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66)화 (66/87)

66. #06. 한 한(恨)

“하람 님,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날씨가 좋았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에 길게 늘어진 능수버들 잎과 이름 모를 잎사귀들이 살랑였다.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풍경을 찍던 하람이 아, 하고 뒤를 보았다.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순영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여기 처음 와 봤는데 좋네요.”

“그러게요. 풍경이 참 보기 좋습니다.”

순영이 방금까지 하람이 보고 있던 풍경을 멀거니 응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람이 한 걸음 물러나 순영을 찰칵, 찍었다.

가족 여행으로 천안에 왔다.

천안 명물이라는 호두과자를 먹었다가, 리각 미술관을 관람했다가, 빵돌가마 마을을 둘러봤다가. 여기저기 둘러본 뒤 숙소로 가던 중 영진이 전부터 먹고 싶었던 것이 있는데 다녀와도 되냐고 말해 왔다. 영진 가족이 다녀오는 동안 하람은 순영과 천안 삼거리 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할머니, 벤치에서 잠깐 쉴까요?”

급하게 찍었는데 사진이 퍽 맘에 든다. 사진을 지우지 않고 순영의 곁으로 다가가 보여 주었다. 사진을 본 순영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그럴까요?”

공원 입구에서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하람의 제안에 근처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물 있는데 드릴까요?”

“혹 따뜻한 것도 있습니까?”

“따뜻한 녹차 있어요.”

공원에 오기 전, 영진에게 이것저것 많이 넘겨받았다. 계속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가져와 안에 든 보온병과 종이컵을 꺼냈다. 순영에게 먼저 건넨 뒤 저도 보얀 김이 올라오는 녹차를 조심스레 한 입 마셨다.

“풍경이 좋아서 그런지 이렇게 마시는 것도 좋네요.”

종이컵을 마치 찻잔처럼 쥔 순영이 순하게 웃었다. 녹색 능수버들 잎과 갈색 갈대 너머에 있는 현소각을 보던 하람이 순영을 보았다.

“앞으로 자주 와요.”

서울과 천안은 그리 멀지 않았다. 순영이 또 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올 수 있었다.

넌지시 말하자 순영이 대답 대신 늘 짓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하람 님, 마음이 무척 편해 보입니다.”

“저요?”

“네. 기운도 좋아 보이시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좋은 일이라. 뭘까, 하고 생각하다 얼마 있지 않아 요 며칠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자연스레 배시시, 웃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이한 님이 이전만큼 불편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이한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네가 뭔데 우리 할머니한테 말을 놓냐,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었는데. 있는 대로 정색하던 사이에서 어느새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사이가 됐다.

몰랐던 사실을 하나 둘 알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같이 지내면서 편해져서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전생 때문일까. 하람이 홀린 듯이 엄지에 끼고 있는 옥가락지를 매만졌다.

“……예전에는 마냥 불편했었는데.”

아무 일도 없는데 기다리고 있을 이한을 부르고 싶다. 이 좋은 풍경을 함께 보고 싶다.

옥가락지를 매만지며 이한을 생각하다 저, 하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할머니는, 혹시 전생을 아세요?”

하람을 가만 보던 순영이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모릅니다.”

이한에게 들었을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한은 과거를 볼 수 있지만 전생까지는 볼 줄 몰랐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할머니는 현생이 전생과 같거나, 연관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전생이요? 글쎄요…….”

순영이 풍경을 보며 길게 침음하다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없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이한에게 묻는 수밖에 없는 걸까. 소리 없이 한숨을 푹 쉬려던 하람이 놀라 순영을 보았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여러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지요.”

순영이 얼마 남지 않은 녹차를 모두 다 마셨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전생에 지은 죄로 혹은 전생에 했던 선행으로 인생이 달라진 이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 정말요?”

“네. 그리고 지독한 악귀에게 시달리는 자 중에서는 전생에 죄를 지은 나머지 현생에서 그 죗값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순영이 하람을 보며 웃었다.

“하람 님, 은혜 갚은 동물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은혜 갚은 동물이요? 그 까치랑 두꺼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몇몇 동물은 대를 이어 은혜를 갚기도 한답니다.”

“와…….”

간혹 동물이 사람보다 낫다고 하더니. 감탄하는데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잘게 떨었다. 그리고 멀리서 “왕 할머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와, 여기 좋네.”

“할머니도 맘에 들어 하셨어.”

영진 가족이 왔다. 하람이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영진과 팔짱을 끼고 걷는 순영부터 형부와 네잎클로버를 찾는 다움,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을 빠짐없이 찍었다.

그렇게 일행의 맨 뒤에서 사진을 찍으며 뒤따르던 중 카메라 렌즈에 영남루(永南樓)가 보였다. 이끌리듯이 다가갔다.

“아. 출입 금지네.”

지붕 안쪽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멀거니 서서 보다 안내 표지판을 뒤늦게 발견했다.

화축관의 문, 역대 왕의 온양온천 행차 시 임시 거처, 현재 문루인 영남루만 남아…….

“역대 왕의 임시 거처로 사용했던 곳이라.”

단순한 누각인 줄 알았는데, 무려 왕의 임시 거처라는 말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한이 왕일지도 몰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혈을 기울여 초점을 잡고 찰칵, 찍었다.

‘거기 있지 말고 이리, 내 옆에 앉아라.’

시야가 순간적으로 반짝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어떤 장면이 짧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한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어?”

마치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들은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뭔가 싶어 굳었다가 황급히 내렸던 카메라를 들었다. 다시 한번 더 영남루를 찍었다.

“……뭐야.”

찰칵! 셔터음이 들렸는데 이한의 목소리와 환상이 보이지 않는다.

“뭐해?”

“……아!”

반쯤 쫓기듯이 다시 찍고 또 찍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카메라를 높게 들었다가 눈을 끔뻑이고 있는 영진의 모습에 카메라를 든 손을 내렸다.

“……깜짝이야. 사진 찍고 있었어. 왜?”

“뭐 있어? 할머니 피곤해 보이니 이만 가자고.”

“아, 응.”

진짜 환상이었던 걸까. 하람이 아무도 없는 영남루를 힐끔 보았다가 영진을 뒤따랐다.

가족 여행 첫날은 온천을 위해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매형, 정말 죄송한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괜찮으니까 어서 자요.”

특별히 뭘 한 것도 없는데 호텔 룸에 도착하자마자 피곤함이 쏟아졌다. 하람이 매형에게 양해를 구하고 침대에 누웠다. 편히 자라고 하고 룸을 나가는 매형을 뒤로하고 잠에 빠졌다.

* * *

“우리 중에서 할머니 체력이 제일 좋으신 것 같아요.”

“그런가요?”

일찍 잤더니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가족들을 만나기 전, 아침 일찍 문 여는 카페에 가 커피와 차를 사 왔다. 그러고는 호텔 입구에서 가족들이 오길 기다리는데 무슨 일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매형과 영진에게 전화했더니 어제 무리했는지 완전히 나가떨어진 모양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듯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결국 쌩쌩한 순영과 단둘이 차에 탔다.

“여기 유자차 드세요.”

순영에게 마시기 딱 좋을 정도로 식은 유자차가 든 테이크 아웃 잔을 건넸다. 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도 준비해 주시고. 아침부터 바쁘셨겠습니다.”

“어제 일찍 잤잖아요. 그럼 각원사 갈까요?”

“네. 좋습니다.”

여행 계획을 짤 때 순영이 각원사에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내비게이션에 각원사를 입력하고 출발했다.

절에 도착하고부터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 탓인지 마음이 편해졌다.

걸음이 느린 순영을 따라 느릿하게 절을 둘러보며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잊지 않고 순영이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후로 태조산 정상에 올라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쉬었다가 내려가 차에 탔다.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제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름다운정원 화수목에 가기 전 미리 봐두었던 산채비빔밥 전문점에서 밥을 먹는데 영진 가족이 왔다.

“미안하면 이거, 누나가 사고 커피도 사.”

“……그래. 할머니도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장난삼아 말했는데 영진이 정말 밥을 산다고 한다. 하람이 오, 하고 말하는데 순영이 하람을 보았다가 영진을 보며 웃었다.

“그럼 하람 님 따라서 저도 차를 사 주시겠습니까?”

순영답지 않은 농에 하람과 영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내 더 큰 걸 요구해라, 네가 뭔데 끼어드냐 하고 다퉜다.

그렇게 공짜 밥과 커피를 얻어 마시고 아름다운정원 화수목과 천흥 저수지를 둘러본 뒤 장을 봐 펜션으로 갔다.

“삼촌, 삼촌.”

저녁으로 소고기에 비빔면, 술을 마시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알차게 먹었다. 설거지를 해도 여전히 부른 배에 뒤뜰로 가는데 다움이 다급하게 부르며 다가왔다.

“응, 다움아.”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에 발걸음을 멈추고 다움에게 맞춰 쪼그려 앉았다. 가까이 온 다움이 주변을 훑더니 하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노앵설이랑 또 언제 놀 수 있어요?”

급하게 할 말이 뭘까 했는데. 단순한 물음에 하람이 다움 모르게 소리 죽여 웃었다.

“노앵설이랑 놀고 싶어?”

“네. 노앵설이랑 하려고 게임기도 샀어요.”

어서 빨리 노앵설이랑 놀고 싶다는 듯 다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지켜보던 하람이 다움의 머리를 쓰다듬고 일어섰다.

“얼른 놀 수 있게 해 볼게.”

“꼭 이예요!”

다움이 신나게 떠났다. 하람이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이한과 있는 동안 흡연을 하지 못했다. 펜션 독채와 별채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아 오랜만에 담배를 꺼냈다. 입으로 가까이 가져가는데 별안간 야! 하고 등을 퍽 소리 나게 맞았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얼굴이 와락 구겨지고, 잡고 있던 담배를 놓쳤다. 하람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뒤를 보았다.

“……하. 살살 좀 때려.”

“왜 이렇게 허약해?”

영진이 킥킥 소리 내어 웃으며 하람의 앞에 섰다. 하람이 한숨을 길게 쉬며 떨어진 담배를 주웠다.

“왜?”

“별건 아니고. 너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