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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람이라는 이름에 이번에는 상선이 놀랐다.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고 담벼락 너머를 보고는 기함했다. 이한이 어버버하는 하람을 보다 상선에게 데리고 오라고 하고는 대전으로 갔다.
“소, 송구하옵니다!”
대전에서 기다리길 몇 분. 상선과 하람이 왔다.
하람이 대전에 오자마자 납작 엎드렸다. 퍽 익숙한 모양에 또 웃음이 터졌다. 이한이 하하 웃으며 상선을 물렸다.
육 년, 만인가. 그동안 잘 먹었는지 바닥을 짚고 있는 손과 엎드리고 있는 몸이 제법 자랐다. 신기하게 보다 고개를 들라 하자 하람이 주춤주춤 상체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자세히 보니 얼굴에서 애티가 완전히 가셨다.
밤색 눈동자에 여리면서도 단아해 보이는 얼굴을 보는데 하람의 뺨이 점점 붉어졌다. 곧 어렵게 든 얼굴을 쿵, 소리 나게 바닥에 박았다.
쿵 소리가 어찌나 큰지 이한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하람의 머리를 짚었다. 하람이 파드득 떨었다.
“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느냐?”
“저, 저, 저, 전하께서 저, 저를, 기억하실 줄 몰라서, 너, 너무 놀라서, 그, 그만…….”
육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외형이 변했으나 속은 여전한 것 같다. 이한이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오른 하람의 귀를 보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조금 전에는 왜 그러고 있었느냐?”
호기심에 묻자 엎드리고 있는 하람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그, 그게…… 후원이 궁금, 헉!”
하람이 고개를 들면서 시선이 부딪쳤다. 이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데 하람이 또다시 숨을 삼키며 쿵 소리 나게 고개를 처박았다. 이한이 피식 웃었다.
“후원이 궁금했느냐?”
“네, 네…….”
할 말이 더 있는지 바닥을 짚고 있는 하람의 두 손이 꼼지락거린다. 슬쩍 그리고, 하고 말하자 하람이 또 고개를 조금 들었다가 내렸다.
“저, 전하를 볼 수 있을까, 하고…….”
가만 보면 부끄러워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것 같다.
재미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오랜만에 보는 동그란 정수리를 보며 웃는데 고개를 들고 싶은지 움찔거린다. 괜찮으니 고개 들라고 했다.
“그동안 어찌 지냈느냐?”
하람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육 년 사이에 달라진 얼굴을 신기하게 보는데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열렸다.
“상선, 님과 스, 스승님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 자세하게 말해 보거라.”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해서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근황을 묻자 하람이 주저하더니 현재 배우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달달 떨렸으나 차분한 것이 듣기 좋았다. 그 탓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듣고, 질문하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시간이 금방 흘렀다.
술시(오후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한이 어느새 어둑한 너머를 보았다가 눈치 좋게 이야기를 멈춘 하람을 보았다.
“네가 웃음내시보다 더 재밌구나.”
“그렇습니까?”
“상선에게 말해 둘 테니 자주 오거라.”
“저, 정말요?”
“그래.”
하람을 만나고부터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색하는 하람에게 웃어 보이고는 보냈다.
* * *
사방 어디를 보아도 감시하는 눈과 엿듣는 귀가 있고,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 탓에 순수한 눈에 모든 것이 솔직한 하람이 귀하게 느껴졌다.
“전하, 최근 남사당패와 인형극이 인기가 많습니다.”
하람은 자주 오라는 말을 착하게 잘 지켰다. 그도 모자라 궁에 올 때마다 자신이 배운 것, 궁 너머의 일을 말해주거나 서책 등을 가져다주었다.
차분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말을 듣다 보면 지독한 두통과 피곤함이 줄다 못해 마음이 편해져 졸리기까지 했다.
“전하, 피곤하시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니, 계속 얘기해라.”
“음, 그럼 전하. 제가 이야기를 들려드려도 될까요?”
의아했으나 그러라고 하자 하람이 보고 있던 서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옛날 옛날에,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를 듣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하람의 목소리와 특유의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그를 믿어서인지 궁에 있을 때면 늘 유지하고 있는 긴장감이 맥없이 풀렸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만큼 푹 자고 일어나고, 또 이야기를 듣다가 잠들고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하람이 없으면 잠을 못 잘 정도가 됐다.
“……전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2세를 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독살과 암살 시도가 늘었다. 밤 내도록 서책을 읽었더니 지독할 정도로 피곤했다.
피곤함이 겉으로 드러난 듯 하람이 걱정한다. 이한이 힘없이 웃고는 하람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느냐?”
“가지고 싶은 것이요?”
“그래.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이한은 하람이 필요했다. 하람을 드문드문 보는 게 아니라 매일 보고 싶었다.
어명으로 억지로 곁에 두는 것 말고 아이를 잡아둘 방도가 없을까, 고민한 끝에 가지고 싶은 것을 주고 곁에 두기로 했다.
하람이 무얼 가지고 싶을까. 답을 기다리는데 하람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제 꿈이, 바람과 눈에 끄떡도 하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금은보화나 관직을 생각했는데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이한이 수줍은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로 뺨을 약하게 붉히는 하람을 의외라는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 기술을 알려주는 스승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혹, 선공감(繕工監)에서 스승을 구할 수 있습니까?”
상선의 아래에서 환관이 될 줄 알았는데. 다른 업을 꿈꾼다는 말에 조금 당황했다. 그러다 스승을 구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아 그러마, 하고 답했다.
“차, 참이십니까?”
“그래. 내 약조하마. 단, 지금보다 더 자주 찾아오거라.”
“조, 좋습니다!”
스승을 구해준다는 말이 기쁜지 하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정말 감사하다고 하며 이한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한이 굳었다.
하람의 온기가 온몸을 감싸고, 바람과 풀 향이 약하게 맡아졌다. 동시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급하게 뛰는 가슴에 당황스러운 가운데 하람이 헉! 하고 멀어졌다. 이한이 다급하게 멀어지는 하람의 손을 부여잡았다.
“잠깐. 잠깐만…….”
심장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듯 두근거림이 줄어들지 않는다. 얇은 야장의 위를 지그시 누르며 호흡을 골랐다. 하람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전하, 어디 불편하신가요?”
“괜찮다. 그래, 괜찮다…….”
진정이 되지 않았으나 하람이 당장이라도 어의를 부르려 했다. 잡은 하람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길게 한숨을 쉬며 주저앉는 하람을 따라 기수 위로 풀썩 누웠다.
“저, 전하!”
“괜찮다.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다.”
숨을 고르자 무섭게 뛰는 가슴이 천천히 나아졌다. 그 대신 하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한이 어찌할 줄을 모르는 하람을 보다 슬그머니 팔을 당겼다. 하람이 어, 하고 무너지더니 이내 이한의 팔을 베고 누웠다.
“저, 전하!”
“피곤하구나. 무슨 이야기든 좋으니 어서 해 주렴.”
눈이 천근만근이었다. 이한이 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람이 소리 죽여 눈치를 살피다 이한을 향해 모로 누웠다.
“옛날 옛날에, 여우 모습을 한…….”
스승을 구해 준다는 말에 하람은 거의 매일 왔다. 이한은 하람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선공감소장(繕工監少監)인 박우진을 스승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한양에 모두가 탐낼 만한 집을 짓도록 명했다.
“스승은 어떻느냐? 잘 가르쳐 주느냐?”
“네? 네. 세세하게 알려주시고, 제 물음에 한 번도 귀찮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십니다.”
“또 옛날처럼 몇 번이나 묻는가 보구나.”
“그,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랬습니다!”
먹을 갈던 하람이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서 난을 치던 이한이 짧게 웃고는 다시 붓을 움직였다.
“나으리, 나으리.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내 이름이 나으리인 줄 알았다.”
“……존함을 몰라서, 그래서, 나으리라고 했습니다.”
“존함을 알면, 전하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줄 것이냐?”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천천히 이한을 마주 보았다.
“저, 전하. 제가 어찌…….”
왕의 이름을 어찌 부를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이한이 소리 없이 웃고는 붓을 내려놓았다.
“후원에 가자꾸나.”
말을 잃어버린 하람을 위해 일어섰다. 후원이라는 말에 눈에 띄게 반색하는 하람과 함께 후원을 걸었다.
* * *
“주상. 주상께서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궁궐에 파다합니다.”
“그렇습니까.”
“남색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문입니까.”
“기생보다 낫지 않습니까.”
“주상!”
문안 인사를 하러 오자마자 왕대비에게 하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 들을 이야기다. 이한이 여상하게 받아치며 왕대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미세하게 웃었다.
“손 한번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남색이라니. 이거 참 억울합니다.”
“주상, 진심으로…….”
“제가 진심이든, 아니든.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가만 두세요.”
왕대비와 외척 세력이 바라는 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 왕, 망나니 왕으로 잘 있다. 이한이 잡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압니까, 제가 정말 망나니 왕이 될지.”
온갖 가락지를 끼고 있는 왕대비의 손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한이 조용히 분을 삭이는 왕대비를 보다 일어섰다.
“피차 불편한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우리 똑똑한 어머니라면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이한이 별다른 말이 없는 왕대비를 뒤로하고 왕대비전을 나가 후원으로 향했다.
“……전하,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람이 걱정된 듯 상선이 조용히 의중을 물어왔다. 이한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왕대비가 어떻든. 궁을 장악하고 있는 외척 세력에겐 내가 남색을 즐기는 왕이라는 것이 호재일 것이다. 소문을 더 퍼트렸으면 퍼트렸지 절대 묻히지 않을 것이고, 나서지도 않을 것이다.”
중전과 후궁 그 누구도 안지 않고, 세자도 없는데 남색을 즐긴다. 왕의 자질에 대해 떠들기 좋을 테다. 이한이 비소하며 소문을 알아보라 하고는 하람이 좋아하는 모란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