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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68)화 (68/87)
  • 68

    사람이었다면, 옆에 있었다면 이라니. 곧 꺼질 듯한 목소리로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을 하는 이한의 모습에 무언가에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람이 다급하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이한의 손을 가져와 꽉 잡았다.

    “대신에 이렇게, 옆에 있어 주잖아요.”

    이한과 사진을 같이 찍을 수도, 찍어 줄 수도 없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준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싶다고 해도 만나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이한 님은 바로 볼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더 좋아요.”

    이한과 할 수 없는 것이 많았지만 그만큼 좋은 점도 많았다. 하람이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이한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하람의 노력이 통한 듯 이한이 맥없이 웃었다.

    “그래.”

    이한의 씁쓸함이 풀린 것 같다. 하람이 씩 웃어 보이고는 카메라를 집었다.

    “사진은, 제가 한번 노력해 볼게요.”

    “영진은 혼자 잘 찍던데.”

    “알고 있었어요?”

    영진의 셀카 사랑을 알고 있을 줄이야. 의외라는 눈으로 보자 이한이 피식 웃으며 다시 하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말고는 내가 모르는 건 없다.”

    하람이 마치 모르는 것이 있어 보이냐는 듯 당당한 이한의 얼굴을 보다 목을 움츠렸다. 이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침대에 걸치고 있는 손에 얼굴을 괴고 이한을 빤히 응시했다.

    “옛날부터 저를 봐오셨으면서 궁금한 게 있어요?”

    본인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 신기한 눈으로 보자 이한이 똑같이 침대에 팔을 걸치고, 얼굴을 괬다.

    “네 정체부터 전생,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궁금한 게 많지.”

    이한의 손이 다시 한번 더 하람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감각에 하람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제 진짜 정체랑 전생은 저도 모르겠지만,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려드릴 수 있어요.”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환하게 켜져 있는 카메라를 껐다. 가만 바라보는 이한에게 손을 뻗었다.

    “또 하고 싶어요.”

    집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탓일까. 꼭 발정이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아쉽고, 부족하다.

    아쉬움에 이한의 맨어깨를 잡아 슬쩍 당겼다. 이한이 눈썹을 들었다가 순순히 당겨지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람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끔 떨어져 있어야겠군.”

    “농담이시죠?”

    “글쎄.”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차가운 손이 잘록한 허리에서 등허리를 지나 둔덕까지 미끄러지듯 쓸고 내려갔다. 곧 하람의 허벅지를 훌쩍 들었다. 그 상태로 허리가 당겨지면서 아래가 턱 맞붙었다. 하람이 아, 숨을 토해 내는 순간 입술이 삼켜졌다.

    * * *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가족 여행 3일째 날이 밝았다.

    이한을 보낸 뒤 약속 시간에 맞춰 독채로 가자 영진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황급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영진이 진정하라며 두 손으로 막아섰다.

    “이틀 동안 계속 걸으셨잖아. 몸살 나신 거 같아. 약 먹고 주무셔.”

    “아…….”

    순영은 나이가 있었다. 단순한 몸살이라도 크게 앓을 수 있고, 문제 될 수도 있었다.

    하람이 발소리 죽여 안방으로 들어가 자고 있는 순영의 옆에 앉았다. 조심스레 이마를 짚었다.

    “아, 할머니.”

    다행히 체온이 그리 높지 않다. 안도하는데 순영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제가, 체력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언젠가 농담으로 했던 말을 하는 순영을 보다 입꼬리를 슬쩍 당겨 웃었다.

    “아니요. 누나랑 매형, 다움이는 또 드러누웠어요. 할머니가 체력 제일 좋은 거 맞아요.”

    순영이 자책할까, 선의의 거짓말을 하자 순영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저런, 괜찮으신가요?”

    “네. 약 먹고 쿨쿨 자고 있어요. 저도 급하게 확인 필요하다고 연락 와서 일해야 하니 맘 편하게 쉬세요.”

    “……네. 알겠습니다.”

    순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하람이 열린 창문이 있는지, 바닥 온도가 따듯한지 확인한 뒤 일어났다. 소리 죽여 방에서 나갔다.

    기다리고 있는 영진에게 순영에 말한 것과 같이 말하고는 가려는데 문득 전생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 누나.”

    “어?”

    “딴 게 아니라, 혹시 전생을 믿어?”

    뒤늦게 묻자 영진이 눈매를 찌푸렸다.

    “갑자기 웬 전생?”

    “그냥.”

    “음…… 잘 모르겠는데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팔았다 같은 말은 몇 번 했어.”

    영진의 말에 하람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래.”

    “뭐야, 뭔데?”

    앞으로 영진에게 뭘 묻지 말아야겠다. 하람이 고개를 가로젓는데 영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뭔지 모르겠는데 이건 알겠다.”

    “뭐?”

    “너랑 나는 분명 전생에 원수였을 거야.”

    원수라니. 하람이 영진의 장난스러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지끈거리는 허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별채로 갔다.

    “음, 뭘 하지?”

    어쩌다 보니 하루 쉬게 됐다.

    부족한 잠을 잘까. 아니면 책을 볼까.

    하품을 크게 하며 양말을 벗고, 가방 속에서 책을 꺼냈다. 침대에 앉아 창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하늘을 보며 고민하다 벌떡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이한이 생각났다. 기도하듯 두 손을 하나로 모았다.

    “……이한 님.”

    보고 싶은 이한을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자 눈앞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곧 흰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검을 든 이한이 나타났다.

    “이번엔 정말 위험한 건가 했는데.”

    어제와 똑같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주변을 훑는데 너무나 평화롭다. 이한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람이 배시시 웃었다.

    “시간이 이르잖아요.”

    “못난 것들은 시간 가리지 않고 설쳐서 말이다.”

    이한이 검을 등 뒤로 홱 던지고는 하람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고개를 슬쩍 숙여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자꾸 부르면 내가 괜히 기대하게 되는데.”

    “무슨 기대요?”

    하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으며 침대에 앉았다. 따라서 앉은 이한이 하람을 빤히 보다 그가 끼고 있는 옥가락지를 매만졌다.

    “뭐, 그보다 여행은?”

    “아, 그게 며칠 열심히 걸었더니 할머니가 몸살에 걸리셨나 봐요.”

    “순영이? 많이 아픈 건가?”

    순영이 아프다는 말에 옥가락지를 빙빙 돌리던 이한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얼굴이 심각해졌다. 하람이 고개를 저었다.

    “쉬면 될 것 같다고 하셔서 오늘 하루 쉬기로 했어요.”

    “그래?”

    이한이 하람의 손을 잡은 채로 눈을 감았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가 어딘가 익숙한 상황에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눈을 감은 이한을 보며 눈뜨길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그래. 네 말대로 잘 움직이는군.”

    “누구요? 할머니요?”

    “대신 다움이 기침을 하는군.”

    “……다움이가요?”

    할머니가 괜찮아진다는 말에 안도하자마자 다움이 기침한다고 한다. 놀라 일어나자 이한이 손을 잡아당겨 앉혔다.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할 것 없다는 말에 긴장이 풀리며 굳었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하람이 침대에 풀썩 누웠다.

    “피곤해 보인다. 일정도 취소됐는데 맘 편하게 자라.”

    아쉬움에 새벽 늦게까지 어울렸더니 잠을 오래 못 잤다. 이한이 피곤함이 보이는 하람의 얼굴을 보다 앞 머리카락을 쓸었다. 하람이 힘없이 웃었다.

    “이한 님 계시는데 어떻게 자요.”

    “그래?”

    두 손으로 배를 짚고 웃는데 별안간 몸이 들렸다. 공주님처럼 안긴 바람에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이한의 어깨를 짚자마자 뒤통수에 폭신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목 아래로 딴딴한 팔이 길게 쑥 들어왔다.

    “이래도 안 잘 건가?”

    순식간에 침대에 반듯하게 눕혀졌다.

    하람이 제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갈무리하는 이한을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이한 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부른 건데 제가 자면 어떡해요?”

    “같이 있잖아.”

    이한이 어서 자라는 듯 목까지 채우고 있는 단추까지 몇 개 풀어 주었다. 이러다 자장가까지 불러 줄 것 같은 기세에 하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저를 재우지 못해 안달이신 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요?”

    왜 이렇게 못 재워서 안달일까. 의심과 장난기를 담아 묻자 이한이 피식 웃었다.

    “착각 아니다.”

    “저 재운 뒤에 가시려고요?”

    “아니. 조금이라도 체력을 키운 뒤에 오래 잡아먹으려고.”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커다란 손에 눈이 다 덮였다. 하람이 뺨을 붉혔다가 한 박자 늦게 가슴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정말 자도 돼요?”

    “제발 자라.”

    버티려고 했는데. 안 자면 혼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자는 모습을 이한에게 몇 번 보여 줬더니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속 편할 정도로 푹 잤다.

    “코는 골지 않았다만, 자꾸 파고들어서 정말 곤란했지.”

    혹시나 코를 골았을까. 잠에서 깨자마자 묻자 이한이 보고 있던 하람의 책을 덮으며 드러내 놓고 한숨을 쉬었다. 하람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그, 깨우지 그러셨어요.”

    “자는 놈을 덮칠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라서 말이야.”

    푹 잤더니 깨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하며 애써 깨는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들어 이한을 보았다.

    “……저 자는 동안 뭐 하셨어요?”

    또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조심스레 묻자 이한이 등허리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꺼내 놓은 책을 봤다가, 자는 모습을 봤다가, 신령의 이야기를 들었다가. 나름 바빴다.”

    “신령? 아, 그 오도전륜대왕님이 말한 원귀 찾았어요?”

    “찾은 건 아니고.”

    하람이 이한의 기억을 쫓는 동안 이한은 지네 각시와 신령, 차사 등을 통해 오도전륜대왕이 말한 원귀를 쫓았다.

    알아낸 것이 있을까. 뒷말을 기다리다 불현듯 영남루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듣자 하니 백발이 성성한 나이 든 남자인데 신체가 그리 멀쩡하지 않다고 하더군.”

    “신체요? 장애가 있다는 건가요?”

    영남루에서 있었던 일을 하려는데 원귀에 대해 말한다.

    그나저나 장애라니. 병원에서 보았던 잡귀와 비슷한 상태인 걸까. 다리를 절고, 팔을 늘어뜨리고 있던 잡귀를 생각하는데 이한이 흠 소리를 냈다.

    “살아생전에 큰 죄를 지어 죽었는지 목이 잘린 것 같던데.”

    목이 멀쩡하지 않은 데도 잡귀들을 선동하고 다닌다는 건가. 도대체 무슨 한이 있길래?

    그보다 목이 잘렸다면 잘린 얼굴을 들고 다니기라도 한다는 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

    과거 목이 잘렸던 인물이 몇몇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군지 생각하는데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따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한의 손을 잡았다.

    “저랑 데이트하러 가지 않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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