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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75)화 (7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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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할까. 사람의 발소리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게 묵직한 느낌이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가슴이 무섭게 두근거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두려움과 초조함에 손이 떨리고, 땀이 고였다. 하람이 마른침을 삼키는데 어깨가 약하게 감싸였다.

    “너는 아무 문제 없다.”

    “네? 네…….”

    “순영에게 가 봐야 한다. 움직일 수 있겠나?”

    할머니에게 가 봐야 한다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한이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내가 차사를 상대할 테니 순영이 차사의 부름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고 있어라.”

    “네? 네.”

    안방으로 가는데 무슨 일인지 사용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의아한 낯으로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주변을 훑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모두 물렸다.”

    “네? 무슨 일이 있나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너와 순영뿐이다.”

    왜, 하고 물으려는데 희미하게 무어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낮은 목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하람이 허겁지겁 안방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이한이 잡아챘다.

    “……하람아.”

    잔뜩 긴장한 듯한 목소리에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굳은 얼굴의 이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러고도 머뭇거리는 듯 한참 말이 없다가, 곧 나지막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위험할 때, 반드시 도와달라고 말해라.”

    “네?”

    “……그리고, 놀라지 말아라.”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이한의 말에 하람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이한이 문을 열었다.

    『왔는가?』

    반듯하게 누워 자는 순영의 앞에 앉아 있던 인자한 낯의 나이 든 남자가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낯선 얼굴에 하람이 저도 모르게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이 집의 성주신이다.”

    “성주, 신이요?”

    『어서 오시게. 어린 주인과는 언제 한번 따로 이야기해 볼까, 했는데. 이렇게 얘기하게 되는구먼.』

    성주신이 놀란 하람을 보며 쓰고 있던 중절모를 슬쩍 들었다가 다시 썼다. 하람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가 허리를 엉거주춤 숙여 인사했다. 성주신이 이한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야.』

    “아직 설명을 안 해 줬다. 하람아, 너는 순영의 머리 위에 앉아 있어라.”

    퍽 가까워 보이는 성주신과 이한을 번갈아 보던 하람이 잠든 순영의 머리맡으로 가 앉았다. 성주신이 소리 내어 혀를 찼다.

    『터주신은 밖에 있고, 조왕신은 아직 가만히 있네.』

    “미리 나와 있으라고 했건만.”

    이한이 짜증 난 기색을 내보이며 너른 안방을 훑었다.

    하람은 성주신과 터주신, 조왕신이란 단어에 정신을 잃기 전 이한이 안채에 갔던 것과 언젠가 구렁덩덩신선비에게 들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가택신(조왕신, 터주신, 성주신, 문전신 등 집을 지키며 집안의 운수를 좌우하는 신)들이 차사가 데려가려는 자를 지킨다, 였던가. 하람이 어느새 지팡이 짚고서 문을 지키고 선 성주신과 창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한을 번갈아 보았다.

    이한은 오늘을 준비했던 걸까. 마른침을 삼키는데 이한이 옆으로 다가와 서서 어깨를 짚었다.

    “차사가 순영의 이름을 부를 거다. 넌 순영이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귀를 틀어막고, 혹시나 혼이 나오면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라.”

    “……네? 네.”

    두 존재의 얼굴이 어두운 탓일까. 어쩐지 조금 불안하다. 이한을 올려다보던 하람이 불안한 얼굴로 끄덕였다.

    『준비하시게.』

    성주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벼락같은 큰 목소리가 들렸다.

    『예가 어디라고 또 와!』

    나이가 느껴지는 노성과 진정하시라는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람이 불안한 얼굴로 닫힌 창을 응시했다.

    『오늘 온 자들은 터주신의 저 성질머리를 살살 달래는 쪽인가 보구먼.』

    『아직 모른다.』

    긴장감에 목이 탔다. 아무것도 모르고 편하게 자고 있는 순영의 귀 옆으로 두 손을 두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성주신.』

    이한이 성주신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아이고…….』

    이제 막 문을 연 깐깐한 인상의 일직차사와 한 손에 적패지를 든 이승차사가 탄식하며 얼굴을 구겼다. 성주신이 허허, 소리 내어 웃으며 지팡이를 들었다.

    『너무 빨리 왔소. 이만 물러가시게. 안 그럼 이 지팡이에 맞을 것이야.』

    『……왜 이렇게 막아섭니까? 이런다고 우리가 포기할 것 같습니까?』

    이승차사가 드러내 놓고 귀찮다는 얼굴로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한이 소리 내어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도 포기할 생각 없다.”

    스릉, 서늘한 소리와 함께 불길할 정도로 새카만 검날이 겉으로 드러났다. 일직차사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염라대왕님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켜보라지.”

    이한이 입술을 비틀며 검을 들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날카로운 검날이 차사의 백색 셔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일직차사가 황급히 크게 뛰어 물러났다.

    『지금,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제법이라는 눈으로 일직차사를 보던 이한이 검을 바로 잡았다. 일직차사가 까드득, 소리가 날 만큼 이를 악물었다.

    『……좋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일직차사의 손에 지팡이같이 생긴 좌장검이 턱 잡혔다. 검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는 소리와 함께, 예리한 검날이 서로 부딪쳤다.

    일직차사가 검을 꺼내고부터 분위기가 삽시간에 사나워졌다.

    카앙! 캉! 날에서 불티가 일고, 마치 쇠망치로 못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골을 뒤흔들었다. 정말로 머리를 누군가가 깨부수려 하고 있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에 순간 넋이 빠졌다.

    하람이 귀를 틀어막으려는데 반듯했던 순영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이 보였다. 뒤늦게 두 귀를 덮었다.

    『이승차사! 이순영의 이름을 부르세요!』

    이한이 한 손으로 쥐고 있는 검으로 일직차사를 몰아붙였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이한의 검을 어렵사리 막아내고, 피하며 툇마루까지 간 일직차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꾸만 따라붙는 성주신에게 가로막혀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이승차사가 깜짝 놀랐다. 그가 이내 헛기침을 했다.

    『이순…….』

    『어딜!』

    이승차사가 순영의 이름을 부르자 얌체같이 그를 막아서던 성주신이 지팡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이승차사가 악! 소리 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승차사가 아파하든, 말든. 성주신이 지팡이로 웅크린 몸을 때려 댔다. 이승차사가 악악 소리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두 가택신과 이한이 막아서면서 영혼 회수가 계속 지연됐다. 두 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속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느새 마당까지 나간 일직차사가 송곳처럼 날카로운 좌장검을 앞으로 뻗었다. 검 끝이 이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선과 함께 검은 피가 약하게 새어 나왔다. 이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비소하며 검을 들었다.

    “네 꼴을 보아하니 평생 막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뺨이 그이는 그 찰나에 다른 손으로 검을 바꿔 잡았다.

    『……과거 왕이었던 자가 왼손이라니?』

    “네까짓 게 무슨 상관이지.”

    이한이 놀라 하는 일직차사에게 무심하게 대꾸하며 그의 상체를 길게 내리그었다. 백색 셔츠와 감색 쾌자가 잘리고 검은 피가 높게 튀었다. 일직차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출혈이 크다. 일직차사가 숨을 삼키며 무너졌다. 피 웅덩이 속에 무릎을 꿇은 그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한이 소리 내어 혀를 찼다.

    “차사라고 하여 기대했건만, 참 하찮군.”

    무심하게 검에 묻어 있는 피를 털어 내고 몸을 돌렸다.

    두더지 게임 하듯 지팡이로 이승차사를 때리고 있는 성주신과 순영의 귀를 막고 있는 하람을 보는데 등 뒤에서 딱, 소리가 들렸다. 몸을 홱 돌려 한 손을 든 채 힘없이 웃고 있는 일직차사를 보았다.

    『이대로, 물러날 줄 알았습니까?』

    “무슨…….”

    이한이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고 묻는데 끼이익, 소리가 말끝을 잘랐다. 곧 어둑한 하늘에 나타난 명부로 통하는 문이 입을 쩌억 벌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염라, 대왕님이 지켜보고, 있다고.』

    열린 문 너머에서 손에 적패지를 든 또 다른 사자 세 명이 나왔다.

    월도와 환도, 쌍검까지. 순영의 영혼을 반드시 회수하겠다고 작정한 건지 적패지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가지고 있다.

    “……염라가 결국 돌았나 보군.”

    『죄인 이한은 언행에 유의하도록!』

    치명상을 입어 안개가 되어 사라진 일직차사를 뒤이어 나타난 세 차사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이한을 꾸짖더니, 이내 무기를 꼬나쥐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한이 급하게 검을 들어 제 얼굴을 노리는 날을 막았다.

    『염라대왕님께서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더 큰 벌을 받기 전에 순순히 이순영을 넘기세요.』

    “염라에게 전해라. 나는 지금 명부에서 허락한 주인의 명을 받아 지키고 있는 거라고.”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한이 검을 내리누르는 무기를 힘껏 쳐냈다. 차사들이 얼굴을 구기며 물러났다.

    『……어쩔 수 없군요.』

    긴 월도를 가볍게 든 여자 차사가 곁에 선 차사에게 고갯짓했다. 환도를 든 차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한을 스쳐 안방으로 향했다.

    이한이 급하게 뒤따르며 손을 뻗는데 똑같은 참수도 두 개가 단두대처럼 팔 위로 떨어지듯 내려왔다. 이한이 황급히 팔을 거두고 몸을 틀어 거리를 벌린 순간 참수도가 조금 전 이한이 서 있던 바닥을 찍었다.

    『당신은 갈 수 없습니다.』

    쌍검을 땅에서 뽑아 갈무리한 차사가 다시 한번 이한에게 검을 휘둘렀다. 주저함이라고는 없는 묵직한 검날을 검으로 막아낼 때마다 손이 잘게 떨렸다.

    이번에 온 차사는 조금 전에 싸웠던 일직차사와 다르게 검이 매서웠다. 쌍검을 어찌 막아내면 바로 옆에서 월도가 찍어 내리려 들었다.

    “한 명에게 차사 둘이 달려드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진심이라고 하죠.』

    이한이 제 조롱에도 검을 쥐고 있는 손을 노리는 쌍검에 손을 조금 더 내밀며 검집을 들었다.

    『저는 그런 얕은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검집이 머리를 후려치려는 순간 차사가 몸을 뒤로 물렸다. 동시에 월도가 이한의 팔을 약하게 베었다. 이한이 재빨리 팔을 뒤로 뺐다.

    “……재밌군.”

    조금만 더 깊게 베였다면 검을 그대로 놓칠 뻔했다. 피가 흘러나오는 팔을 힐끔 본 뒤 경련하는 손으로 검을 꽉 쥐었다.

    “그래. 어디 한번…….”

    『이순영.』

    차사들을 향해 검을 드는데 순영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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