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80)화 (80/87)
  • 80

    ‘이건 이승의 것에는 관여할 수가 없다. 이승의 것 외의 존재만 베고, 찌를 수 있지.’

    언젠가 이한이 그랬다. 그가 쓰는 검은 검은 이승의 것을 벨 수 없다고. 그런데 날카로운 검날이 푹, 소리와 함께 가슴에 박히자 입에서 무언가 울컥! 터져 나왔다.

    『윽!』

    썩은 냄새 사이로 비린 냄새가 풍겼다. 동시에 등 뒤에서 억눌린 소리가 들렸다.

    『천, 한, 것이, 감, 히…….』

    뒤에서 들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목소리가 점차 꺼졌다. 그만큼 몸이 스르륵 무너졌다. 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내려간 시야에 흩날리는 검은 재가 부옇게 보였다.

    “하, 하람아.”

    담뱃재 같은 재를 보는데 검이 꽂힌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칼자루 끝이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어깨가 잡혔다. 하람이 흐린 시선을 들었다.

    “……왜, 왜 아, 아프, 죠?”

    저는 죽은 자가 아닌데, 왜 아픈 걸까. 하람이 벅찬 숨을 토해냈다. 이한이 창백한 하람의 얼굴과 검이 꽂힌 가슴을 번갈아 보고는 창백한 뺨을 짚었다.

    “괜찮다. 내가 어떻게든…….”

    “이, 한 님.”

    먹먹한 귀에 덜덜 떨리는 이한의 목소리와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하람이 이한의 이름을 읊조리며 손을 들었다.

    “이한, 님은 아무, 일, 없을 거, 예요.”

    저는 이승의 사람이니 고통이 금방 끝날 것이고, 이한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테다. 하람이 떨리는 손으로 어느새 눈물에 젖은 이한의 뺨 위를 조심스레 짚었다.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뺨을 짚고 있던 손이 맥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람아?”

    이한이 두 손으로 검은 피가 묻어 있는 하람의 얼굴 아래를 받쳐 짚었다. 가만 눈을 감고 있는 하람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또 불렀다.

    “하람아. 그만, 이제 그만 눈 떠라.”

    제발 눈을 뜨라고 애원하는데 눈을 뜨지도, 답을 하지도 않는다. 흔드는 대로 그저 흔들거리기만 한다. 이한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졌다.

    “……아, 아아!”

    목이 찢어져라 절규하며 늘어진 하람을 품에 안았다. 늘 두근두근, 기분 좋은 소리를 내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미안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과할 테니, 제발 날 혼자 두지 마라. 나는 네가 없으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용서를 비는데 별안간 검이 꽂힌 자리에서 검은 액체가 새어 나왔다. 그 검은 액체가 얼굴에 닿는 순간.

    ‘……전하, 부디 강녕하시옵고 태평성대를 이루소서.’

    하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기억이 돌아왔다.

    * * *

    “주상께서 무얼 아십니까.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나라가 어지러웠다.

    외침이 잦고, 기근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수탈을 일삼다 못해 인육을 먹고, 거기다 귀신이라는 것들까지 날뛰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꼭두각시 왕에게까지 간언이 올라왔다. 간절해 보이는 모양새가 퍽 안타까워 수렴청정 중인 왕대비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말하자 늘 듣는 대답이 돌아왔다.

    “…….”

    선왕이 누적된 독에 건강이 악화된 탓으로 갑작스레 붕어하여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뒤 현재 열일곱 살이 되었다. 제가 아무리 유배되어 홀로 농사지으며 살다 왕이 된 자의 아들이라 해도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저를 정말 주상으로 보기는 할까.

    솔직하게 물으면 무어라고 답을 하실까. 귀찮다는 낯을 한 왕대비를 가만 보던 이한이 입꼬리를 슬쩍 비틀었다.

    “……예.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익숙한 천치 취급에 이한이 미련 없다는 듯 단번에 일어났다. 아들이 가든, 말든. 글을 읽는데 바쁜 왕대비를 뒤로하고 대비전을 나와 침전으로 향했다.

    “상선. 별감을 조용히 부르도록.”

    “예, 전하.”

    사람이라고는 단 둘뿐인 공간에서 한참 말없이 고민하던 이한이 별감을 찾았다. 얼마 있지 않아 상선과 별감이 이한의 앞에 섰다. 이한이 보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나라가 시끄러운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나. 외침과 수탈이라도 처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도록 해라.”

    이한의 말에 상선과 별감이 놀랐다. 별감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주변을 짧게 살폈다.

    “……전하, 날이 춥습니다. 거기다 최근 도적 떼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고 합니다. 위험하기도 하고,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별감의 걱정에 이한이 재미있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는 위험하지 않았나. 늘 그랬듯이 기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행궁에 가는 것처럼 꾸미면 그만인 것을.”

    궁을 완전히 장악한 외척에 무얼 할 때마다 움직임이 편치 않고, 눈치를 봐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 끝에 술과 여색에 눈이 멀어 나랏일에 관심이 없는 한량인 척 굴었다.

    “도적 떼의 피해가 가장 극심한 곳에서 알아주는 기생을 알아 오거라. 그 기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 한번 봐야겠다며 행차하는 척 사람을 모아라.”

    외척들의 눈치에 정치는 할 수 없어도 모두가 기피하는 외침을 처리하러 가거나, 방자하게 굴 수는 있었다.

    이한이 명을 받들겠다는 상선과 별감에게 어서 나가보라는 듯 손을 저었다.

    전에 없는 혹한의 날씨에 백성들이 굶다 못해 도적에게 수탈까지 당한다는 지역으로 갈 준비가 끝났다. 이한은 제게 관심 없는 왕대비에게 휴양을 다녀오겠다고 통보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별감 두 사람만 따라오고 다들 남아라.”

    도적이 몇 명이고, 어디에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잠시도 쉬지 않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별감과 함께 조용히 잠행하며 상황을 살피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곧장 마을로 향했다.

    “……살아있는 자가 없는 것 같군.”

    도적들이 휩쓸고 간 마을은 처참했다. 멀쩡한 집과 가재도구가 하나 없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 위로 눈이 쌓였다.

    하얀 저승 같은 모습을 보며 너무 늦게 왔음을 후회하는데 어디선가 흑흑,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말머리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자 끔찍하게 죽은 젊은 남자의 옆에서 우는 작은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이제 다섯 살은 됐을까. 작은 아이에게 다가가자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얼마나 울었는지 작은 머리통 위로 눈이 작게 쌓여 있고, 뺨에 흘러내린 눈물이 살짝 얼어 있었다.

    꾀죄죄한 차림의 아이를 보며 걱정스레 묻자 아이가 어어, 하더니 차가운 눈바닥 위로 납작 엎드렸다.

    “도, 도적 떼에게, 혀, 형이 숨어이, 있는 저를 지키다 주, 죽어서 우, 우, 울고 있었습니다.”

    입술도 얼었는지 말이 명확하지 않지만 대충 알아들었다. 이한이 불쌍할 정도로 바들바들 떠는 아이에게 고개를 들라 했다.

    “살아있는 다른 어른은 없느냐.”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눈 아래로 눈물방울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한이 혀를 짧게 차는데 별감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전하,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이대로 두면 동사할 것 같습니다.”

    별감이 아이의 꽁꽁 얼어 퍼런 맨손과 발, 얇은 옷 위로 얼핏 드러난 뼈에 대해 일러 주었다. 이한이 그제야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너를 두고 갈 수 없구나. 형과 같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함께 가자.”

    “아…….”

    이한의 얼굴과 그가 입은 옷, 내밀어진 손을 보던 아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내 기껏 들었던 고개를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저, 저, 저는, 가, 가진 게 아, 아무것도, 어, 없, 없고, 나, 나으리의 손을, 더, 더럽힐, 거예요.”

    누가 보면 죄를 지어 끌려온 줄 알겠다. 이한이 벌벌 떠는 아이를 황당한 눈으로 보다 말에서 내렸다.

    “가진 것이라면 내가 많고, 옷이 더러워지면 빨면 그만이니 걱정할 것 없다.”

    어린 것이 별별 걱정을 다 한다. 이한이 네? 하고 슬그머니 고개 드는 아이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었다. 헉! 숨을 삼키는 아이를 안은 채로 말에 타 보행객주로 서둘렀다.

    “조금만 늦었으면 손과 발을 잘라야 할 뻔했습니다.”

    의원의 말에 누워 있던 아이가 또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이한이 파랗게 언 팔과 다리를 엉거주춤 구부리는 아이를 보다, 의원에게 여상하게 치료하라 명하고 밖으로 나갔다.

    “전하, 아이의 말대로 살아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생존자가 더 있을까. 별감에게 마을을 확인하라 지시했었다.

    이한이 침울한 기색이 역력한 별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가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하라 일렀다.

    “……나으리, 정말 감사합니다.”

    상선, 별감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는 사이 의원이 치료가 끝났다며 왔다. 아이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자 길쭉이 누워있던 아이가 재빠르게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조, 존함을 알려 주시면 이, 이 은혜 죽, 을 때까지 절대로 이, 잊지 않겠습니다.”

    개구리처럼 엎드린 꼴을 가만 내려다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짧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본다. 그 모습에 그만 고개를 들라 하고는 앉았다가 깜짝 놀랐다.

    동그란 까만 눈, 따뜻한 아랫목에 복숭앗빛이 도는 말간 뺨, 우물거리는 입술, 보얀 피부까지. 의원이 치료하면서 아이를 씻겼는지 드러난 얼굴이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단아하다.

    애티가 나면서도 소년 같기도 한 얼굴을 보는데 아이가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삼킨다. 이한이 제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답을 기다리는 아이를 의외라는 듯 보다 반상 위에 있는 물을 들어 마셨다.

    “앞으로 무얼 할 것이냐.”

    “……도적 떼가 집을 불태우고,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으니 어디라도 머물 곳을 주는 일자리를 찾을 생각입니다.”

    고 작은 머리통으로 벌써부터 제 앞날을 계획하고 있다.

    이제 막 살게 됐으면서 기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바닥을 보며 한껏 풀 죽은 아이를 보다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이가 움찔, 떨더니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가 눈이 부딪치자 황급히 내렸다.

    “……부모님께서 이름을 따로 정해 주지 않아, 그저 막둥이라고 불렸습니다.”

    막둥이라니. 이름이라고 하기에 마뜩잖다. 이한이 흐음, 소리 내어 침음하다 고개 들게 했다.

    “……너는 하람, 하람이 좋겠구나.”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한이 놀란 듯 숨을 삼키는 하람을 보며 입꼬리를 약하게 당겨 웃었다.

    “하늘에서 내리신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앞으로 막둥이가 아니라 너는 이하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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