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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70)화 (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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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황망해졌다.

망부석처럼 한참 멀거니 얼어붙어 있다가 그래도 이한이 연기가 되어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안도하며 차를 타고 펜션으로 돌아갔다.

이한이 걱정됐으나 그를 무작정 부를 순 없었다.

언제 부르는 게 좋을까, 그냥 집에 돌아가서 볼까, 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에 잠들 수가 없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하람아, 다움이 열 있어서 병원 가니까 그동안 할머니랑 같이 있어 줘.”

“알았어. 다녀와.”

멍하니 앉아 고민하던 중 영진이 차 키를 받으러 왔다. 하람이 기침하는 다움과 급하게 떠나는 영진 가족을 배웅한 뒤 순영이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네, 소리가 작게 나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람 님, 무슨 일 있습니까?”

침대 옆 스툴에 털썩 앉자마자 순영이 다소 급하게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얼굴빛이 안 좋습니다.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침울한 기색의 하람을 마주 보았다.

“아…….”

영진이 별말 없길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순영에게 바로 걸렸다.

사실대로 말하고 조언을 구할까. 순영이 걱정하면 어쩌지.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순영을 보며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한 님이, 기억을 일부 찾았어요.”

하람의 말에 순영이 숨을 크게 삼켰다. 하람이 마른침을 삼켰다.

“기억을, 얼마나 찾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육체가, 조금 돌아왔어요.”

“……육체가 돌아왔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을 사람처럼 질문하는 순영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렸다. 하람이 두 손을 깍지 꼈다.

“이한 님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았어요.”

마주한 순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였다. 하람이 고개를 약하게 숙였다.

충격에 말을 잃어버린 듯 순영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물음에 자연스레 생각에 빠졌다.

이한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답을 찾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이한에게 억지로라도 핸드폰을 줄 걸 그랬다. 그랬으면 이렇게 걱정만 하고 있진 않았을 텐데.

후회하고 있는데 이름이 작게 불렸다. 고개 들어 순영을 보았다.

“이한 님은 무어라고 하시던가요?”

“확인해 본다며 떠나시고 아직 못 만났어요.”

“그렇군요…….”

순영도 별다른 대책이 없는 듯 말을 더 덧붙이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고 생각에 빠져 있길 몇 분.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똑똑, 소리가 울렸다.

“할, 어, 뭐야 너 여기 있었어?”

문이 열리고 어두운 얼굴의 영진이 들어왔다. 하람이 몸을 돌려 영진을 보았다.

“병원에서 뭐라고 해?”

질문을 하기가 무섭게 영진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감기몸살이라네. 여기서 더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우리 먼저 돌아가려고.”

이한을 통해 다움이 아플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놀랐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고민하는데 지켜보던 순영이 영진과 하람의 이름을 불렀다.

“어린 다움 님이 아프다고 하는데 어떻게 더 남아 있을까요. 다 같이 돌아가요.”

그렇게 가족 여행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짐을 챙기는 순영과 영진을 돕고 나서 별채로 가 캐리어를 챙겨 나왔다.

차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이한이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건가.”

미래를 볼 줄 아는 이한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차에 탔다. 미안해하는 영진 가족에게 괜찮다고 하고 서울로 향했다.

* * *

“이한 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랑채로 가 이한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결국 책방채와 별당채, 사당채, 뒤뜰까지 살피는데 자리를 비운 건지 보이지 않았다.

『하람?』

다시 사랑채로 돌아가자 노앵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혹시 이한 님 어디 계시는지 알아?”

『안채에 갔어. 금방 온다고, 아! 왔다!』

이한이 안채? 하고 의문을 가진 그때 노앵설이 앞을 가리켰다. 몸을 돌리자 단정한 차림에 구두까지 신고 있는 이한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상한 곳 없이 멀쩡해 보인다. 안도감에 안도의 한숨이 나오다 못해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이런. 괜찮나?”

다급함과 초조함, 불안함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허리가 강하게 안겼다. 하람이 어느새 제 허리를 안고 내려다보는 이한을 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한 님은요? 이한 님은 괜찮으세요?”

“별일 없다.”

주저함이 느껴지지 않는 답에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 입꼬리 끝을 슬쩍 당겨 웃었다.

“그래. 여행은 잘 다녀왔나?”

여상한 물음에 제 예상대로 이한이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 다녀왔습니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이 부딪쳤다.

말랑하면서 눅눅한 혀가 입천장을 크게 핥더니 굳은 혀를 여상하게 휘감아 올렸다. 입술이 부드럽게 눌렸다가, 활짝 열렸다.

몇 번의 키스에 입안을 다 외우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헤집는 혀에 등골이 오싹오싹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하람이 이한의 셔츠를 부여잡는데 별안간 톡, 손에 무언가 닿았다.

키스에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이한의 얼굴 뒤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빗방울이 떨어진 걸까. 당장 비가 우수수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보다 지금 집 밖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람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이한을 강하게 밀어냈다. 물러나는 이한의 옆으로 서 있는 노앵설이 시야에 들어왔다.

“……맙소사.”

밖에서, 그것도 애 앞에서 입을 맞추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입이 크게 열린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고, 달아오른 얼굴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이, 이…….”

“뭐?”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는 이한의 얼굴에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아아!”

결국 벌건 얼굴을 두 손으로 덮고 도망치듯 집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달아나는 하람을 보던 이한이 옆에 있는 노앵설을 보았다.

“왜 저러는 거지?”

『모르겠어. 참, 내 선물!』

노앵설이 선물 사 왔냐고 외치며 툇마루 위로 올라갔다. 이한이 하람의 방문을 열려는 노앵설을 가볍게 들었다.

“내 선물이 더 급하니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라.”

『너무해!』

방해하면 혼을 낼 거라는 유치한 협박 후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닫았다.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누운 하람의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또 무슨 일 때문에 이리도 부끄러워하는 거지?”

가만 보니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뻘겋다.

꼭 피라도 몰린 것처럼 벌건 귓바퀴를 슬쩍 쓸자 하람이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어떻게 애 앞에서 입을 맞춰요!”

“노앵설이 겉으로 보기에는 애처럼 보이지만 너보다 한참 나이 많다.”

“그래도요!”

말을 하다 보니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오른다. 하람이 우는 소리를 내며 또다시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한이 피식 웃으며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노앵설이 별말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말을 잃었겠죠.”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에도 부끄러움이 줄어들지 않는다. 하람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불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쳤다.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 내가 잘못했다. 그만 얼굴 들어라.”

하람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한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니트를 입은 등을 길게 쓸었다. 하람이 움찔, 떨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계속 얼굴 안 보여 줄 건가? 응?”

장난기가 담긴 은근한 물음에 하람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하루 떨어져 있었어요.”

“무려 하루나 떨어져 있었지.”

능청스러운 말과 함께 베개에 눌려 발간 자국이 남은 이마에 입술이 길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일은, 잘 해결됐어요? 안채는 왜 가셨어요?”

아까부터 궁금한 것을 묻자 이한이 흠, 소리를 내더니 하람의 옆에 모로 누웠다.

“일은 무슨 일인지 장군이 명부 입구를 막고 있어서 못 갔고, 안채는 성주신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갔다.”

“……오도전륜대왕님 못 만났어요?”

“응. 기록도 딱히 없었다.”

뭔갈 알아내는가 했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하람이 입을 작게 벌린 채 멍해 있는데 이한이 머리를 받치지 않은 손으로 입술을 다물게 해줬다.

“기억도 기억이지만 내가 최근에 기운을 너무 억눌렀던 게 문제일 수도 있다.”

“아, 그래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한이 최근에 기운을 많이 억눌렀던 것이 생각났다. 아주 무시하지 못할 이유에 고개를 끄덕이다 아, 하며 모로 누워 마주 보았다.

“내일 오후에 조선 시대사 교수님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

여행하던 중 배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명한 조선 시대사 교수님을 설득했다고. 연락처를 알려 줄 테니 직접 연락해 보라는 말에 감사 인사 후 약속을 잡았다.

“오래는 못 만난다고 해서 교수님 뵙고 중서함미 처리하러 가면 될 것 같아요.”

“참 바쁘군.”

이한이 바쁜 것이 퍽 불만이라는 듯 미간을 잔뜩 구겼다. 어딘가 아이 같은 모습에 하람이 소리 내어 짧게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쉬잖아요.”

“그럼 오늘 하루 최대한 놀아야겠군.”

“왜 이렇게 놀지 못해 안달이에요.”

기억을 못 찾아서 안달이더니, 어째 놀 생각만 하는 것 같다.

싫은 건 아니지만 기가 막혀 웃으며 타박하자 이한이 웃는 낯으로 하람의 앞 머리카락을 슥 쓸어넘겼다.

“그러게. 왜 이렇게 놀고 싶을까.”

어디서 놀지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씐 걸까. 장난기 다분한 얼굴을 황당함을 담아 보는데 마주한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헛웃음을 터트리며 곧 부딪칠 듯 가까워진 입술을 밀어냈다.

“아까 했잖아요.”

“제대로 못 했을 텐데.”

아무래도 놀지 못해 죽은 귀신이 아니라 스킨십 못해 죽은 귀신이 씐 것 같다.

죽은 사람도 귀신에 씔 수 있나, 하고 생각하는데 입술이 맞닿았다. 입술 틈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혀를 따라 상체가 뒤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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