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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77)화 (7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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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전륜대왕은 이한에게 모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관대했다.

이한의 과거를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했는데……. 생각하지 못한 관계에 하람은 머리를 강하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뭐?』

하람이 말을 잃어버린 사이 역시나 충격에 굳어 있던 이한의 입에서 탄식 같은 물음이 나왔다.

『……아들?』

이한의 반응에 그 또한 오도전륜대왕과의 관계를 전혀 몰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람이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이한과 싸늘해진 오도전륜대왕을 불안하게 보았다.

『……염라. 과거를 함부로 운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잊은 건가.』

오도전륜대왕이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자 염라대왕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기억을 찾은 것 같으니 도와주지.』

별안간 염라가 이한의 이마를 턱, 짚었다. 힘 있는 손길에 이한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순간 빛이 번쩍 했다. 이한이 눈을 크게 떴다.

‘한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장독대와 들꽃이 있는 정겨운 앞마당이 너른 후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시야가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

이한이 등 뒤에 있는 궁을 보았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이제 막 피어나는 개나리꽃을 보았다. 동시에 다시 한번 더 한아, 하고 불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비랑 후원에 가고 싶다고 해놓고 딴생각을 하느냐?’

익선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인자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퍽 익숙했다.

의아해하다 오도전륜대왕과 얼굴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리 없이 놀라는데 남자가 두 팔로 어린 이한을 안아 들었다.

‘답답한 궁에서만 지내다 보니 궁 너머에 이렇게 멋있는 계절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는데. 세자 덕분에 알게 되는구나.’

정말 오도전륜대왕이 맞을까. 뚫어져라 보자 남자가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눈가에 지는 주름에 남자가 오도전륜대왕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오도전륜대왕의 진짜 정체를 깨닫자마자 눈에 보이는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네 어미에게 나 대신 이 꽃을 가져다주거라.’

화려한 당의를 입은 여자를 힐끔 보았다가 진달래꽃을 건네기도 하고.

‘이 책을 읽어보, 콜록, 콜록!’

사방으로 서책이 가득한 공간에서 서책을 주다 기침하기도 하고.

‘세자…… 과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이만 가보거라.’

이상할 정도로 횅한 강녕전에 누워 힘없이 인사를 받기도 했으며.

‘내가 배움의 끈이 짧아 세자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농사짓는 법과 나무를 패는 법 말고는 없구나…….’

슬픈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세자. 궁에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가득하다. 언행에 주의하고 또 주의해라. 그리고, 어미를, 미워하지 마라.’

병색이 완연하다 못해 보랏빛이 도는 입술로 힘겹게 말을 쏟아 내고 눈을 감기도 했다.

『……아.』

쏟아지는 기억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이한의 눈 아래로 검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내 털썩, 맥없이 주저앉았다.

『한아!』

불안한 이한을 지켜보던 오도전륜대왕이 다급하게 거리를 좁혔다. 축 늘어진 어깨를 잡고 안색을 살피다 불쾌함이 가득한 눈으로 염라대왕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던 염라대왕이 분기탱천한 오도전륜대왕을 보다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이한을 보았다.

『네놈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네 아비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다. 네놈을 위해 죽어서도 희생하는 네 아비를 위해 적당히 굴어라.』

차가운 일갈에 무릎 꿇고 앉아 그저 눈물 흘리던 이한이 고개 들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이 어렵게 열리는 순간 오도전륜대왕부터 염라대왕, 차사들이 일제히 명부 문을 보았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하람이 따라서 문을 보았다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명부 문 너머로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만큼 가득한 적패지가 마치 종이 꽃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저게 무슨…….”

하늘에서 팔랑이던 적패지가 차사들의 손으로 제각기 분배됐다. 차사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1972년 사망?』

『……내 건 2012년 사망자군.』

『나는 교통사고야.』

『나도.』

『……이거, 아무래도 이순영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차사들이 서로를 보았다가 일제히 염라대왕과 오도전륜대왕의 눈치를 살폈다. 염라대왕이 소리 내어 혀를 찼다.

『서둘러라!』

염라대왕의 명령에 차사들이 짧은 인사 후 사방으로 퍼졌다. 하람이 어느새 깊게 잠든 순영을 끌어안으며 염라대왕을 보았다. 염라대왕이 넋을 놓고 있는 이한과 긴장한 하람을 번갈아 보았다가 오도전륜대왕을 응시했다.

『……잘 처리할 거라고 믿지.』

염라대왕이 대답 없는 오도전륜대왕을 뒤로하고 명부 문을 넘었다.

오도전륜대왕과 막내 차사만 남고 염라대왕과 차사들이 다 떠났다. 포승줄에서 풀려난 터주신과 성주신이 서로를 짧게 보았다가 모습을 감췄다. 하람이 황량해진 앞마당을 보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상황이 정리된 것 같다. 안고 있던 순영을 안방에 조심스레 눕혔다. 편히 자는 모습을 짧게 지켜보았다가 마당으로 가 불안한 얼굴로 서 있는 오도전륜대왕에게 물었다.

“……대왕님, 어떻게 된 건가요?”

『응? 아, 아무래도 큰 사고와 회수자 목록에서 누락 되었던 영혼 회수 작업에 진척이 있는 듯하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자리를 헤매던 오도전륜대왕이 이유를 알려 준 뒤 슬쩍 이한을 보았다. 하람이 눈치 좋게 조금 물러나자 어색한 헛기침 후 앞에 앉았다.

『한아…….』

오도전륜대왕의 입에서 나온 부름에는 지금까지 듣지 못한 다정함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계속 넋을 놓고 있던 이한의 어깨가 움찔, 짧게 떨렸다. 곧 숙이고 있던 고개가 느릿하게 들렸다. 오도전륜대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차차 밝혀질 줄 알았건만. 이전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잠시라도 편히 쉬어라.』

오도전륜대왕의 손이 이한의 머리 위에 닿았다. 툭툭, 두드리는 것도 같고 쓰다듬는 것도 같은 손길을 따라 새하얗게 바랬던 머리가 점점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오도전륜대왕을 바라보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오도전륜대왕이 힘없이 옆으로 기우는 몸을 끌어안았다.

오도전륜대왕은 복잡한 얼굴로 한참 동안 가만있다 조심스레 너른 등을 쓸었다.

『……이런, 작은 주인을 오랫동안 두었네.』

이한을 사랑채 방으로 옮겨 눕히고 사람처럼 자는 모습을 보던 오도전륜대왕이 한 박자 늦게 하람을 알아차렸다. 그가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보니 하람은 언젠가 오도전륜대왕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어딘가 이한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정말 부자 관계였구나. 오도전륜대왕을 뒤따라 사랑채에 온 하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이한을 지키기 위해 온 것 같긴 한데 또 모른다.

혹시나 하고 의아한 낯을 하며 조심스레 묻자 오도전륜대왕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염라를 막기 위해 온 거긴 한데, 사실 목적이 하나 더 있다.』

설마,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불안함에 마른침을 꿀꺽 소리 내어 삼키자 오도전륜대왕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작은 주인, 계속 막을 생각인 건가?』

“……네?”

『이순영. 계속 잡아 두면 귀신이 될 수 있고, 죄가 쌓여 심판에 안 좋은 결과를 받을 수도 있네.』

귀신? 할머니가 귀신? 예상하지 못한 경우의 수에 그만 멍해졌다.

하람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하자 오도전륜대왕이 낮게 침음하다 막내 차사를 불렀다.

『할머니와 같이 지내고 싶은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를 위해 어린 주인께서 조금이라도 나은 결정을 했으면 좋겠네.』

마지막 가는 길 결코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오도전륜대왕의 손에 적패지가 들렸다. 하람이 진중한 얼굴의 오도전륜대왕과 곧 울 것 같은 막내 차사 그리고 적패지를 번갈아 보다 고개를 숙였다.

“……하람아.”

순영을 위해 결정하라는 오도전륜대왕의 말에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하람이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온 영진 가족과 변호사, 강원댁과 함께 안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셨, 습니까?”

오도전륜대왕의 자비로 순영과 얘기할 시간이 짧게나마 생겼다. 하람은 낮게 기침하며 이런저런 걱정과 조언을 말하는 순영의 마지막 모습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하람 님.”

순영을 망막에 새기듯 응시하는데 이름이 불렸다. 하람이 얼굴을 가까이하자 순영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어릴 때부터 정말, 모나지 않고 바르게 자라 줘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다, 할머니 덕분이에요.”

순영이 연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하고 싶은 일 하시면서 행복하게 사세요.”

목이 멨다. 말을 하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자 순영이 마주 잡은 손 위를 토닥였다.

“……하람 님도, 그리고 신께서도.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할머니!”

천천히 다시 만나자는 말과 함께 마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언제나 다정한 눈이 천천히 감겼다. 어느새 울고 있던 영진이 순영을 크게 부르는 것과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막내 차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람 님, 시작할게요.』

참고 참던 눈물을 결국 흘린 하람이 고개를 주억였다.

순영을 찾는 가족들의 목소리 사이로 순영의 이름을 부르고, 죽은 일자 등을 말하는 막내 차사의 목소리가 섞였다.

『그럼 명부 시왕 님을 뵙고, 심판을 받기 위해 명부로 이동하겠습니다.』

하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내 차사의 곁에 선 순영의 맑은 영혼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순영이 늘 짓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허리를 짧게 숙였다. 곧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다는 막내 차사가 순영을 데리고 문을 넘자, 쿵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닫혔다. 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하람이 주저앉았다. 어느새 차갑게 식은 순영의 손을 잡고 아이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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