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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72)화 (7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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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굴려 피한 것과 동시에 조금 전까지 있던 곳에 날카로운 손톱이 반쯤 박혔다. 하람이 급하게 숨을 삼켰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위험하게 손을 휘두르던 여자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곧 서러운 울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숨을 삼킨 채로 여자를 보던 하람이 힘겹게 숨을 골랐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한을 불러야 한다.

    입 밖으로 이한의 이름을 말하려는데 불현듯 이한이 명부에 갔다는 것이 떠올랐다.

    저 귀신이 언제 또다시 달려들지 모르는데.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 사자가 준 호루라기가 번쩍 생각났다. 하람이 떨리는 손으로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휭, 힘이 없어 호루라기가 제대로 불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만 나는데 울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부딪쳤다.

    『너만, 너만 없었어도…….』

    등이 화끈거리는 만큼 정신이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애써 뜨고 여자가 점차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도대체 왜? 하람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웠다. 시야가 흐릿한데도 여자가 이를 악무는 것만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의아해하던 중 여자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곧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으며 안간힘을 다해 호루라기를 불었다.

    『누가 우리 하람 님 괴롭혀!』

    날카로운 손톱 끝이 하람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더니 얼굴 바로 앞에 박혔다. 그리고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목소리에 하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안도감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하람이 숨을 토해 내며 힘없이 축 늘어졌다. 차사가 하람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몇 걸음 물러났다.

    『하, 하람 님, 괜찮으세요?』

    “……네.”

    서늘한 품에서 천천히 벗어나 바닥에 눕혀졌다. 차사가 붉은 오랏줄로 바닥에 꽂혀 있는 제 환도를 빼내 잡고, 하람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이제 막 와 아무것도 몰랐던 차사가 당황한 눈으로 늘어져 누운 하람과 일어나는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차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여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네놈, 별감 네놈이 여기, 어떻게?』

    『으잉? 별감? 별감이 뭐지? 나 말하는 건가? 저 아세요?』

    차사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듯 의아한 얼굴로 하람을 보았다. 하람의 찌푸려진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였다.

    별감(別監)이라니. 설마 임금을 호위하는 그 별감을 말하는 걸까.

    그보다 차사도 제 전생과 연관이 있는 걸까. 하람이 흉하게 일그러지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답을 생각하는데 여자가 전신을 눈에 띄게 떨었다.

    『저 집, 저 아이, 그리고 별감 너까지! 어찌하여 모두 멀쩡한 것이야!』

    여자가 마치 피를 토하듯 사납게 외치며 대문이 굳게 닫힌 연행헌과 하람, 차사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하람의 얼굴이 굳었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 목숨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내 가문까지 멸하게 한 네놈들 모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다시 달려들었다. 아귀처럼 달려드는 여자의 모습에 차사가 으악 소리를 질렀다.

    『아니, 누구신데 이러시는 거예요!』

    본디 차사는 적패지가 없으면 영혼을 회수할 수 없었다. 거기다 영혼이 갑자기 아는 척을 해 당황한 탓에 어떤 행동을 섣불리 취할 수 없었다. 차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달려드는 여자를 피해 계속해서 물러났다. 여자가 사납게 손을 휘둘렀다.

    『도대체 왜 이러…….』

    『너는 이전에도 거슬리더니 이번에도 거슬리는구나. 썩 꺼져라!』

    『악!』

    여자의 손톱이 차사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차사가 으아아 우는 소리를 내며 제 뺨을 크게 덮었다.

    『아잇, 왜 얼굴을 긁고 그러세요!』

    차사가 너무한다고 하며 둘둘 말린 포승줄을 길게 풀었다. 아슬아슬하게 얼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손을 피하며 포승줄로 큰 고리를 만들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적패지 오기 전까지 가만히 있어 주세요!』

    차사가 여자의 어깨를 짚고 높게 도약했다. 깜짝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위를 보는 여자를 포승줄로 단번에 포박했다. 상체를 휘감은 포승줄에 꼼짝도 할 수 없어진 여자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쓰러졌다.

    『휴우, 차사를 공격하는 원귀가 있을 줄이야. 이런 경우는 처음…….』

    『내 원한이 이리 간단하게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느냐?』

    차사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는데 별안간 여자가 크게 웃었다. 그 모습에 차사가 응?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하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

    별안간 등에서 느껴지던 화끈거림이 전신으로 퍼졌다.

    마치 뜨거운 불 속에 빠진 것처럼 전신이 뜨거워졌다. 그러면서 두 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최근 잠잠하던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 고통이 극심하다. 참기 어려운 두통과 격통에 모로 누워 있던 하람이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짚고, 몸을 웅크렸다.

    『하람 님!』

    가슴이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다. 버티지 못하고 절절 끓는 가슴을 쥐어뜯는데 차사가 놀라 바로 앞까지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프세요? 어, 어떡하지?』

    “으, 흐으으…….”

    아프다. 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다.

    하람은 걱정하는 차사의 얼굴에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억누르다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한, 님…….”

    밭은 숨을 토해 내며 눈물을 어렵게 삼켰다가 눈을 떴다.

    이한이 간절했다. 고통을 참기 위해 씹어 댄 탓에 엉망으로 터진 입술을 겨우 움직여 이한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그 순간 여자가 몸부림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포승줄이 차사의 손을 빠져나가 버렸다.

    『으악! 안 돼!』

    『그만 죽어라!』

    차사의 손에서 벗어난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차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보고 싶어서 부른 건가 했는데.”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는 차사에게 손톱이 닿기 직전. 어느샌가 숲을 꽉 메운 불길할 정도로 검은 연무(煙霧) 사이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디서 간특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연기 속에서 검은색 일색의 이한이 걸어 나왔다.

    “차사에게 달려드는 원귀라니. 이거 참 재미있구나.”

    입술 끝을 비트는 이한과 손목이 틀어 잡힌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여자의 눈이 한계까지 뜨였다.

    『왜, 어째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납기 짝이 없던 여자의 얼굴과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패닉이라도 온 것처럼 맥없이 늘어진 여자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에서는 아아, 소리가 채 되지 못한 말이 나왔다. 이한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뭐지?”

    완전히 달라진 여자의 모습에 이한이 굳었다. 그 모습을 덜덜 떨며 지켜보던 하람이 한숨 쉬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이, 한 님…….”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는 분명 전생과 연관이 있었다. 이한의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힘 하나 없는 목소리로 애써 이름을 부르자 여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이한이 홱 고개를 돌렸다.

    “……하람아!”

    그는 그제서야 하람의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한이 크게 놀라며 잡고 있던 여자의 손목을 놓고 다급하게 하람의 앞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지? 누가 널 이렇게…….”

    이한의 시선이 창백하게 질린 데다 돌에 긁혀 엉망이 된 하람의 얼굴부터 벌건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등을 훑었다.

    “저, 여자…….”

    눈에 띄게 당황한 이한을 올려다보던 하람이 어느새 땅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를, 알고 있었어요. 어서,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어, 야, 해요.”

    여자가 사라지기 전에 기억을 찾아야 했다. 하람이 이한에게 어서 여자의 정체를 확인하라고 하자 이한이 여자를 보았다.

    “……저자가 널 이렇게 만든 건가?”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지고, 기세가 흉흉해졌다.

    사나운 기세를 느낀 걸까. 끈이 잘린 인형처럼 멍하니 있던 여자가 천천히 이한을 보았다. 이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열렸다.

    『……당신도, 여전하시군요.』

    여자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이한을 보며 하하, 낮게 웃으며 울었다. 이한이 여자를 보다 고개를 돌려 하람의 창백한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지금 내 기억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서 치료…….”

    이한이 하람을 조심스레 안아 올리려는데 하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서 저 여자부터, 기억을 찾아야, 해요.”

    치료는 늦어도 되지만 여자는 떠나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빨리, 하며 없는 힘을 끌어모아 재촉하듯 이한의 팔을 떠밀었다. 하람을 보던 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넌 어떻게 이 상황에서…….”

    『도망가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아파하면서 기억을 운운한다. 이한이 하람을 일그러진 눈으로 보는데 차사가 소리를 질렀다. 짜증스레 차사를 보았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이한의 벼락같은 큰 소리에 차사가 움찔, 떨었다가 달아나는 원귀를 뒤쫓았다. 이한이 힘겨워하는 하람을 바닥에 조심스레 모로 눕혔다.

    “하람아, 금방 끝난다. 정신 잃지 말거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을 불태우는 듯한 고통이 찾아들어, 어느새 하람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한이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뜨는 하람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살며시 훔쳐 낸 뒤 일어섰다.

    이한은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하람에게 덮어 주고 손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이한이 여자와 차사가 사라진 산 쪽으로 달렸다.

    * * *

    『악! 도망 좀 그만 가세요!』

    자리옷 자락을 부여잡고 빠르게 도망가는 여자를 향해 뻗어 가던 포승줄이 나뭇가지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차사가 바닥에 떨어진 포승줄을 회수하다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진짜 환장하겠네!』

    요청한 적패지가 오지 않아 미치겠는데 여자도 잡히지 않는다. 이러다 이한에게 크게 혼나겠다는 생각에 소리치는데 별안간 검은 연기가 번졌다. 곧 연기 속에서 검붉은 빛 털의 호랑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앞질렀다.

    『호랑이?』

    연행헌 뒷산에 사는 호랑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했다. 뭔가 싶어 의아한 눈으로 보는데 얼굴 바로 옆으로 휙, 무언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악!』

     여자가 비명과 함께 마치 무언가에 강하게 얻어맞은 듯 볼품없이 고꾸라졌다.

    부들부들 떨며 바르작거리는 어깨에 잘 벼려진 검이 박혀 있었다. 차사가 숨을 삼키며 멈춰 섰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엎드려 누워 벌벌 떠는 여자와 그 옆을 지키고 선 호랑이, 숨을 죽이고 있는 목신까지. 스산한 풍경을 훑던 차사의 등 뒤로 분노가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곁을 스쳐 지나간 이한이 여자의 어깨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냈다.

    “네 정체를 말해라.”

    날카로운 검 끝이 모로 누워 흐느끼는 여자의 목 위로 닿았다.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이한을 마주 보다 옅게 웃으며 똑바로 누웠다.

    『이전에는 사약을 내리시더니, 이제는 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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