한의 손끝을 힘없이 짚었다.
“전하, 왜 소문을 그대로 두십니까? 왜 아니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하람의 물음이 이어질수록 목소리에 물기가 스몄다. 나중에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한이 놀라 굳었다가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냈다.
“……사실인 것을.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시간과 네가 해 주는 이야기를 즐기고 있다.”
하람이 무슨 생각으로 궁에 오고, 저를 만나는지 모르겠지만 이한은 하람을 생각하면 수많은 감정이 들었다.
하람이 오는 시간이 되면 설레고, 만나면 기쁘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헤어지면 아쉬웠다.
“나는 하람, 너와 있는 것이 좋다.”
지금껏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뱉지 못했던 말을 툭, 가볍게 하자 마주한 하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눈물이 터졌다.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눈물에 이한이 그도 모르게 당황했다.
“하, 하람아?”
왜 우는지 몰라 어어, 하고 당황하는데 하람이 눈물을 닦아 주던 이한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오래, 정말 오랫동안 감히 은애하고, 또 은애했었어요…….”
“……뭐?”
하람의 고백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쿵! 떨어졌다. 그리고 가슴 속을 꽉 채우고 있던 모든 것이 빠져나갔다. 그러다 빠르게 뛰는 가슴을 따라 밀물처럼 더없이 충만해졌다.
이한이 그도 모르게 떨고 있는 두 손으로 다급하게 하람의 얼굴을 들었다.
“참이냐? 정말, 날 은애하느냐?”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걸까. 아니면 정말 천치가 된 걸까. 참지 못하고 묻자 하람이 입술을 꽉 다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음 만날 그날부터 전하를, 은애했습니다.”
가슴이 벅차 참을 수가 없었다. 하람의 머리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체통도 다 잊고 하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저, 전하!”
“……가슴이, 진정이 안 되는구나.”
꼭 독이라도 먹은 것처럼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뛴다. 이한이 괜찮냐고 묻는 하람을 꽉 안은 채 숨을 고르다 잠시 떨어졌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처음 만난 날부터라면 자그마치 육 년 동안 좋아했다는 건데, 조금도 몰랐다. 황당함에 이유를 묻자 하람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슬쩍 숙였다.
“……평민이고 또 어린 제가 어찌, 높은 분에게 먼저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신분 차이에 지금까지 숨겼다고 한다. 어이가 없기도 하면서 하람답기도 하다는 생각에 맥이 풀렸다. 이한이 헛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앞으로 절대 숨기지 말거라. 알겠느냐?”
“……네.”
대답은 참 잘한다. 이한이 귀를 발갛게 붉히고 있는 하람을 귀엽다는 눈으로 보다 다시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그대로 누웠다.
“저, 저, 전하!”
“곤한데 가슴이 너무 뛰어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구나. 내가 잠들 때까지 이렇게 있자꾸나.”
“궁에는 사방에 눈과 귀가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보면 어떡합니까?”
“내 진정으로 남색을 즐길 터이니 많이 떠들라고 해라.”
“저, 전하!”
하람의 얼굴이 곧 터질 듯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한이 하하 웃으며 하람을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 * *
그렇지 않아도 궁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남색 소문이 중전이 하람을 부르고, 그 하람이 왕의 품에 안겨 대전으로 가면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전하가 찾는다는 남자가 누구이고, 얼굴이 어떻고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사람들이 떠들든, 말든. 이한은 소문을 핑계로 하람을 아예 대전에서 머물게 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숨겼다.
“주상께서 환관이 될 아이에게 미쳐 정무를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소문과 달리 하람과 무얼 한 것이 없다. 억울함에 서책을 보는 하람의 손을 잡아 보고, 먹을 갈다 입술에 튄 먹물을 닦아주는 척 입을 맞춰 보고, 난을 치는 척 놀다 달아오른 몸을 맞춰도 보고. 소문대로 남색을 즐기는데 왕대비가 찾았다.
“그렇습니까.”
“언제 정신 차리실 겁니까.”
“정신이라면 늘 차리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신 상태가 좋다. 이한이 망나니라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보는 왕대비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왕대비가 이를 악물었다.
“환관이 될 자입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이의 앞이 잘려도 저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주상!”
하람의 앞이 잘리든, 말든. 저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한이 여상하게 차를 마셨다. 왕대비가 보료 장침 위로 걸치고 있는 손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주상이 속 편하게 남색을 즐기시는 동안 북쪽 땅을 외침에 다 잃게 생겼습니다.”
잠잠하다 싶더니. 이한이 외침을 정리하라는 왕대비의 말에 눈매를 찌푸렸다가 예, 하고 바로 했다.
이제 막 하람에게 이름이 불리고 있는데. 하람에게서 이한 님 소리를 더 듣고 싶고,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데 장기간 떨어져 있게 생겼다.
이 사실을 하람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숨기는 게 좋을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다 우선 별감을 불렀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하람을 지킬 자가 필요하다. 하람과 나이가 비슷한 자가 좋을 것 같은데, 아는 자가 있느냐?”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자가 있습니다. 실력이 나쁘지 않고 성격이 밝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별감들 사이에서 막내로 불린다는 자는 괜찮은 집안에서 자라고,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하람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으며 성격이 싹싹했다. 하람 모르게 곁을 지키고, 수상한 자는 가차 없이 사살하라 어명을 내렸다.
그렇게 준비하는 사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 출정 하루 전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