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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81)화 (81/87)
  • 81

    하람은 이름이 생긴 것에 놀란 듯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하람, 하고 작게 속삭이더니 반복해서 읊조렸다. 얼굴을 발갛게 한 채로 이름을 읊조리는 하람을 보던 이한이 붓을 들었다.

    “글을 쓸 줄 아느냐?”

    “네? 아, 아니요. 쓸 줄 모릅니다.”

    “자, 선물이다.”

    이한이 ‘하람’ 이라 이름을 쓴 종이를 하람에게 주었다. 하람이 습관처럼 숨을 삼키더니 덜덜 떠는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게 내, 이름…….”

    종이에 때가 묻을까. 종이 끝을 아슬아슬하게 잡았다가, 구겨진 곳을 살살 폈다가. 고작해야 종이 한 장인데 소중해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막둥이라는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지어 준 이름인데 너무 좋아하니 당황스러우면서도 귀엽기도 하고.

    “하람아.”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하람을 보다 이름을 낮게 부르자 하람이 온몸을 크게 떨며 놀랐다. 이내 급하게 소중하게 여기던 종이를 내려놓고 똑바로 앉았다.

    “네, 네.”

    “혹시 도적 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도적 떼를 처리하려면 도적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자가 없고, 살아있는 자라고는 하람 뿐이다.

    하람이 아는 것이 있을까. 슬쩍 묻자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상태로 어, 소리를 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많았습니다. 덩치가 좋은 사람부터 마른 사람, 어린 사람까지. 많은데, 다들 사람을 해하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이 다시 생각났는지 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한이 흠 소리를 냈다.

    “몇 명 정도 되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네.”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슬픈지 하람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한이 밥 먹으라고 하며 상을 가까이해 주었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으리는 드시지 않습니까?”

    “나으리는 바쁘다.”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밖에서 별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안으로 들어왔다.

    별감이 눈치를 살피는 하람을 힐끔 본 뒤 마을에서 알아낸 것들을 조용히 풀어 냈다. 별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한이 가만있는 하람에게 어서 먹으라고 한 번 더 말했다. 하람이 주춤주춤 숟가락을 들더니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 정도 되는 인원이라.”

    “네. 그런데 근거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대략적인 위치도 말인가?”

    “……네.”

    무인들이 조금이라도 알아내기를 바랐건만. 이한이 혀를 차는데 앗, 소리가 들렸다. 이한과 별감이 숟가락을 들고 있는 하람을 보았다.

    “아, 저, 그 방물장수가 그랬어요. 저희 마을에서 조금만 걸으면 있는 뒷산 중턱에서 웬 험상궂은 사내들이 드글거린다고, 조심하라고 한 적 있어요.”

    하람이 말한 자들이 도적들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으나 확인해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이한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고는 별감에게 확인을 지시했다. 별감이 방을 나가고 이한이 가지고 온 어도(御刀)를 꺼냈다.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진 검집과 청옥 방패, 길게 늘어진 금색 유소, 흉흉한 날까지. 검 상태를 확인하는데 하람이 소란스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 나으리, 가실 겁니까?”

    “그래.”

    마을을 엉망으로 뒤집었으니 신나게 잔치를 열고 있을 테다. 방심하고 있는 틈에 쳐야 했다.

    검의 상태를 살피는데 별안간 하람이 무릎걸음으로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아, 안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소리치다 못해 검을 쥔 팔을 덥석 부여잡았다. 이한이 갑자기 겁이 사라진 하람을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위험, 헉!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부여잡은 듯 하람이 이마를 바닥에 쿵 찧을 만큼 급하게 엎드렸다. 이한이 하람이 잡았던 제 팔을 힐끔 보고는 검을 내려놓았다.

    “위험할 것 없으니 밥이나 먹어라.”

    얼마나 말랐는지 바짝 마르다 못해 등에 뼈가 얼핏 보인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수라상을 가져다주고는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하고 싶다. 이한이 꾸물꾸물 고개를 드는 하람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국밥이 맛이 없는지 찔끔찔끔 삼키는 하람을 보며 연락을 기다리는데 의원이 약을 주러 왔다.

    “기력이 매우 약합니다. 잘 먹이고, 잘 쉬고, 잘 자야 합니다.”

    “그래. 혹 아이의 손이 필요한 곳이 있는지 아느냐?”

    “……이 마을에서는 저만한 아이를 거둘만한 곳이 없습니다.”

    지금 있는 마을은 무척 작았다.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역시나다. 이한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마을까지 데리고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사이 하람이 말한 곳을 보러 간 자가 왔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방으로 산이 가득했다. 하람이 말한 뒷산이 정확히 어느 산이고, 중턱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한이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는데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하람이 한 발짝 나섰다. 이한과 무관이 하람을 보았다.

    “먹을 것을 찾아서 방물장수가 말한 뒷산 중턱까지 자주 갔었습니다.”

    고사리와 쑥, 약재 따위를 얻기 위해 자주 갔다는 하람의 말에 무관이 혹했다. 슬그머니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얼굴을 구겼다.

    “너는 너무 어리고, 위험하다.”

    조금 전까지 죽어가던 주제에 겁이 없다. 이한이 남은 국밥을 보고는 밥이나 먹으라고 무시했다. 하람은 턱이 당겨질 정도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가 덩치는 작아도 열세 살입니다. 어리지 않습니다.”

    억울함이 느껴지는 다부진 음성을 들은 이한이 저도 모르게 놀랐다.

    덩치가 어찌나 작은지 나이가 다섯은 됐을까, 했는데. 무려 열세 살이란다.

    믿을 수가 없어 삼 척도 안 될 것 같은 몸을 훑는데 하람이 무릎을 꿇고 앉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지켜보던 무관이 조심스레 얼굴을 가까이했다.

    “……전하, 아이가 이곳 지리에 밝은 듯하니 더 늦기 전에 한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시간이 늦고, 도적들이 새로운 마을을 치기 위해 이동할 수도 있었다.

    “나으리, 제가 은혜를 갚게 해주세요.”

    영 마뜩잖아 고민하는 이한의 앞에 하람이 엎드리며 간청했다. 결국 함께 가는 것으로 정했다.

    “……이건 여인들이 입는 거 아닙니까?”

    “날이 추우니 싫어도 입어라.”

    출발하기 전 주모가 헐벗은 하람을 보고는 기함하더니 제 딸이 입는 것을 이것저것 내주었다.

    “이제야 좀 따뜻해 보이는구나.”

    담비 털로 만들어진 배자와 토시, 토끼털로 만들어진 볼끼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하람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퍽 귀엽다. 이한이 피식 웃고는 하람을 들어 말 위에 앉혀 주었다.

    잘 알고 있다고 장담한 것처럼 하람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길 안내를 했다.

    “……타는 냄새가 납니다.”

    소리 죽여 이동하길 몇 분. 뻥 뚫려 있는 산 중턱에서 타는 냄새와 부옇게 올라오는 연기를 발견했다.

    “너는 그만 돌아가라.”

    도적 떼가 있는 곳에 하람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이한이 상선의 앞에 하람을 앉혀주고 앞장섰다. 서른 명이 넘는 별감과 무관들이 뒤따랐다. 상선과 하람이 주막으로 돌아갔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섬멸해라!”

    설마 했는데, 정말 도적 떼였다.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과 달리 강탈한 것으로 푸지게 먹고, 마시고 있는 무리를 자비 없이 모두 처리했다.

    “헉! 나, 나으리!”

    남은 음식과 옷가지 등을 챙겨 돌아가자 상선과 하람이 뛰어나왔다. 안 자고 무어 하냐고 하려는데 하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왜, 하고 보자 하람이 소매 끝을 주춤주춤 빼냈다.

    “잠시, 실례할게요.”

    까치발을 하고서 손을 들길래 슬쩍 상체를 낮춰주자 삐죽 나온 소매 끝이 뺨에 닿았다가 금방 떨어졌다. 소매에 묻어있는 붉은색에 그제야 얼굴에 피가 튀었음을 알게 됐다. 짧게 웃었다.

    “조용히 있었느냐.”

    “네. 조용히 있었습니다.”

    정말 조용히 있었는지 대답이 퍽 당당하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굳었다.

    꾀죄죄하던 방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다 못해 짐이 한쪽에 예쁘게 정리되어 있다.

    주막에서 치웠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하고, 상선이 했다고 하기에는 짐이 모두 나와 있다. 설마, 하고 하람을 보자 하람이 눈을 반짝였다.

    “나으리,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당장이라도 준비하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른다. 이한이 황당해하다 그래, 하고 말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하람이 다람쥐처럼 방을 뛰어나갔다. 황당해하다 걸치고 있는 옷가지를 벗으려는데 상선이 들어왔다.

    “저 아이가 방을 치운 건가?”

    “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바닥을 쓸고, 닦고, 거미줄을 치우더니 아궁이에 장작이 부족하다며 챙겨 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래?”

    “아이답지 않게 제법 눈치를 볼 줄 알고, 영민합니다.”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는 상선의 칭찬에 하람이 새로워 보인다. 이한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혹시 모르니 지켜봐라.”

    “예.”

    무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상한 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하람이 돌아왔다.

    “나으리, 목욕물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꿍꿍이가 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맑다. 이한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해맑은 얼굴을 빤히 보다 쫓아올 기세인 하람에게 시중들 필요 없다고 하고 상선에게 넘겼다.

    “나으리, 아침, 아니, 조반을 들라고 할까요?”

    “나으리, 마실 것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나으리, 따뜻한 차예요. 어제 마셔봤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나으리도 한번 드셔 보세요.”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 제법 눈치를 볼 줄 안다는 영민한 아이 하람은 사람을 귀찮게 하는데도 제법이었다.

    방에서 홀로 쉬고 있는데 주모가 줬다는 정과를 제게 줬다가, 식사를 할 건지 물었다가, 대신 먹(墨)을 갈겠다고 나섰다가.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하면서도 잠시도 맘 편히 쉬지 못하게 했다.

    “……하람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쪼그마한 게 어찌나 열심히 돌아다니는지 서책에 도통 집중을 못 하겠다. 참지 못하고 제발, 하고 탄식하자 무릎 꿇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하던 하람이 멈췄다.

    “아, 나중에 닦을까요?”

    “아니, 그만 쉬어라.”

    “나으리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어떻게 쉬나요. 도움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꼭 갚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죽어가는 것을 살렸더니 아무래도 귀찮은 것을 살리고, 주운 것 같다. 이한이 다부진 하람을 멀거니 보다 상선을 크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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