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71)화 (71/87)

71

폭신한 요에 등이 닿는 순간 니트 자락이 끌어올려졌다. 이한의 혀에 혀를 맞비비던 하람이 아랫배에서부터 복부, 가슴까지 길게 쓸어올리는 차가운 손에 벅찬 숨을 토했다.

여리게 떠는 사이 니트가 어깨까지 올라왔다. 팔을 들어 니트 벗는 것을 돕자 이한이 입술을 맞닿은 채로 웃었다.

“하기 싫은 척하더니.”

“……그런 적 없어요.”

어색하게 항변하며 이한이 입고 있는 셔츠 단추를 더듬더듬 풀었다. 단추가 하나 둘 풀리는 동안 이한이 하람의 허리선을 따라 손을 내렸다. 곧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아래로 벗겨지는 바지와 함께 이한의 입술이 내려갔다.

“하…….”

입술이 도드라진 목울대와 쇄골, 아무것도 입지 않은 가슴에 점점이 닿을 때마다 발간 울혈이 번졌다. 하람이 몸을 웅크리며 피부를 입으로 약하게 빨아 자국을 남기는 이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한이 목을 울리며 웃다 하람의 엉덩이를 크게 짚어 가까이 당겼다. 아래가 맞부딪치면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이한, 님…….”

“잠들면 엉덩이를 때려 줄 테다.”

여린 신음을 흘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집중하라는 듯 엉덩이를 찰싹, 약하게 맞았다. 하람이 깜짝 놀라 굳었다가 웃고 있는 얼굴에 헛웃음을 흘리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눈을 스르륵 감았다.

* * *

은은한 풀 향기와 따뜻한 온도, 온몸을 감싸는 폭신한 이불까지. 기분 좋게 자는데 머리카락이 쓸어넘겨졌다. 하람이 나른한 한숨을 쉬며 늘어졌다.

“하람아.”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 위로 입술이 닿았다.

“명부에 다녀오마.”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이자 다시 한번 더 귀에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이불이 턱까지 올라왔다.

따뜻한 포근함 속에 파묻혀 자길 몇 분. 조용한 공간 속에 핸드폰 알람 소리가 울렸다.

하람이 미간을 좁히며 덮고 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겼다. 이불 아래에서 웅크렸다가 계속 들리는 알람 소리에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아, 가기 싫어…….”

더 자고 싶은데 약속이 있었다. 잠기운 가득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고는 이불을 아래로 내렸다.

이한이 아직 명부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방에 저뿐이다. 크게 하품하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제일 먼저 알람을 껐다. 이한이 개켜놓은 잠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하람도 나가?』

말끔하게 씻은 뒤 옷을 입었다. 잊지 않고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가락지를 꼈다. 마지막으로 가방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가자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있는 노앵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람이 삐지기 직전으로 보이는 노앵설에게 맞춰 쪼그려 앉았다.

“대신 일찍 올게.”

『정말이지? 나랑도 놀아 줄 거지?』

“그럼. 금방 다녀올게.”

과자를 사 오는 것으로 노앵설을 달래고는 신발을 신었다. 사람 냄새 나는 안채를 지나 주차장에 있는 차에 타 약속 장소, 대학교로 향했다.

“바쁘신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가 부탁하는데 들어줘야죠.”

교수실로 들어가자 조선 시대사 교수, 서 교수가 소파에서 일어나 맞이해 주었다. 하람이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았다가 가지고 온 음료 선물세트를 건넸다.

“뭐 이런 걸 다 가지고 와요. 앉아요. 녹차랑 커피 있는데 마실래요?”

반색하는 서 교수에게 녹차가 좋겠다고 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래. 어떤 게 궁금해서 만나자고 한 거죠?”

서 교수가 보얀 김이 올라오는 종이컵을 하람의 앞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하람이 녹차를 짧게 마시고 내려놓았다.

“얼마 전에 어떤 한옥에 갔는데 그 집이 왕이 하사한 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왕이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서 교수를 만나기 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물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연행헌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한이 묶여 있는 연행헌을 통해 추적하기로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별다른 내용이 없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이전에 경첩 작업을 하면서 대들보를 찍어두었었다. 하람이 가지고 온 태블릿 PC를 꺼내 사진을 띄워 서 교수에게 내밀었다. 서 교수가 태블릿을 받아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교수님 혹시, 연행헌이라는 곳을 아시나요?”

“연행헌? 연행, 연, 아아, 저기!”

서 교수가 연행헌이 있는 쪽을 슬쩍 보았다가 다시 사진을 보았다.

“여기, 한자는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인데 날짜가…… 해종 때군.”

“……해종이요?”

인종, 세종. 성종 같은 왕을 말하는 건가? 의아함에 미간이 좁혀졌다. 서 교수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알려진 왕이 아니라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아, 그런가요?”

“어린 나이에 왕이 돼서 왕대비가 수렴청정했는데, 그 외가의 힘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가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엄청났어요.”

서 교수가 잡고 있던 태블릿 PC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스스로 정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는 외가가 궁을 다 장악한 상태였죠. 무얼 할 때마다 외가, 특히 외할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고, 독살의 위험에서 살아남기까지 해야 했어요.”

지금까지 국사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낯선 이야기를 녹차가 식어가는 것도 모르고 집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외가가 알아서 정치를 다 하니 뭐 할 게 있나. 자연스레 정치에서 멀어지고 방탕해졌죠.”

“그렇겠네요…….”

“매일 같이 놀고먹으면서 정치랑 거리가 있는 무관들이랑 어울렸어요. 그러는 동안 나라가 혼란하니 아래위로 외침(外侵)이 잦았어요. 눈치 봐야 할 것 많은 궁에 있는 것보다야 외침을 처리하는 게 좋았겠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죽으라고 보냈을 수도 있고. 선두에 서서 외침을 처리하고 다녔죠.”

“……왕이 선두요?”

당황스러움에 말문이 막혔다. 서 교수가 고개를 몇 번 주억이다 녹차를 마셨다.

“그래도 성격이 소심하지 않고 호전적이고 또 당대 최고의 무관이라고 불릴 만큼 능력이 좋아 매번 살아 돌아왔어요. 그래서 외침에서 승리하였다는 업적이 다수죠.”

이 정도면 왕이 아니라 무관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헛숨이 작게 터져 나왔다.

“궁에 있는 날보다 궁 밖에 있는 날이 더 많고, 특별한 업적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재위 기간까지 짧았는데, 능까지 도굴됐죠.”

“……예?”

놀랄 것이 더 남았을까, 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끝에 입이 크게 열렸다. 서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생전에는 외가에 묻혀 제대로 된 업적과 기록이 없고, 사후에는 능이 도굴돼 남은 게 없고. 이래저래 비운의 왕이죠.”

신하에게 집을 하사할 정도면 참 어질고, 인자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반전에 반쯤 얼이 나갔다.

무어라고 말을 못 하고 굳어 있다가 아, 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본명이나 외형에 대한 기록은 없나요?”

혹시나 하는 긴장감에 손에서 땀이 솟았다. 주먹을 약하게 그러쥐며 답을 기다리는데 서 교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영조와 같이 이름을 재위 내도록 감췄다고 해요. 그래서 밝을 현(炫)을 써 이현이라는 소리도 있고, 굳셀 한(僩)을 써 이한이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이한이요?”

설마 제가 아는 그 이한이 맞는 걸까. 놀라움에 호흡이 멈췄다.

“어진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생들이 남겼던 글에서 짧게 나옵니다. 아버지를 닮아 6척이 넘는 장신에 체격이 좋고, 사내다운 면모가 짙다고.”

해종이라는 왕이 하사했다는 연행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한, 이한이라는 본명, 6척이 넘는 장신. 설마…….

“하람 씨?”

“……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한에게 말해 봐야 할 것 같다. 하람이 어색하게 웃은 뒤 남은 녹차를 다 마셨다.

“바쁘실 텐데 이야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흔치 않아서 좋았어요.”

어서 빨리 이한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더 있을 수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선 서 교수에게 감사 인사 후 교수실을 나갔다. 실행 중인 녹음을 종료하며 급한 걸음으로 차에 갔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예상보다 빠르게 주차장에 도착했다.

가방을 챙겨 급하게 걷는데 별안간 바지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떠 있는 영진의 이름에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밖이야? 통화 괜찮아?

“응. 왜?”

- 아니, 일하는 사람들이 그러는데 며칠 전부터 대문이 자꾸 들썩거리고, 빗금 같은 게 간다는 거야. 그래서 봤더니 아니, 누가 손톱으로 긁은 것 같은 자국이 있더라고. 이런 거 메꾸는 게 있나 해서.

“내가 보고 처리할게.”

- 알았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했더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데 엄지에서 겉돌던 옥가락지가 슬쩍 빠지더니 이내 엄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게 왜…….”

자세를 낮춰 자갈 위로 떨어진 옥가락지를 집어 드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등골이 섬뜩했다. 온몸의 털이 서는 것 같은 불쾌하면서도 불안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숨을 삼키는 순간 촤악! 등이 할퀴어졌다.

“……윽!”

등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죽어 구천을 떠도는데, 어찌하여 너는 살아 있느냐?』

자갈 위로 맥없이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데 서러움이 느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가물거리는 시야에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이 보였다. 하람은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찌하여 내가 아니라 너 따위가 이곳에 살아서 숨쉬는 것이냐?』

하얀 자리옷 하나만 입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단아한 인상의 여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동시에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내가 아니라 너란 말이냐!』

여자가 벌건 피가 묻어 있는 손을 높게 들더니 달려들었다. 하람이 놀라 굳었다가 상체를 힘겹게 일으켜 세워 다급하게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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