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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62)화 (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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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무슨 소리지? 고의적? 아예 기록하지 못하게? 그럴 수가 있나? 아니, 왜? 구미호의 말에 약한 패닉이 왔다.

    하람이 말을 잃어버린 사이 구미호를 보던 이한이 한 박자 늦게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다는 건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너만 알고 있다는 거군.”

    『저보다 오래 산 것이 없다면, 그렇죠.』

    자신만만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해 보이기도 한 구미호의 미소를 보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손을 들어 앞 머리카락을 치워 내고 이마를 짚었다.

    “왜 네가 놀라. 숨 쉬어.”

    써늘한 손이 이마에 닿자 하람이 눈을 깜빡였다가 아, 하고 뺨을 슬쩍 붉혔다. 이한이 짧게 웃었다.

    『신기하군요.』

    이한의 손에 흐트러졌던 하람의 앞 머리카락이 반듯해졌다. 이한이 머리를 토닥이고는 앞을 보는데 구미호가 잔을 들었다.

    『한 사람은 기억을 잃었고, 한 사람은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구미호가 신기하다는 듯 읊조리고는 남은 칵테일을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그저 구미호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천호(天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꼬리가 하나일 때부터 인간을 해치지 않고 도우며 살았는데, 위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럽지만 이야기를 덤덤하게 이어가던 구미호가 손을 들었다. 직원이 다가오자 같은 것으로 한 잔 더 달라고 웃으며 요청한 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외진 곳에 있는 산마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래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 때문에 남았는데…….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는 제 외모가 이상하고, 무서웠겠지요. 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떠나겠다는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마녀사냥, 같은 걸까.

    어조가 덤덤한 탓에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말을 듣는데 새 칵테일이 서빙 왔다. 구미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당장이라도 저를 불 속으로 던질 것 같은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 한 남자가 왔습니다. 저를 보더니 왜 저를 떠났냐고, 제가 잘못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오라며 매달렸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 남자 덕분에 살았습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지 붉은 입술이 작게 호선을 그렸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으나 고마웠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려는데 남자가 먼저 제게 사과하더군요. 억울해 보여서 급했다고. 이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고, 못난 제 아내가 되게 해서 죄송하다고요.』

    남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어쩐지 무척 착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일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기가 막혔으나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은혜를 갚고 싶다는 핑계로 집필 여행 중이라는 그를 따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구미호의 말에 집중하는데 구미호가 말을 멈추고 칵테일을 짧게 마셨다가 내려놓았다.

    『어느 유명한 양반가의 서자라는 남자는 어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홀로 어찌 여행했나 싶을 정도로 무척 약하고, 덤벙거렸습니다. 그를 챙기며 전국을 떠돌던 중 까마귀 요괴에게서 남자를 구하다 제 정체가 탄로 났습니다.』

    “아, 어떻게 됐나요?”

    『남자에게 무섭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모르게 떠나려는데 모두가 무서워하는 제게 무섭다, 징그럽다 하지 않고 어찌 이리 예쁘냐고 했습니다. 몇 번이고 보듬어주는 남자를 자연스레 은애하게 됐습니다.』

    구미호의 이야기를 듣는데 왜인지 몇 년 만에 이름을 알게 된 이한이 생각났다.

    하람이 슬쩍 이한을 보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에 아무 말 없이 앞에 있는 잔을 들어 마셨다.

    『은애하는 님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자가 보이더군요. 얼마 있지 않아 나무처럼 굳건하던 남자가 쓰러졌습니다. 돌림병이었지요. 그는 하루하루 죽어갔습니다.』

    “……아.”

    『곁을 떠돌던 사자가 결국 찾아온 날. 제게 그러더군요. 혹여 부담을 느껴 떠날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고. 다시 태어나서는 매일 같이 사랑한다고 할 테니 다시 또 함께 여행 다니지 않겠냐고. 그 고백에 늘 꿈꾸었던 천호가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반드시 또 찾을 테니 함께 여행 다니자고 맹세했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구미호의 말을 듣던 하람이 저도 모르게 이한의 팔을 덥석 부여잡았다. 이한이 제 팔을 잡은 손을 보았다가 다시 구미호를 보았다.

    『죽은 남자가 환생하길 기다리고, 환생한 남자를 찾아가 또 여행을 다니고, 헤어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는데…… 남자는 늘 저를 기억하지 못하고, 어려워했습니다.』

    천호가 되기를 포기하고, 남자가 환생하기를 막연히 기다렸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어려워하다니.

    구미호의 심정이 감히 상상되지 않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하람이 말을 잃어버린 사이 구미호가 핸드백에서 작은 메모지와 볼펜을 꺼냈다.

    『그럼에도 늘 그랬듯이 배려하고, 아껴 주고, 결국 다음 생에서도 만나자고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련한 목소리와 함께 글자가 적힌 메모지가 하람의 앞으로 옮겨졌다.

    『오늘처럼 보름달이 뜨는 날, 이곳에서 만나기로 정했는데…… 무슨 일인지 몇 년을 기다려도 환생하지 않습니다. 제가 찾는 자의 이름과 아명(兒名), 자(字)입니다. 늘 같은 이름이었으니 이번에도 틀림없을 겁니다. 제일 밑에 있는 번호는 제가 부리는 자의 번호입니다. 연락 주시면 제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람이 메모지를 집어 들자 살랑이던 구미호의 꼬리가 하나, 둘 사라졌다. 그리고 펑,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연락하지.”

    이한이 일어났다. 하람이 이한과 구미호를 번갈아 보았다가 따라 일어섰다.

    “기다리겠습니다.”

    구미호가 칵테일을 제가 사겠다고 웃으며 잔을 들었다. 하람이 당황했다가 허리 숙여 인사 후 떠났다.

    “오도전륜대왕님이 알려 주실까요?”

    차 시동을 걸고, 차를 빼던 하람이 조수석에 앉은 이한을 보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이한이 옆으로 고개 돌렸다.

    “알려 준다고 해도 조건으로 또 일을 맡길 거다.”

    “조건의 연속이네요.”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더니. 하나 알아내는데 할 게 참 많다. 하람이 고개를 약하게 내젓고는 조용히 운전했다.

    늘 그랬듯이 집과 가까워지자 이한이 떠났다. 하람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익숙하게 집으로 살살 걸어가는데 문득 구미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발걸음을 멈췄다.

    “지체가 높았다고 했었어.”

    이한이라는 외자 이름, 꼿꼿한 허리, 고급스러운 검, 예사롭지 않은 검술, 높은 지체.

    “설마…….”

    엄청난 사실을 깨달은 것만 같다. 멀거니 서 있던 하람이 달리듯 급하게 걸었다.

    “이한 님, 이한 님!”

    외출한 사이 지네 각시는 떠난 듯 툇마루에 노앵설만 있었다.

    『하람, 어서 와!』

    방에 들어가신 걸까. 인사하는 노앵설에게 다녀왔다고 짧게 인사하고 이한이 머무는 방 방문을 노크했다. 곧장 안에서 들어오라는 짧은 답이 들렸다. 조심스레 들어갔다.

    “잘 준비를 하지 않고.”

    차를 마시려는지 다구를 펼쳐 놓고 있다. 하람이 어느새 방만한 한복 차림을 하고 있는 이한의 앞에 앉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뭐지?”

    “이한 님, 왕이 아니었을까요?” 

    차를 고르던 이한이 의아한 눈으로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 임금님, 전하요.”

    왕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탓일까. 이한의 한복 태가 괜히 남달라 보인다.

    그러고 보면 몸짓이나 손짓도 간결하고, 사람을 부리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 것 같고. 이한의 여러 모습을 생각하는데 이한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유가 뭐지?”

    “제가 알기로는 조선 시대의 스물일곱 명의 왕 중에서 두 명만 빼고 다 외자였어요.”

    “아, 내 이름이 외자라서?”

    난 또 뭐라고. 이한이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들었던 눈썹을 바로 하고 다시 차를 골랐다.

    “또 구미호가 지체가 높았다고 했잖아요.”

    수국, 작설, 국화, 목련. 이한이 대답 대신 찻잎이 든 통을 들었다, 놨다 했다.

    “가지고 있는 검도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고. 제 말 듣고 있어요?”

    “차 마시고 가라.”

    “네. 아니,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으시죠? 저기, 이한 님?”

    이한이 감태차를 골라잡았다. 익숙하게 물을 끓이며 준비하는 모습에 하람의 얼굴이 슬금슬금 구겨졌다.

    “제 말 안 듣고 있죠?”

    “듣고 있다.”

    “그러니까, 이한 님은 왕이었고, 저는 관리가 아니었을까요?”

    이한이 정말 왕이었다면 저는 왕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중앙 관직자가 아니었을까.

    사극에서 보았던 왕과 그 주변에 있었던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을 생각하는데 쪼르르 소리가 들렸다.

    “네 말대로 내가 왕이었다면 이 집이 아니라 궁에 묶여 있어야 하지 않나?”

    이한이 피식 웃으며 뜨거운 물을 찻주전자와 찻잔에 적당히 따랐다. 하람이 이한의 말에 아, 말끝을 길게 끌었다.

    “그리고. 평소 편전에만 있을 왕의 몸에 이렇게, 상처가 많을 수 있나?”

    이한이 걸치고 있는 포 자락을 옆으로 젖혔다. 하람이 자잘한 상처로 가득한 이한의 상체를 보며 끄응 소리를 내다 아, 했다.

    “제가 왕이고, 이한 님은 그 호위무사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내가 널?”

    기도 안 찬다는 어조와 함께 이한이 피식 웃었다. 하람의 뺨이 슬쩍 달아올랐다.

    성이 이고, 이름이 외자이고, 예사 검이 아니라서 왕인가 했는데. 이한의 반응을 보니 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 같다.

    말없이 차를 우리는 이한을 보며 몸을 쓰면서 자주 멀리 나가고, 지체 높은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는데 차가 앞에 놓였다.

    “구미호에게 들으면 그만이니 식기 전에 마셔라.”

    “……감사합니다.”

    차에 속이 기분 좋게 따뜻해졌다. 하람이 나른한 한숨을 푹 쉬었다가 감사 인사 후 일어났다.

    “그럼 이만 자러 가 볼게요.”

    “더 생각하지 말고 자라.”

    “네.”

    이한의 말대로 구미호에게 들으면 그만이다. 하람이 미련 없이 방을 나가 씻고 맘 편하게 잠들었다.

    * * *

    “……없네.”

    구미호에게 들으면 그만인데, 궁금한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한 모르게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다 조선왕조실록까지 보게 됐다.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구미호의 말처럼 특별한 내용이 검색되지 않는다.

    답답함에 노트북을 허벅지에 두고 축 늘어지는데 바닥에 있는 핸드폰이 웅웅 떨었다. 문자 알림에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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