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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칼날이 번득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웃는 여자와 반대로 이한의 얼굴이 굳었다. 여자가 굳은 이한과 그 옆에 서 있는 차사를 차례대로 보았다.
『……과거에도, 그렇게 저를 가만 내려다보셨죠.』
여자가 가슴을 약하게 들썩이며 웃었다. 이한이 검을 꽉 쥐었다.
“……날 잘 아는가 보군.”
『알기만 할까요.』
여자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어딘가 히스테릭하게 변하는 모습에 차사가 이한을 힐끔거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십니까?』
우리라니. 이한의 미간이 불쾌감에 찌푸려졌다. 여자가 그럴 거라 예상했다는 듯 큭큭 웃었다.
『예, 기억하지 못하시겠죠. 저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날의 날씨부터 당신의 눈빛, 말. 모두!』
여자의 고운 얼굴이 마른 땅처럼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더러운 벌레라도 보듯이 보셨지요! 그도 모자라 가례(嘉禮) 날부터 초야, 제례(祭禮), 늘 저를 홀로 두셨지요!』
『……이한 님, 안 되겠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여자가 격앙했다. 마치 악귀가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에 차사가 포승줄을 고쳐 잡았다.
포박하기 위해 포승줄을 드는데 지금껏 가만있던 이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꼭 내가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여자의 악에 받친 목소리를 따라 누군가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한이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자가 입술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당신은…….』
『거기까지.』
별안간 새빨간 포승줄이 여자의 목을 휘감았다. 여자가 컥! 소리를 내며 목을 조이는 포승줄을 부여잡았다. 이한이 포승줄을 따라 고개를 홱 돌리자, 한 손에 포승줄을 들고 무테 안경을 낀 차사와 적패지를 든 어린 차사, 덩치가 큰 차사가 나타난 것이 보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구천을 떠도는 무자귀(無子鬼)의 말입니다. 들을 가치가 없답니다.』
양 갈래 머리를 한 어린 차사가 적패지로 입가를 가리고 호호 웃었다. 이한이 몸을 돌려 차사들을 마주 보고 섰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다.”
『원귀를 멀리하시던 분께서 어찌하여 이리도 관심을 가지십니까? 갑자기 달라지시면 큰일 나셔요.』
이한이 얼굴을 구기며 따지려던 순간 어린 차사의 옆에 서 있던 차사가 손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차사들 위로 새카만 문이 나타났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에 이한이 포승줄을 콱 움켜잡았다.
“이 원귀는 내 몫이다. 물러나라.”
하람과 떨어져 이곳까지 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순순히 보내줄 수는 없었다.
여자를 명부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버티는데 어린 차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실 텐데요.』
덩치 좋은 차사가 명부로 들어갔다. 적패지를 든 차사가 그 뒤를 따라 문 너머로 갔다.
『이러다 어린 주인께서 명부에 오시겠어요.』
어린 주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끙끙 앓던 하람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하람이…….
포승줄을 잡은 이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다급히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이한을 차사가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다른 차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 하람 님이 위험하신가요?』
『우리 차사께서도 오시죠.』
안경을 낀 차사가 무자귀를 포박한 채로 문을 넘었다. 홀로 남겨져 불안한 얼굴로 연행헌과 문을 번갈아 보던 차사가 느지막이 문을 넘었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적한 숲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 * *
이한은 언제 오는 걸까. 여자에게서 기억의 단서는 찾았을까…… 생각하는데 몸이 덜덜 떨렸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체온이 내려가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싶은데 몸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거기다 시야까지 꺼져 갔다. 하람이 혼몽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한, 님.”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한을 생각하다 더 버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름을 읊조린 순간 희부연 시야에 연기가 보였다.
“드디어 내 이름을 불러 주는구나.”
“……아, 이한 님.”
“늦어서 미안하다.”
연기 속에서 나타난 이한이 하람을 아이를 안듯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곧 꺼질 것 같은 숨소리를 내는 하람의 고개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뒤로 넘어가지 않게 끌어당겼다.
“조금만 기다려라.”
귀에 이한의 목소리가 들리고, 몸을 단단히 붙잡는 힘이 느껴졌다. 하람이 힘없이 웃었다.
주차장, 돌담, 대문, 안채. 듬직한 품에 늘어져 기대고 있는데 시야가 성큼성큼 빠르게 바뀌었다.
“순영아!”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정신이 끊기려고 했다. 그러다 이한의 큰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수, 순영이라니.”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할머니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를 줄이야. 놀라 말을 잃어버린 사이 곳곳에서 세상에, 어머나,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람이가 다쳤다. 어서 의사를 불러라.”
“하람아!”
고개를 돌리고 있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할머니와 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섰던 이한이 다시 걸었다.
긴 다리가 순식간에 안채 안방으로 들어섰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보료 위에 하람을 모로 눕혔다.
은은한 차향과 전신을 감싸는 온기에 작게 열린 하람의 입술 사이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한이 늘어진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주치의가 오는데 1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보다 이한 님, 어찌 된 일입니까?”
영진에게 사람을 물리라고 한 뒤 안방으로 온 순영이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걱정 어린 얼굴의 이한과 창백한 하람을 보았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한이 순영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하람의 얼굴에 묻은 흙과 땀을 조심조심 닦아 냈다.
“내가 없는 틈에 주차장에서 무자귀에게 당했다.”
“무, 무자귀요? 어떻게…….”
순영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이한이 짧게 한숨 쉬었다.
“내가 기억을 찾으면서 기운이 약해졌다. 그 탓에 내가 준 가락지의 힘이 약해진 것 같다.”
순영이 당황한 얼굴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반쯤 넋을 놓고 있길 몇 분. 노크 소리가 짧게 울렸다.
“할머니, 주치의 왔어요.”
순영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작은 대야를 든 영진과 주치의가 들어왔다.
“피를 다 닦아야 해서 상의를 자르겠습니다.”
가위에 하람이 입은 상의가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곧 손톱에 깊게 할퀴어진 상처에서 나온 검붉은 피에 뒤덮인 등이 드러났다. 안방에 있는 모두가 숨을 삼켰다.
“……따가울 겁니다.”
주치의의 경고와 함께 소독제가 상처에 닿았다. 약하게 숨을 고르던 하람의 상체가 움찔 떨렸다. 그러면서 마주 잡은 이한의 손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흐으으…….”
“쉬, 금방 끝난다. 조금만 참아라.”
차가운 소독제가 등에 점점이 닿았다. 그때마다 이한의 손을 잡은 하람의 손이 벌벌 떨리고, 일그러진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이한이 고통에 흐느끼는 하람을 달래 주며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 냈다. 다정한 손길에도 하람이 얼굴을 구겼다.
“……너, 너무, 으흑, 너무, 아파요.”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꼭 날카로운 송곳 따위로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다.
등이 찢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따끔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상체를 뒤틀자 이한이 잡은 손을 당겼다. 하람이 젖은 눈으로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 한…….”
“하람아?”
힘겹게 이한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스르르 꺼졌다.
* * *
감은 눈이 시렸다. 분명 감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빛에 결국 눈을 뜨자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한 빛에 눈이 따가웠다. 윽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눈앞을 막았다.
그러고 있길 몇 분. 시야가 빛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와.”
바로 앞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꽃밭이 펼쳐져 있다.
동백, 작약, 국화, 수국, 연꽃. 색이 다 다른 수십 가지의 꽃에 반쯤 넋이 나갔다. 멀거니 서서 아름다운 무릉도원을 보며 진한 꽃향기를 맡았다.
『예쁘지?』
산들바람에 살랑이는 꽃가지를 보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보았다가 입이 작게 열렸다.
“가, 감은장아기 님?”
『우리 아가, 오랜만이야.』
감은장아기가 웃으며 손을 짧게 흔들었다. 하람이 숨을 삼켰다가 뒤늦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때? 여전히 절경이지?』
“정말 아름, 네?”
아름답다고 말하던 중 감은장아기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전히라니? 처음 봤는데?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데 감은장아기가 후후 웃더니 하람의 손을 잡았다.
『차 마시러 가자.』
감은장아기가 미간을 좁히는 하람을 아래로 이끌었다. 하람이 당황했다가 이내 감은장아기를 따라 꽃 사이로 있는 길을 걸었다.
“감은장아기 님. 저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그런데 왜 나한테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않니?』
“……네?”
『그리고 왜 꽃이 몸에 닿지 않게 조심해서 걷니?』
“그야, 꽃이 다치면 안…….”
『세상에, 하람아!』
감은장아기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했다. 결국 자리에 멈춰 섰다.
감은장아기와 마주 보고 서서 말하는데 갑자기 큰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확 안겼다. 하람이 헉, 하고 맥없이 휘청였다.
『옥황상제께 부탁했는데, 정말로 왔구나!』
감은장아기가 뜨악하다 넘어지려는 하람의 어깨를 황급히 부여잡았다.
『얘! 하람이가 놀랐잖아!』
『어머나,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달려와서 안아 버렸네.』
아하하, 어색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하람의 등에 반쯤 업힌 여자가 바닥에 내려가 섰다. 하람이 소리 죽여 기침한 뒤 똑바로 섰다. 감은장아기가 어깨를 놓았다.
『아가, 괜찮니?』
“……큼, 네. 괜찮습니다.”
감은장아기가 아니었으면 정말 형편없이 넘어질 뻔했다. 감사 인사를 하는데 감은장아기가 하람의 옆을 보았다.
『오랜만이라도 그렇지. 하마터면 하람이가 다칠 뻔했잖아.』
『얘, 너는 하람이를 봤지만 나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거든?』
이러다 귀에서 피가 나오겠다고 꿍얼거리던 여자가 하람을 보며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우리 아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두 여자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하람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네?”
감은장아기 만큼이나 아름다우면서 고아한, 그러면서 저를 보자마자 웃는 여자는 분명 처음 보는 여자였다.
의아함에 되묻자 여자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이내 밝게 웃었다.
『나란다, 삼신(三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