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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69)화 (6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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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에서 이한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이한이 무언가를 기억할지도 몰랐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거슬리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드는 이한을 두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재빨리 씻고 나왔다.

“오늘 하루는 쉬지 그래?”

“충분히 쉬었어요.”

자는 동안 입고 있던 셔츠가 다 구겨졌다. 캐리어에서 셔츠를 꺼내 갈아입는데 이한이 엄지로 창 너머를 가리켰다.

“비 오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좋았던 하늘이 잿빛이다 못해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져 내리고 있다. 셔츠 단추를 채우다 그대로 굳었다.

“감기 든다.”

아침에만 해도 좋았던 것 같은데. 황당해하는데 이한이 못다 채운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주었다.

“두꺼운 외투 있고, 우산 있어요.”

“준비성이 쓸데없이 좋아.”

무슨 일인지 불만이 있어 보인다. 하람이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코트를 입었다. 핸드폰과 차 키를 챙겨 별채에서 나갔다.

“누나. 할머니는?”

차로 가기 전. 혹시나 하고 독채로 가 순영에 관해 묻자 영진이 약 드시고 다시 주무신다고 알려주었다.

“나갈 건데 필요한 거 있어?”

“나간다고? 비 오는데?”

“잠깐 다녀오려고. 필요한 거 있으면 사 오고.”

“다움이 간식이나 사 줘.”

별일 없는 것 같다. 안도하며 차로 달려가 운전석에 앉았다. 곧바로 시동을 걸고 운전하다 펜션과 적당히 멀어지자 이한을 불렀다.

“이한 님, 혹시 화축관이나 영남루 아세요?”

“아니. 모른다.”

“영남루라고 화축관의 문루가 있는데 거기서 사진을 찍었더니 이한 님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내 목소리?”

“네. 거기 있지 말고 옆에 앉으라고 했어요.”

2, 30대로 느껴질 만큼 어리면서 또 어딘가 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는데 분명 이한의 목소리였다.

정면을 보던 시선을 돌려 이한을 힐끔 보았다. 이한이 생각에 잠긴 듯 침음하며 다리를 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이한에게 영남루에 대해 알려 주는 사이 천안 삼거리 공원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사람이 없네요.”

장우산 하나를 나란히 쓰고 걷는데 무슨 일인지 공원에 사람이 없다.

출입 금지 안내를 따로 못 봤는데? 하람이 의아해하자 그의 어깨를 감싼 이한이 남은 한 손으로 숲 쪽을 가리켰다.

“대신 사람이 아닌 것들은 많군.”

사람이 없는 탓인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를 개구리부터 들꽃, 목신이 많았다.

“그렇네요. 아, 저기가 영남루에요. 어때요?”

하람이 내리는 비에 기분 좋아 보이는 목신을 보다 영남루를 가리켰다. 이한이 늘어진 능수버들 아래에 자리한 영남루를 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기억이 돌아올까 했는데. 특별한 반응이 없다. 아쉬워하던 중 영남루 앞에 멈춰 섰다.

“여기에서 사진을 사진을 찍으니까 목소리가 들렸어요.”

하람이 잡고 있던 우산을 이한에게 넘겼다. 후우, 길게 심호흡하며 목에 걸고 있던 DSLR 카메라를 들었다. 굳은 얼굴의 이한을 짧게 보았다가 카메라 셔터 버튼을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안 들리네요.”

“흠.”

이한이랑 왔으니 들릴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무 일도 없다.

아쉬움에 몇 번이나 더 찍었으나 들리지 않는다. 결국 어깨를 늘어뜨리는데 이한이 우산을 넘기고 벗어났다.

왜, 하는데 쏟아지는 비를 지나 영남루 입구를 막고 있는 출입 금지 띠를 지나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 이한 님 거긴, 아.”

영남루 안에 들어가면 안 됐다. 다른 사람이 볼까 싶어 손을 뻗어 막다가 이한이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뭐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부끄러움에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어색한 헛기침이 나왔다. 손부채질하며 언제 비를 맞았냐는 듯 건조한 상태의 이한을 보다 처마 아래까지 갔다.

“글쎄.”

특별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이한이 딱히 없는 것 같다고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아무래도 기억과 연관 없는 것 같다.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다 이한과 시선이 부딪쳤다. 동시에 머리를 짚었다. 시야가 확 밝아졌다.

갑자기 빛이 쏟아진 것처럼 온통 하얗게 보였다. 눈이 부셔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데 어디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빛이 점점 약해졌다.

손을 내리자 영남루와 비슷한 정자와 도포 자락의 남자들, 트레머리를 한 여자들이 보였다.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지체가 높아 보였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여자들은 기생으로 보였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을 보는데 너머로 천천히 다가오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불투명한 검붉은 색 너울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주위에 있는 그 어떤 여자보다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뒤로 사람을 몇 명이나 거느리고 사뿐사뿐 다가오는 여자를 보는데 별안간 팔이 잡혔다.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표정이 안 좋구나.’

칼 같은 서늘함은 여전하지만 몇 살 어려 보이는 이한과 시선이 만났다.

이번에는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아니면 술에 취해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단풍나무에서 그랬듯이 무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보는데 입술이 제멋대로 열렸다.

‘분명, 이한 님의 사정을 알고 있고 또 마음을 알고 있는데…….’

듣는 것만으로도 우울한 목소리를 내는 입술이 지그시 깨물렸다.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

눈이 작게 일그러졌다. 그러면서 물기까지 고이려고 했다. 다급하게 이를 악물었다.

‘……내 일부러 널 데리고 왔는데, 아무래도 잘못한 거 같구나.’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양팔이 잡혔다. 몸이 약하게 당겨지는 순간 이한의 어깨에 옥가락지를 한껏 끼고 있는 고운 손이 닿았다.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여자가 정자 쪽을 힐끔 보았다. 이한이 드러내 놓고 혀를 찼다.

‘……하람아, 내 금방 갈 테니 먼저 가 있어라. 응?’

무어라고 하지 않고 고개를 약하게 끄덕이자 이한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놓았다. 지켜보던 여자가 이한의 팔에 팔짱을 끼며 기댔다.

‘제가 온다고 이리 먼저 나와 주시고. 정말이지 못 말리십니다!’

정자에 있는 사람들 다 들으란 듯이 소리를 높이더니 드리워진 너울을 시원스레 걷었다. 감춰진 여자의 얼굴을 본 하람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이는 것과 동시에 사위가 훅 어두워졌다.

“……어?”

기억에서 깨어나 비가 오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하람아!”

우산을 잡지 않은 손으로 눈물에 젖은 눈가를 짚은 채로 멍하니 앞을 보는데 이한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괜찮나? 왜 우는 거지?”

이한의 두 손이 하람의 얼굴을 감쌌다. 곧바로 엄지로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나오는 눈물을 반복해서 훔쳐 냈다. 하람이 상체를 숙여 저와 시선을 맞추는 이한을 응시했다.

“바, 방금.”

“그래.”

“구미호, 맞죠?”

이한에게 팔짱을 끼고 안쪽으로 이끌던 여자의 얼굴은 분명 구미호였다.

설마 하고 묻자 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약하게 주억였다.

“어떻, 어떻게…….”

구미호가 이한과 제 전생에 이렇게 가까이 관여되어 있을 줄이야. 그보다 이한과 구미호는 왜 같이 있는 거지? 두 사람의 관계는 도대체 뭐지? 가벼운 사이로는…….

“하람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없이 심각해지는데 이름이 불리고, 팔이 잡혔다. 하람이 어느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이한을 보았다.

“얼굴이 안 좋은데, 괜찮나?”

기억 속의 이한처럼 걱정하는 얼굴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네.”

괜찮다는 답에도 걱정을 거두지 않는 이한을 가만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생각하느라 멍했던 거예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얼굴이 별로인지 괜찮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결국 어색하게 웃었다.

기억의 여운이 남았는지 영남루 쪽을 보는 이한을 보다 먼저 몸을 돌렸다. 몇 걸음 물러나 영남루를 보았다.

“이것보다 더 컸던 거 같은데.”

기억 속 정자는 영남루와 구조가 비슷했으나 크기가 많이 차이 났다.

설마 훼손되기 전의 화축관인 걸까. 의심하는데 영남루를 보던 이한이 다가왔다.

“이…….”

이한에게 혹시 화축관을 아는지 묻기 위해 연 입술이 그대로 굳었다. 영남루 처마에서 벗어난 이한 또한 돌처럼 굳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한참 굳어 있던 이한이 눈에 띄게 덜덜 떠는 두 손을 얼굴 가까이 들었다.

손이 비에 젖었다.

그 누구의 기운이 담기지 않은 비에 젖은 손을 멀거니 보다 역시나 젖은 얼굴을 짚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없어 얼굴을 더듬는데 하람이 다급하게 달려와 우산을 받쳐 주었다.

“아, 아까는 안 젖었잖아요. 왜 갑자기 젖은 거예요?”

이한은 죽은 자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물에 젖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자가 아닌 이무기와 물귀신의 기운이 담긴 물에서만 젖었었다.

당황스러워 비에 푹 젖은 꼴로 굳은 이한을 보는데 넋을 놓고 있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정확하게 모르지만, 기억을, 어느 정도 찾아서, 그래서…….”

기억이 돌아오면서 육체도 함께 돌아왔다? 그렇다는 건…….

“이제 불사, 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럼 이제 연기가 될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회복력이 다 사라졌다는 걸까. 의아함에 묻자 이한이 반쯤 넋을 놓았다가 똑바로 섰다.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말이 끝나자마자 아무것도 없는 손에 검이 턱 잡혔다. 곧장 검을 조금 꺼내 날카로운 날을 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반듯한 미간이 와락 좁혀지는 순간 검은 액체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하람이 숨을 크게 삼키고, 이한이 검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폈다.

“……회복력이, 더 떨어졌군.”

그래도 붉은 피가 나오지 않는다고 안도하는데 검은 피가 계속 새어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떨어진 회복력이 더욱 떨어졌다는 사실에 하람이 기겁하며 제 손으로 덮었다.

“어, 어서 명부로 가세요. 가서 회…….”

이한은 죽은 자로 명부에 가면 회복이 빠르다고 했다. 그래서 어서 명부에 가라고 하는데 문득 명부에 갈 수 있나, 의구심이 들었다.

육체가 돌아왔으니 못 가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손이 잡혔다. 그리고 이한의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났다.

“확인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라.”

두려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과 함께 눈두덩이 위로 입술이 닿았다. 하람이 눈을 감았다가 뜬 사이 이한이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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