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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가 영진을 보는 하람의 뺨에 튀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뺐던 하람이 한 박자 늦게 제 뺨에 묻은 피를 손으로 훔쳐 냈다.
손에 끈적끈적한 새카만 액체가 묻어 있다.
검은 피? 왜? 보고 있으면서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멀거니 앉아 있는데 가슴이 떠밀렸다.
“……가, 어, 어서.”
“……뭐?”
영진의 비틀린 입술이 잘게 떨리며 숨을 토하듯 말했다. 하람이 영진을 의아한 눈으로 보며 되묻자마자 몸이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불길한 것에 씌었다. 물러나라.”
이한의 뒤로 물러나는 순간 영진이 신음하더니 검은 피를 왈칵왈칵 토했다. 하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빙의라니. 계속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아무래도 영진 하나만 당한 게 아닌 것 같군.”
빙의할 틈이 언제였는지, 왜 저는 빙의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는데 이한의 심각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 들었다. 하람이 사랑채 너머, 안채를 응시하는 이한을 보았다.
“네?”
“순영을 먼저 보낸 것이 다행일 줄이야.”
하람이 검을 부여잡는 이한을 따라 안채를 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안채가 누가 보아도 불길한 검은 기운에 점점 덮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섬뜩함과 불쾌감에 말을 잃어버린 사이 마당에서 어딘가 퍽 익숙한 구렁이가 나타났다. 곧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어찌 된 일입니까?』
“원귀들이다.”
구렁덩덩신선비의 얼굴이 구겨지고 하람의 얼굴이 굳었다.
“……힘들지도 모르겠군.”
이한답지 않은 부정적인 말과 함께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걸음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랑중문을 넘어왔다.
『모옥…….』
『목을, 찾아…….』
『목…….』
원귀들의 얼굴을 본 하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람은 이한이 원귀라고 해서, 얼굴을 모르는 원귀일 줄 알았는데 모두 잘 알고 있는 얼굴이다.
매형, 강원댁, 부엌 이모, 정원 삼촌, 순영의 운전기사 등. 하람이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에 탄식하며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늘어져 있던 영진이 스르륵 일어섰다.
『내, 내가, 이 집에 얼마나, 들어오고 싶었는지, 아느냐.』
삐뚜름하게 선 영진이 사랑채를 휘 둘러보았다.
『이, 곳에 있을 너와 내 목을 찾기 위해 얼마나 헤매고 떠돌았는지…….』
까마득한 회환에 젖은 영진의 멍한 시선이 이한에게 고정됐다. 뚫어져라 응시해 오는 시선에 이한이 눈매를 찌푸렸다가 검을 뽑았다.
“원귀 주제에 원귀와 잡귀를 선동해 일을 벌이고, 감히 하늘을 저주한다는 놈이로구나.”
검은 검 끝이 영진의 목을 겨눴다. 영진이 끽끽 소리 내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 몸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 죽일 것도 없지.”
검은 검날에 새겨진 북두칠성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을 힐끔 본 영진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해, 해종. 나, 나를 또 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해종이 아니라 이한이고,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다.”
이한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가 검을 영진의 옆에 있는 죽은 순영의 운전기사를 향해 던졌다.
정말 죽이겠다는 듯 검날이 가까워진다. 운전기사의 몸에 빙의한 원귀가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러고는 급하게 빠져나왔다.
빙의한 몸에 이한이 주저하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원귀들이 몸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한이 다시 검을 쥐었다.
“구렁, 하람을 지켜라.”
『……혼자서 다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사랑채에서 지내는 존재들은 모두 싸우는 능력이 전무했다. 구렁덩덩신선비가 기함하며 크게 외쳤다. 그의 큰 목소리에 반쯤 넋을 놓고 있던 하람이 정신 차렸다. 고개 들어 홀로 수십의 원귀들을 상대하는 이한을 보았다.
“……아, 안 돼.”
원귀의 기이할 정도로 긴 손톱이 이한의 팔과 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검은 피가 튀었다. 하람의 얼굴이 하얗게 얼었다.
이한은 기억을 찾으면서 회복력이 떨어졌는데 차사를 상대하면서 많이 다쳤었다. 이러다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마, 말려야 해요. 안 돼요. 말려야 해요.”
기억을 많이 찾았다. 이한이 허무하게 죽게 둘 수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 없었다. 이한에게 가기 위해 힘겹게 일어났다. 큰 꼬리로 다가오는 원귀를 쳐내던 구렁덩덩신선비가 기겁했다.
『아, 안 됩니다!』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던 구렁덩덩신선비가 구렁이로 변했다. 굵직한 꼬리로 당장 이한에게 달려가려는 하람의 허리부터 다리까지 휘감았다. 갑작스레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 하람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한 님 혼자 둘 수 없어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허리를 휘감는 단단한 꼬리를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구렁덩덩신선비의 말이 귀에 꽂혔다. 하람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
이한을 구하고 싶고, 돕고 싶은데 구렁덩덩신선비의 말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많은 귀신과 요괴를 만났지만 나아진 것이 없다. 절망감에 또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걸까. 나는…….
『이런, 이런. 어디서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느껴져서 왔더니, 제 도움이 필요해 보이시는군요.』
두 손으로 우울함에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삼키는데 별안간 위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고개 들어 위를 보았다.
“……구미호.”
『제 낭군님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 전에 죽으면 곤란합니다.』
아홉 개의 꼬리와 귀를 모두 꺼낸 채 하늘에 떠 있는 구미호가 접부채로 써늘한 얼굴을 가렸다.
얼굴부터 목, 검을 쥔 손, 굳건하게 선 두 다리. 이한이 성한 곳이 하나 없는 모습으로 거침없이 원귀를 베고, 검집으로 후려친다.
그런데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한을 보던 구미호가 부채를 착, 소리 내어 접더니 손을 낮게 들었다.
잠잠하던 들꽃과 잔디가 살랑이기 시작하더니 모래가 흩날렸다. 나중에는 이한에게 들러붙고, 달려드는 원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휘청였다.
갑자기 불어온 강한 바람에 원귀들이 맥을 못 춘다. 상황을 지켜보던 영진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기생 주제에 감히…….』
『내 잠시 즐겼던 기생 신분일 적에 죽은 놈이로구나.』
접부채를 살랑이며 바람을 일으키던 구미호가 눈을 반짝였다.
『내 너의 진짜 정체를 꼭 알아야겠다.』
구미호가 쥐고 있는 부채를 위로 들었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영진이 히죽 웃었다.
『요괴가 인간사에 드러내 놓고 개입하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가.』
영진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잠잠하던 하늘에서 쿠궁,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천둥소리 같으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에 이한과 구미호, 원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늘이 더없이 맑은데 벼락이 치려고 한다. 하람이 깜짝 놀라 움츠리는데 허리를 휘감은 구렁덩덩신선비의 꼬리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왜? 하며 살피는데 구렁덩덩신선비가 신음하더니 땅으로 점점 꺼졌다.
『……여기까진가.』
한탄과 함께 구미호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영진이 하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하늘을 향해 웃던 영진이 지금껏 구렁덩덩신선비에게 가려져 있던 하람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 천한 것을 가지고 와라!』
“……안 돼!”
영진의 지시에 원귀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람에게 쏠렸다. 하람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는데 이한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달아나라. 최대한 멀리!”
불길한 기운을 뒤집어쓰고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며칠을 굶주린 자들처럼 달려드는 원귀들의 모습이 오싹했다.
“아, 아…….”
하람이 주춤주춤 물러나는데 앞을 지키고 선 이한이 원귀를 야차처럼 상대하며 도망가라 외쳤다. 하람이 고민하다 몸을 돌렸다.
『팔을 꺾고, 다리를 부러뜨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한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달아나려는데 소름 돋는 지시가 귀에 들렸다. 달리던 하람이 놀라 멈춰 서서 뒤를 보았다.
“가!”
잠깐 사이 원귀들이 이한의 팔과 허리, 다리를 부여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잡고 있는 전신을 긁고, 이로 갉아먹었다. 그 모습에 다리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제, 제발…….”
오도전륜대왕, 구미호, 가택신. 누구든 제발 도와달라고 생각하며 우는데 원귀에게 팔이 덥석 잡혔다. 하람이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는 이한의 곁까지 맥없이 끌려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시를 내리던 영진이 천천히 다가왔다.
『자, 천한 아이야. 숨기고 있는 내 목을 내놔라.』
분명 영진의 얼굴인데 섬뜩한 기운과 혼탁한 눈빛, 푸른 입술에 공포감이 들었다. 지독함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던 하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 몰라…….”
영진의 몸속에 있는 원귀가 말하는 목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솔직하게 말하자 영진이 눈매를 찌푸렸다. 곧 몸을 파르르 떨었다.
영진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그 옆으로 망건 위로 백발이 성성한 얼굴을 곧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달고 있는 나이 든 노인이 나타났다.
『이, 얼굴과, 비슷한 얼굴, 이 어디 있, 는지 아느냐?』
노인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악취가 풍기고, 전신에 온갖 벌레가 가득했다. 징그러운 모습에 하람이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하다 주저앉았다. 노인이 쯧쯧 혀를 차며 하람의 뒤로 가 섰다.
『해, 해종. 내, 내 머리를 어디에 두, 었지? 말하, 지 않으면 이 몸에, 들어가 주, 죽을 것이다.』
원귀들이 이한의 몸을 돌려 마주 보게 만들었다. 노인이 썩은 손으로 토하는 하람의 젖은 턱을 강제로 들었다. 이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네 놈이 말하는 목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디 있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군.』
노인이 하람의 어깨를 잡았다. 주저앉은 하람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려 했다.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하람이 뒤늦게 몸을 달싹였다가,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며 거부하는데 노인이 혀를 차며 하람을 부여잡았다. 등 뒤에 붙어 귀에 무어라고 속삭였다.
불쾌감에 전신이 썩어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람이 신음하며 머리를 가로젓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한의 검을 발견했다.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며 의지가 사라져 갔다. 하람이 흐느끼며 눈물에 일렁이는 시선에 보이는 검은 검을 어렵사리 잡았다.
‘참. 어린 주인, 혹여라도 한이의 검을 오래 잡거나, 뽑지 말거라. 이한이 검을 함부로 할 놈이 아니지만 궁금하다고 해서 잡았다가 그대로 검에 홀릴 수 있으니 절대 함부로 잡지 말거라.’
검을 쥐자 손이 스스로 움직였다. 하람이 핏줄이 불거질 만큼 크게 뜬 눈으로 노려보는 이한을 보았다.
“……괘, 괜찮아요.”
분명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한의 검은 아니었다. 하람이 제 이름을 부르는 이한을 보던 두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검날을 부여잡았다.
“……하, 하람아!”
제 생각을 알아차린 듯 전에 없이 큰 이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가슴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