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63)화 (6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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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사례금을 받아 가게. 만나는 게 불편하고, 답장하는 게 귀찮다면 계좌 번호만이라도 보내 주게.]

누군가 했더니. 배 교수가 사례금을 받을 계좌 번호를 알려달라는 문자를 또 보내 왔다.

“……와, 교수님 진짜 끈질기시네.”

사례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매일 같이 문자를 보내 온다. 전공 교수님으로 만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다 ‘교수’에 한 생각이 번쩍 들었다.

“교수님 전공이 뭐지?”

교수님이라면 한국사에 대해 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내려놓았던 노트북을 다급하게 다시 들었다. 한 번 갔었던 대학교에 접속해 배 교수님을 검색했다가 외교학부에 맥이 빠졌다.

“어떡하지. 한 번 여쭤볼까.”

고민 끝에 핸드폰을 들었다. 방금 온 문자로 전화했다.

- 오, 하람 군! 드디어 계좌 번호를 줄 생각이 들었나?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 편하게 말하게.

배 교수님이 불편해하실 수도 있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혹시 한국사 관련 전문가를 아시는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사례금 대신에 같은 대학에 있는 국사학과 교수님을 만나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데 배 교수가 한국사? 하고 물었다.

- 한국 현대사를 말하는 건가?

한국 현대사는 뭘까. 알지 못하는 단어에 당황스러워졌다.

“음, 그러니까…… 조선 시대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인물에 관해 알고 싶어서요.”

- 그렇다면 조선 시대사로군. 뭐, 자문이 필요한 건가?

“자문까지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내용이라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요.”

- 알아보고 내가 연락하겠네.

“바쁘실 텐데 감사합니다.”

다행히 통화가 불편하지 않게 잘 끝났다. 하람이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대감을 안고 국사학과 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훑다가 빨간 단풍나무 아래에서 브이를 하고 있는 학생들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뒤뜰에 안 가 봤네.”

지금 지내는 연행헌은 이름에 ‘행’이 들어가는 만큼 뒤뜰에 은행나무가 많았다. 철이 되면 노란 장관이 펼쳐졌다.

“오랜만에 가 볼까.”

창밖을 보자 날이 선선했다. 셔츠와 면바지 차림 그대로 태블릿 PC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하람이 어디 가?』

방에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앵설이 달려왔다. 하람이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행나무에 가려고.”

『나도 갈래!』

“그럴까?”

태블릿을 노앵설에게 넘기고 노앵설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저기…….』

꺄아, 소리 내며 좋아하는 노앵설을 조심하며 신발을 신는데 부엌 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 돌렸다가 문 너머로 삐죽 나와 있는 연분홍색 보자기를 발견했다.

『가, 간단하게 준비해 봤어요. 드세요.』

어쩐지 소풍 가는 것 같다.

짧게 다녀오려고 했는데. 하람이 우렁 각시가 내밀고 있는 조금 묵직한 보자기를 챙겼다. 조심조심 뒤뜰로 걸었다.

요괴와 귀신들도 날이 좋아 소풍 나온 듯 평소보다 많이 보였다.

인삼같이 생긴 동자삼부터 두꺼비 모습의 업신, 작은 참새 같은 마명조, 보송보송해 보이는 충기여서 등. 환한 햇살 아래에서 옹기종기 모여 노는 모습들을 보며 걷다 보니 뒤뜰에 도착했다.

“와…….”

연행헌의 뒤뜰에는 신목(神木)이라고 불릴 만큼 아주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얼마나 큰지 성인 남성이 두 팔을 다 벌려도 안을 수 없을 만큼 굵고,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연행헌만큼이나 나이 든 은행나무와 그 아래에 감히 셀 수 없을 만큼 샛노란 은행잎이 가득하다. 햇살에 황금빛으로 보이는 광활한 샛노란 풍경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강아지!』

몰랐는데 등 뒤로 강아지와 고양이가 잔뜩 따라왔다.

뒤따라온 강아지를 발견한 노앵설이 신났다. 노앵설을 내려 주고 태블릿을 건네받았다. 노앵설이 꺅꺅거리며 노란 은행잎 위를 맨발로 내달렸다.

신나게 노는 귀신과 요괴들을 뒤로하고 태블릿과 핸드폰을 들었다. 언제 봐도 멋진 은행나무와 주변 풍경을 열심히 찍었다.

한참 찍었더니 갤러리가 온통 노랗게 변할 만큼 사진을 찍었다. 만족하며 은행나무 아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우렁 각시가 챙겨 준 보자기를 펴 식혜와 떡, 꽃 모양 약과 따위가 있는 접시를 꺼냈다.

“진짜 소풍 온 거 같네.”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그림 같은 풍경과 단 주전부리까지. 정말 서울 외곽으로 소풍 온 것 같아 기분 좋아졌다.

“끄으응.”

하람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다리를 길게 펴고 고개를 젖혀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벚꽃잎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은행잎 비에 눈을 슬쩍 감았다.

이름 모를 꽃향기와 풀냄새가 맡아졌다. 그리고 노앵설의 귀여운 웃음소리와 처마 끝에 달린 풍경, 잎사귀가 살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더없는 편안함에 하품이 나왔다. 하람이 시원스레 하품한 뒤 감은 눈을 떴다. 멀리서 동물들과 놀고 있는 노앵설과 주변을 훑었다.

“음, 짧게 잘까.”

한숨 자기 딱 좋은 상황이다. 목을 울리며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답답한 신발을 벗었다.

지금 있는 곳은 길거리나 공원이 아니었다. 외부인은 올 수 없는 사유지이면서 외인은 함부로 올 수 없는 사랑채 뒤뜰이었다.

맘 편하게 양말까지 벗었다. 신발 속에 양말을 쑤셔 넣고 은행잎이 겹겹이 쌓인 잔디에 벌러덩 누웠다. 한 번 더 하품하며 눈을 감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글자를 보고, 영상을 보았다. 피곤함에 가만 늘어져 자는데 사박, 사박. 작은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있나 했더니. 사랑채에 없으면 꼭 여기에 있구나.’

웃음기가 스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허리에 손이 닿았다. 곧 몸이 옆으로 살며시 돌려지며 감색 도포에 상투를 틀고 있는 이한과 시선이 부딪쳤다. 동시에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던 이한의 입가가 일자로 확 굳었다.

‘너, 누구지?’

“……헉!”

마치 낯선 사람을 본 것처럼 급속도로 써늘해진 시선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무슨 일이지?”

크게 뜨인 눈에 조금 전에 보았던 이한보다 마른 것 같은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하람이 걱정 어린 얼굴을 멀거니 응시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이한 님 맞으시죠?”

“이상한 꿈을 꿨나 보군.”

이한이 혀를 짧게 차고는 하람의 앞 머리카락을 거둬 내고 이마를 짚었다. 하람이 이마에서부터 사르르 번지는 서늘함에 긴장한 몸에서 힘을 뺐다.

“언제 오셨어요?”

“얼마 안 됐다.”

맥없이 축 늘어지다 제가 지금 이한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당황스러웠다가 그리 나쁘지 않아 가만있었다.

“방금 꿈인 건지 아니면 전생인지 모를 것을 봤어요.”

“그래?”

“네. 여기 서 있던 저한테 이한 님이 와서 제게 인사를 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정색하셨어요.”

“네 얼굴이 못나서 놀랐나 보네.”

“……저 지금 심각해요.”

혹시나 전생일까. 방금 보았던 이한에 대해 진지하게 공유하는데 이한이 놀린다.

자기가 잘생겼다고 얼굴로 놀린다. 참지 못하고 드러내 놓고 정색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으니 그만 얼굴 풀어라.”

이한이 피식 웃으며 슬쩍 삐져나온 하람의 입술을 손끝으로 지그시 내리눌렸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나온 입술을 바로 했다.

“아무튼. 저랑 눈 마주치자마자 누구냐고 했어요.”

마치 예상과 다른 사람을 본 것처럼.

짧게 보았던 이한의 얼굴을 생각하는데 현실 이한이 흠, 소리를 냈다.

“전생과 꿈이 섞인 건가.”

“그럴 수도 있어요?”

“글쎄. 처음이라 모르겠군.”

이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 잠깐 보았던 이한의 차림을 말했다.

“상투에 도포?”

“네. 도포가 참 좋아 보였어요.”

“못살지는 않았나 보군.”

본인의 과거일지도 모르는데 평가가 박하다. 하람이 허공에서 장죽을 꺼내고 입에 무는 이한을 보며 고개를 젓다가 아, 하고 바로 앉았다.

“저 귀신 나온다고 알려진 곳 몇 군데 찾았어요.”

경수를 통해 공포물 쓰는 작가님이 챙겨 본다는 공포 전문 너튜버를 몇 명 알게 됐다.

무속인들이 기도하러 간다는 장소, 귀신이 목격됐다고 알려진 스폿, 아는 사람만 안다는 괴담. 이것저것 보고 괜찮아 보이고 또 겹치는 몇 곳을 메모해 두었다. 하람이 한쪽 눈썹을 훅 드는 이한을 보며 웃었다.

“이거 다 먹고 가요.”

곧 가족 여행을 갔다. 그동안에 일을 못하는 만큼 미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을 다시 시작하면 지금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고. 하람이 다소 황당한 기색의 이한을 보았다가 우렁 각시가 챙겨 준 간식을 먹었다.

* * *

잠시 멈췄던 악업 줄이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했다.

자꾸 문이 열린다는 병원, 세입자가 자꾸 아파서 나가는 집, 밖에서 손자국이 찍힌다는 터널,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흉가. 평소라면 절대 가까이하지 않을 곳들을 이한과 여행 다니듯이 열심히 둘러보았다.

“중서함미 같은데.”

“중서함미요?”

“그래.”

“어, 중서함미, 배운 거 같은데.”

『하람 님, 하람 님. 손톱 깎고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 아세요?』

열심히 움직인 결과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을 놀라게 해 기절하게 만드는 착착귀신, 꺼지지 않고 계속 불타는 귀불, 인간의 악행을 돕는 여우 금호진인, 사람을 납치하는 쥐 자정동쥐요괴 등. 요괴와 귀신들을 처리했다.

이번에도 새로운 귀신을 쫓던 중, 사람들이 제게 자꾸 쌍둥이 형제가 있냐고 묻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오해한다는 사연을 보게 됐다.

“그 작은 손톱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의미의 미신 말씀하시는 건가요?”

태블릿 PC를 보던 하람이 제 오른쪽을 보았다.

『만들어진 미신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고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어린 얼굴의 차사가 하람의 말에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람이 움찔, 놀랐다가 얼굴을 바로 했다.

“정말요?”

『예! 선배님들이 미신은 다 실재하는 이야기라고 그랬어요!』

“그렇구나.”

미신이 다 진짜라면 밤에 휘파람 불면 진짜로 뱀이 나타나고, 학교에 있는 동상은 다 움직이는 걸까.

“어울려 주지 마라. 그럼 더 신나게 헛소리할 거다.”

알고 있는 온갖 미신을 생각하는데 왼쪽에서 한심함이 가득 느껴지는 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사를 보던 시선을 돌려 이한을 보았다.

“왜 그렇게 못되게 말하세요.”

『이한 님. 제가 귀찮아요?』

“잘 알고 있군.”

『너무하세요!』

“하아…….”

왼쪽에는 신이라 불리는 영가가 있는 대로 빈정거리고, 오른쪽에는 패기 넘치는 신입 사자가 열불 낸다. 중간에 낀 하람이 한숨 쉬며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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