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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65)화 (6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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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가 볼게요!』

    초코 프라페가 얼마나 맛있고, 단지를 신나게 말하는 차사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별 탈 없이 무사히 집에 오는 것을 끝으로 오늘 할 일이 다 끝났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이한에게 소리 높여 인사한 차사가 하람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하람이 다음 주에 뵙자고 하고 인사했다.

    『아, 맞아. 이거요.』

    차사가 바지 주머니에서 끈이 달린 작은 호루라기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에 귀신들이 싫어하는 제 기운이 스며 있어요. 도움 될 거예요. 그리고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할 때 부세요. 다른 일 다 제쳐놓고 바로 올게요.』

    갑자기 웬 호루라기인가 했는데. 하람이 차사의 배려에 은색 호루라기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쓰고 돌려드릴게요.”

    차사가 장난꾸러기처럼 웃고는 훌쩍 떠났다.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사랑채 뒤뜰 쪽에 있는 사당채로 갔다.

    “안녕하세요. 또 왔어요.”

    하람은 이한과 다니면서 여러 원귀와 악귀를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중 원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거나,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영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들을 그저 떠나보내기 안타까웠던 하람은 고민 끝에 순영의 도움을 받아 사당채 한편에 그들을 위해 자리를 작게 마련했다.

    가지고 온 목줄을 꺼내 조심스레 두었다. 향로에 향을 꽂고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 후 사당채에서 나갔다.

    『하람! 어서 와!』

    사랑채에 가자 늘 그랬듯이 노앵설이 환하게 반겨 주었다. 노앵설에게 카페에서 산 간식을 안겨준 뒤 씻고 나왔다.

    피곤함에 하품하며 방으로 돌아가다 빛이 슬며시 새어 나오는 이한의 방이 발걸음을 잡았다. 하람이 짧은 고민 끝에 방문을 노크했다.

    “뭐 하고 있으셨어요?”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턱에 앉아 있던 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찻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람이 방석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차 마시겠냐고 하며 맞은편에 앉는 이한을 보다 참, 하고 운을 뗐다.

    “신입 차사가 호루라기를 줬어요.”

    잠옷에 숨겨진 호루라기를 꺼내 미간을 좁히고 있는 이한에게 보여주었다.

    “어쩐지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니.”

    “냄새요?”

    호루라기에서 냄새가 날 수 있나. 의아함에 호루라기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으나 이상한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것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있다.”

    “아.”

    “도움 하나 안 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이한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가 차 마시겠냐고 물었다. 호루라기를 갈무리하던 하람이 양치했다고 하며 거절했다. 곧 묵직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퍼졌다.

    소리 없이 천천히 차를 마시는 이한을 가만 보는데 귀에 톡, 톡 작은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창 너머를 보았다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였다.

    내일 여행 가는데 비가 온다. 하필이면, 하고 생각하다 이한을 보았다.

    “당분간 저 없으니 심심하시겠네요.”

    내일부터 3박 4일 여행을 떠난다. 그 탓에 최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움직였다. 하람이 웃음기를 담아 말하자 이한이 입가에 댄 찻잔을 살짝 떼어 냈다.

    “그러게.”

    “저 없는 동안 뭐 하고 지내실 거예요?”

    또 술 마시고, 담뱃잎 태우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를 적으며 시간을 보낼까. 백수가 따로 없다고, 놀릴 준비를 하는데 이한이 차를 한 입 마셨다.

    “네 생각을 하며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겠지.”

    예상하지 못한 답에 머리와 당장 놀릴 준비를 하고 있던 입술이 어색하게 굳었다.

    네 생각을 하며 기다린다니. 태연자약하게 차를 마시는 이한을 멀거니 보던 하람이 한 박자 늦게 어, 하고 입을 열었다.

    “그, 그렇구나.”

    별것 아닌 말 같은데 무슨 일인지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차를 마신 것도 아닌데. 흠흠, 어색하게 기침했으나 통 가라앉지 않는 열기에 약하게 손부채질했다.

    “……가만 보면 이한 님, 부끄러운 말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 아세요?”

    분명 부채질을 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얼굴이 더 붉어지는 것 같다. 결국 부끄럽게 만든 이한을 타박했다.

    “질문에 사실대로 답한 것뿐인데 무어라고 하는군.”

    차를 마시던 이한이 짐짓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 진짜…….”

    타박하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저를 놀리려고 작정을 한 건지 사실이라는 부끄러운 말을 또 한다.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하람이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왜 그리 부끄러워하지?”

    숨을 참았다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가. 열심히 딴짓하며 열기를 가라앉히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람이 얼굴을 가리는 손을 슬쩍 내렸다.

    “……부끄럽잖아요.”

    “어디가?”

    이한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람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 기다린다는 거, 사실이라는, 기타 등등이요.”

    직접 말하는 것도 부끄럽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끝을 구부리며 으으 소리를 냈다.

    “별게 다 부끄럽군.”

    슬그머니 내려왔던 손이 또 올라갔다. 얼굴이 다 가려졌다. 지켜보던 이한이 헛웃음을 짧게 터트리며 찻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입 맞출 때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의 물음에 손에 가려진 하람의 얼굴이 곧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 얘길 왜 하세요!”

    부끄러운 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키스를 꺼낸다. 놀라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내리며 다급하게 소리치자 이한이 눈매를 찌푸렸다.

    “살 맞대는 건 괜찮…….”

    “아니, 말씀을 왜 이렇게 이상하게 하세요!”

    단어가 너무 노골적이다. 이대로 두면 더한 말을 할 것 같고, 얼굴이 펑 터질 것 같다. 하람이 몸을 반쯤 날려 태연자약하게 떠드는 이한의 입술을 두 손으로 내리눌렀다.

    이제는 말하지 않을까. 입술을 내리누르며 숨을 고르는데 이한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곧 입술을 누르고 있는 손에도 무어라고 말했다. 하람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슬그머니 손을 떼어 냈다.

    “또 이상한 말 했죠?”

    손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눈을 가늘게 해서 묻자 이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부터 이상한 말 한 적 없다.”

    “노골적인 단어 쓰셨잖아요.”

    “그럼 섹…….”

    “그만!”

    노골적인 단어를 말하지 못하도록 막았더니 더 심한 단어를 말하려고 한다. 못 참고 크게 소리쳐 막으며 입술을 재차 틀어막는 순간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우리 둘뿐인데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거지?”

    이한의 가슴으로 쏟아지듯 넘어졌다. 단단한 가슴에 코가 부딪쳐 끙 소리를 내는데 몸이 위로 쑥 들리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는 성격인가?”

    아프고, 부끄러워 죽겠는데 시야에 보이는 이한의 얼굴이 너무나 여상하다. 위에서 이한을 내려다보던 하람이 코를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둘뿐이라고 해도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부끄러운 것도 많군. 그럼 여기서 자고 가라는 말도 부끄럽나?”

    또 부딪칠까. 이한의 가슴을 짚고 상체를 드는데 허리가 안겼다. 그리고 은근하면서 직설적인 물음이 들렸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며칠 동안 못 만나는데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여기서 자라.”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자 등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렵게 들었던 상체가 내려가 이한의 어깨에 뺨이 닿고, 품에 가볍게 끌어안겨졌다.

    “응?”

    재촉과 함께 귀에 입술이 닿았다. 하람이 움찔, 떨었다가 한숨을 푹 쉬며 늘어졌다.

    “……진짜 아무 짓도 안 하시면 그냥 갈 겁니다.”

    이한의 말대로 여행으로 며칠 못 만난다. 이대로 잠들기 아쉬웠다.

    아쉬움을 넌지시 드러내자 이한이 웃는지 맞닿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곧 차가운 손에 턱 아래가 들리고, 입술이 부딪쳤다. 열린 입술 틈 사이로 척척한 혀가 스르륵 넘어왔다.

    입안 곳곳을 느릿하게 유영하는 혀에 앓는 소리가 작게 나왔다. 그 순간 몸이 옆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하람이 이한의 상박에 머리를 기대며 그가 입고 있는 도포 자락을 옆으로 치워 냈다. 드러난 미끈한 허리를 잡아 약하게 당기며 허벅지 위로 제 다리 한쪽을 걸치듯 두었다. 동시에 잠옷 바지가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잠들면 혼낼 테니 그리 알아라.”

    조금도 무섭지 않은 경고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얕게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추워 보인다. 외투 입어라.”

    “예?”

    방에서 캐리어를 끌고 툇마루로 나오자마자 바지만 입고 있는 이한에게 손이 잡혔다. 그대로 방으로 다시 이끌려 갔다. 곧 어서 입으라는 듯 내밀어진 카디건에 어어, 하고 팔을 꿰어 넣어 입었다.

    순식간에 몇 개 없는 단추가 모두 채워졌다. 만족하고 나가는 이한을 뒤따라 툇마루로 나가는데 하품이 삐죽 나왔다. 쩌억 벌어지는 입술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이렇게 피곤해할 줄 알았으면 일찍 재울 걸 그랬군.”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는데 그걸 봤는지 이한이 혀를 찬다. 하람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노앵설에 놀라 급하게 이한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애가 들어요.”

    이한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내 웃으며 하람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잊었나 본데 노앵설은 인간이 아니고, 이 집에 노앵설만 있는 게 아니다.”

    “네? 그게 무, 아…….”

    어딘가 의미심장한 말에 하람의 말끝을 흐려지고,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이한이 피식 웃으며 잡고 있는 왼손을 들었다.

    “차사가 준 것만으로 버티기 어려울 때가 있을 거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 가능하면 계속 끼고 있어라.”

    하람의 엄지에 얇은 옥가락지가 끼워졌다. 하람이 은은한 물빛 옥가락지를 빤히 보다 이한을 보았다.

    “이거, 뭐예요?”

    “유소는 거슬리니까.”

    신입 차사가 호루라기를 줘서 유소를 안 주는 건가 했는데. 의외의 물건에 말을 잃었다가 한 박자 늦게 웃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잘 놀고, 무슨 일 있으면 불러라.”

    “네. 저 없다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의 이한을 두고 캐리어를 들었다.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노앵설과 우렁 각시, 우렁 도령에게 인사 후 안채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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