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82)화 (82/87)

82

또 있을지 모를 도적 떼를 찾는 동안 생긴 짧은 휴가를 허비할 수 없었다. 상선에게 하람을 맡겼다.

그렇게 상선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고 편히 지내길 며칠.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눈에 계속 보이던 하람이 떠났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에 상선을 불렀다.

“요즘 하람이 안 보이던데 떠났느냐.”

“아닙니다. 제게 글을 배우면서 별감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글?”

“예. 배움이 어찌나 빠른지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가르칠 정도입니다.”

“그래?”

“눈치가 빠르고 또 예의가 발라 양자로 들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잘 지내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 귀에 들린 ‘양자’라는 단어에 깜짝 놀랐다.

지금껏 양자를 들이지 않던 상선이 양자를, 그것도 이제 막 주운 아이를 양자로 들일 생각을 하다니. 놀라 말을 잃었다가 알겠다고 하고 보냈다.

신중한 상선이 하람을 양자로 들일까, 한다는 말을 해서 일까. 눈에 가끔 보이는 하람이 괜히 이전과 달라 보였다.

걸레 대신 서책과 붓을 잡고 있는 모습, 안부 대신 한글을 읊는 모습을 가만 보길 몇 번. 하람이 상선뿐만 아니라 별감, 무관들과도 친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요물이었구나.”

제가 구했는데 어째 저 빼고 다 친하다.

어이가 없어 술을 마시다 말고 한마디 하자 함께 술을 마시던 별감과 무관들이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네. 요물입니다, 요물.”

“어찌나 싹싹한지. 꼭 누이동생 같지 뭡니까.”

“체격만 좋았어도 직접 가르치겠건만. 정말 아쉽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가져오는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며칠 상대하니까 상선께서 왜 밤낮없이 가르치는지 잘 알겠습니다.”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내주지 않는 별감과 무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귀신들이 설친다더니 제가 사실 귀신을 주운 건가. 어린 귀신을 생각하다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상선과 별감, 무관의 말을 들어보니 저에게는 귀찮게 굴고 다른 어른들에게는 적당히 싹싹하게 구는 모양이다.

눈치가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황당함과 불쾌감에 짜증스레 술을 넘기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별감이 그래도, 하고 운을 뗐다.

“마지막에는 꼭 전하의 방 앞을 어슬렁거립니다.”

“맞습니다. 듣자 하니 상감께 전하 존함을 몇 번이나 물었다 합니다.”

“거기다 맛있는 거라도 하나 쥐여 주면 전하께서도 드셨냐고 꼭 물어봅니다.”

술을 물처럼 넘기는데 별감과 무관들이 지금껏 숨겨왔던 말들을 하나, 둘 꺼냈다.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가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하람과 헤어지면 아쉬울 것 같다, 신분이 참 아쉽다, 상선께서 어찌 하시려나. 하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이 술에 적당히 취했다.

내일 이동할 것을 생각해 기방에서 나와 주막으로 돌아갔다가 마당을 종종걸음으로 헤매고 있는 하람을 발견했다. 이한이 발소리를 죽여다가 살금살금 다가갔다.

“예서 뭐 하느냐?”

“으악!”

얼마나 놀랐는지 하람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한이 바닥에 주저앉아 저를 멀거니 올려다보는 하람을 보며 짧게 웃었다가 손을 내밀었다.

“어찌 이리 놀라느냐, 나한테 뭐 숨기는 거라도 있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하람이 이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엉덩이를 탈탈 털어내며 앞에 서 있는 이한을 보았다.

“……그, 그저 나으리가 너무 안 오셔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오셔서, 놀랐습니다.”

“그래? 날 왜 기다렸느냐?”

이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이 저를 왜, 기다렸을까. 가만 답을 기다리는데 하람이 답을 하지 않고 육 척이 넘는 키부터 얼굴, 옷을 훑기만 한다.

“……거, 걱정이 됐습니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이만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한이 뒤를 보았다.

하람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제가 술에 취한 걸까. 아니면 하람이 정말 귀신인 걸까. 그래서 제가 깜빡 홀려서 같은 사내인 하람이 귀여워 보이는 걸까.

이한이 곧 있으면 울 것 같은 하람을 보다 옷 갈아입는 걸 도우라고 하며 앞장섰다. 하람이 한 박자 늦게 반색하며 뒤따랐다.

“나으리, 나으리.”

야장의로 갈아입는데 시종일관 조용하던 하람이 갑자기 부른다.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혹, 존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내 이름이 어찌 그리 궁금해하느냐.”

“……나중에, 은혜를 갚을 때 찾아뵈려면 존함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조선의 왕인 해종이라는 것을, 제 이름 한을 몇 번이나 불렀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은혜를 갚고 싶어 안달이 난 하람을 보다 하람이 길게 깐 이불 위로 털썩 앉았다.

“내 이름을 알려주면 넌 무얼 해줄 거지?”

“네? 어…….”

되물을 줄 몰랐는지 하람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작은 눈을 요리조리 돌리며 고민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했다.

“어, 어떡하죠?”

과연 무어라고 할까. 답을 기다리는데 한참 후에 열린 입에서 답이 아니라 질문이 나왔다. 그도 모자라.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하람이 눈물을 찔끔 흘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물에 그만 굳었다. 이한이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하람을 멍하니 보다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그만. 알았으니 그만 울어라.”

뚝 그치라고 하자 하람이 끅끅 소리를 내더니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한이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양자 이야기를 들었느냐?”

“네? 네.”

“어찌 하기로 했지?”

“……제 주제에 양자는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람의 어깨가 축 처졌다. 지켜보던 이한이 미간을 좁혔다.

“네 주제라니? 네 주제가 어때서?”

“예?”

“막둥이일 때는 모르겠지만 하람일 때의 너는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주제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하람은 모르겠지만 무려 왕이 주워다가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세자를 가질 생각이 없으니 그 어떤 아이보다도 대단한 주제다. 이한이 눈을 끔뻑이는 하람의 머리를 툭툭 토닥였다.

“다시 없을 좋은 기회다. 영감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어서 답을 해라.”

“……네.”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에 웅크리고 있던 하람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켜보던 이한이 그만 나가보라고 축객령을 내렸다.

다음 날. 하람은 양자가 되기로 결정했는지 궁으로 돌아가는 무리에 섞여 있었다.

“저, 전, 전…….”

그리고 하람에게 진짜 정체가 들통났다.

상선에게 제가 사실은 양반가의 자제가 아니라 조선의 왕이라는 사실을 들은 하람이 숨넘어갈 듯이 놀랐다.

“내 상선에게 어찌 지내는지 틈틈이 확인할 것이다.”

이한이 넘어갈 것 같은 하람에게 웃어 보이고는 입궁했다.

* * *

하람에게 틈틈이 확인한다고 했으나 궁에는 사방에 눈과 귀가 있었다. 어디서 누가 지켜보고, 엿듣고 있을지 몰라 선뜻 묻지 못했다.

그렇게 하람의 존재를 반쯤 잊고서 늘 그랬듯이 천치 왕, 꼭두각시 왕으로 지내는 사이 수렴청정이 끝나고, 스물세 살이 됐다.

“중전, 아직 소식 없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왕대비에게 문안 인사를 갔다가 미리 와 인사하던 중전과 마주쳤다. 원치 않게 나란히 앉게 됐다.

“……송구하옵니다.”

왕대비와 중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거북한 내용이 오간다.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주상. 아무리 밖이 좋다 하여도 중요한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예.”

불편한 인사를 대충 끝낸 뒤 나가는데 별안간 전하, 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이한이 뒤를 보았다.

“전하, 계속 미룰 수 없습니다.”

“무얼 말입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우아한 인상의 중전이 이야기 주제가 난감하다는 듯 난색을 표했다. 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중전을 바라보다 한 걸음 다가가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중전. 가례 날, 내가 말한 것을 벌써 잊었습니까?”

다가온 이한을 보자마자 얼핏 붉어졌던 중전의 얼굴이 하얗게 얼었다.

“중전의 성이 김 씨이고 또 나의 외척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이상 나는 중전과 절대로 엮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괜한 것으로 내 발걸음 잡지 마시오.”

이한이 다 들리게 혀를 찬 뒤 몸을 돌렸다.

아침 수라를 들고는 조강을 하고, 제 이야기를 듣는 이 하나 없는 상참의를 한 뒤 낮것을 드는데 시저(匙箸)의 색이 검게 변했다. 상선과 기미상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만 치워라.”

수렴청정이 끝나고 어느 순간부터 수라에 독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그리 놀랍지 않아 무심하게 넘어가는데 모여 있는 상궁과 나인들이 난리가 났다. 죽여달라며 소란스레 굴었다.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고서 상선을 제외하고 모두 나가라 일렀다.

“……피곤하니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도록 하라.”

“……예, 전하.”

물러나는 상선을 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독을 먹은 것도 아닌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의를 부르자니 그 정도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아 이마를 반복해서 짓누르다 눈을 떴다.

“후원에 가겠다.”

갑갑증이 일었다. 짜증스레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자들을 평소보다 조금 더 뒤에서 따라오도록 했다. 그러고는 선왕과 함께 걸었던 길을 걷는데 담벼락 위로 무언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것이 보였다.

뭔가, 하고 보다 눈이 마주쳤다.

찰나에 가깝지만 분명 사람의 눈이다. 사람들을 모두 물린 뒤 천천히 담벼락으로 가 너머를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너는?”

“……헉!”

시선이 부딪친 것에 놀랐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사내가 눈에 띄게 놀라 하더니 숨을 크게 토했다. 그 익숙한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하람이, 네가 거기에 왜 주저앉아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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