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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60)화 (6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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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 만나는 거 조금 빨리 만나면 좋지 않을까. 시간 더 끌 것 없이 지금 바로 만나자고 하자 영진이 한 박자 늦게 그래, 하고 답했다.

    『어떡해, 나 너무 떨려!』

    사랑채에서 놀게 할까 하다가 다움이 이한의 기운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정자에서 만나기로 정했다.

    하람이 정자 바닥을 닦는데 같이 온 노앵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우리 노앵설 긴장했구나.”

    『긴장? 긴장이 뭐야?』

    “음, 지금 노앵설이 느끼는 감정이 긴장이라고 해.”

    『응, 노앵설 지금 긴장했어!』

    새로운 인간과 만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기대하는 노앵설을 보며 웃는데 작은 다과상을 든 우렁 각시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하람이 얼른 상을 받았다. 우렁 각시가 수줍은 얼굴로 허리를 짧게 숙여 인사 후 떠났다.

    이제 그만 안채에 갈까 하는데 커다란 덩치의 우렁 도령이 정자 주변에 초를 하나, 둘 놓고 밝혔다.

    어쩐지 다들 신난 것 같다.

    소리 죽여 웃은 뒤 노앵설에게 갔다 온다고 말했다.

    안채로 가자 노앵설만큼이나 기대 어린 얼굴의 다움과 영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람이 인사하며 다가갔다. 영진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나 진짜 못 가?”

    “어쩔 수 없어.”

    “……알았어. 빈손으로 보내기 뭐해서 이것저것 챙겼는데 이건 괜찮아?”

    영진이 사탕과 초콜릿, 과자 등이 가득 든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하람이 끙 소리를 냈다가 이내 종이 가방을 받아 어깨에 멨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

    종이 가방을 잡지 않은 손으로 다움의 손을 잡았다. 다움이 걱정하는 영진에게 손을 저어 인사했다.

    고작해야 문 하나만 넘어가면 되는데 이상하게 긴장됐다. 하람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랑중문을 지났다.

    익숙한 풍경 속으로 다가가는데 정자에서 작은 머리가 불쑥 솟았다. 다움이 헉, 숨을 삼키며 하람의 손을 꽉 잡았다. 하람이 다움을 보았다.

    “다움아, 노앵설이라고 해.”

    “……노앵설?”

    노앵설에 관해 설명해 주며 걷자 금방 정자에 닿았다.

    둘을 인사시켜 주려는데 정자에서 발을 동동 굴리던 노앵설이 다가왔다. 곧장 다움의 손을 잡지 않은 하람의 손을 잡았다.

    『나도 손잡아 줘.』

    졸지에 노앵설과 다움 사이에 끼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당황스러운데 갑자기 다움이 두 손으로 손을 꽉 잡더니 딱 붙었다. 예상과 다른 상황에 하람이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어…… 그러니까, 애들아…….”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각시가 왔어요!』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노앵설과 다움을 보는데 별안간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곧 편한 차림의 구세주 아니, 지네 각시가 다가왔다.

    『하람 님, 나와 계시, 어머나 예쁜 소녀가 두 분이나 계시네요?』

    지네 각시가 하람의 두 손을 꽉 잡고 있는 노앵설과 다움을 번갈아 보고는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케이크 먹으면서 대화할까요?』

    지네 각시가 왜건에 있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상자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이 자리가 서로 친구가 될까, 하고 소개하는 자리라는 거군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중앙에 두고 둥글게 앉았다. 하람에게 상황을 들은 지네 각시가 하람과 그의 양옆에 앉은 노앵설과 다움에게 핑크색 스푼을 나눠주었다.

    『어쩜, 이렇게 좋은 일에 왜 저를 부르지 않으셨어요! 일단 아이스크림 녹겠어요. 어서 먹어요.』

    하람이 잔뜩 긴장한 다움에게 먹어도 된다고 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움이 눈치를 살피다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하람이 노앵설에게도 똑같이 말한 뒤 다시 지네 각시를 보았다.

    “……쉽지 않네요.”

    『여자가 얼마나 섬세한데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답니다. 자, 우리 소녀 여러분. 우리 하람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지네 각시의 말에 노앵설과 다움이 맞춘 듯 동시에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웃었다.

    “괜찮아. 얘기해도 돼. 음, 노앵설이 먼저 말해 볼래?”

    어려 보이지만 노앵설이 더 오래 살았다. 스푼을 입에 물고 있는 노앵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자 노앵설이 스푼을 아래로 내렸다.

    『……나는, 노앵설이야.』

    노앵설을 시작으로 기다리던 대화가 시작됐다.

    MC처럼 노앵설과 다움의 대화를 주도하던 지네 각시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하람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정자에서 벗어나 사랑채, 이한의 방으로 갔다.

    “뭐지? 왜 왔지?”

    제 방에서도 정자가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이한과 함께 보고 싶었다.

    지켜보고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창가에 앉아 있다. 문을 열자마자 의아한 눈으로 보는 이한을 보며 웃었다.

    “같이 보고 싶었어요.”

    하람이 이한이 앉아 있는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을 기대고 섰다.

    창 너머로 지네 각시의 진행하에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무언가를 나누는 노앵설과 다움이 보였다.

    “계속 보고 있었어요?”

    어느새 장죽을 입에 물고 정자를 보고 있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가 다시 정자를 보았다.

    “그래.”

    “정말요? 언제부터요?”

    “네가 당황할 때부터.”

    “……이런.”

    당황한 모습을 보여 줬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하람이 끄응 소리를 내며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하다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났다. 아, 하고 이한을 보았다.

    “혹시 이런 식으로 절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요?”

    이전에 이한에게 들었던 말을 생각하며 묻자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람이 이한을 가만 보다 창턱 위로 올라가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았다.

    “혹시 스토커라는 단어 아세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앉은 꼴이 어딘가 불안하다. 이한이 하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제대로 앉혀주었다. 하람이 창틀을 두 손으로 짚었다.

    “제가 불편해하는 거 느껴지지 않았어요?”

    “글쎄.”

    대화가 잘되고 있는지 노앵설과 다움이 일어나 서로를 끌어안았다. 지네 각시가 박수를 짝짝짝 쳤다. 지켜보던 이한이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하람이 짐짓 놀란 눈을 했다.

    “아이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별로.”

    “음? 노앵설이 하는 말 잘 들어주고, 잘 놀아 주시잖아요.”

    “내 아이가 아니니까.”

    의아한 말과 함께 연기가 훅 번졌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보통 자기 아이를 더 좋아하고, 예뻐하지 않나요?”

    바뀐 것 같은데? 이상함에 조심스레 묻는데 이한이 답하지 않고 장죽을 입가로 가져갔다.

    아무 말 없이 기다리다 재촉할까, 하고 고민하는 순간 이한의 입이 열렸다.

    “……나는 내 아이를 좋아하고, 예뻐해 줄 자신 없다.”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죽기 전의 기억 탓일까.

    담뱃잎을 태우는 이한의 눈치를 살피는데 정자 쪽을 보던 이한이 시선을 맞췄다.

    “부른다. 가봐라.”

    정자 쪽을 보자 이한의 말대로 다움이 삼촌! 하고 부르고 있었다. 하람이 창 너머로 나가 정자로 다가갔다.

    “응. 다움아.”

    “잘 시간이라고 엄마가 오라고 전화 왔어요.”

    벌써 잘 시간이 된 걸까. 하람이 놀랐다가 이내 다움을 안아 들었다. 다움이 하람의 품에 안겨 노앵설과 지네 각시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하람이 안채로 걸었다.

    “얘기 잘했어?”

    “응. 다음에 게임 하기로 했어.”

    사이가 절대 좋아질 것 같지 않았는데, 역시 딸 가진 어머니는 뭔가 다르다. 보드게임 할 거라고 종알종알 말하는 다움의 모습에 안도하며 바닥에 내렸다. 그러고는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다움아, 노앵설이랑 지네 각시 만난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응. 알고 있어!”

    “우리 다움이 잘 놀았어요?”

    다부진 답에 말랑한 뺨을 장난스레 매만지는데 영진이 왔다. 하람이 질문 세례를 피해 황급히 달아났다.

    『하람 님 조카 너무 귀여워요!』

    『다움이 귀여워!』

    사랑채로 가자 어느새 이한이 정자에 있었다. 그리고 지네 각시와 노앵설이 다움에 대해 신나게 얘기하고 있었다. 하람이 정자로 가 앉았다. 노앵설이 하람의 허벅지에 앉았다.

    『다움이랑 또 언제 놀아?』

    “금방 놀 수 있을 거야.”

    영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언제라고 확답하기가 어려웠다. 하람이 기대하는 노앵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지네 각시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진짜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에이, 이한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다가 덕분에 귀여운 모습 본걸요.』

    “나한테 할 말이 있다?”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이한이 지네 각시를 보았다. 약과를 먹던 지네 각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 어 하고 물티슈로 급하게 손을 닦았다.

    『저한테 구미호 오면 알려달라고 하셨잖아요. 오늘 구미호가 서울에 나타난다는 소리가 있었어요!』

    구미호? 설마 제가 아는 그 구미호(九尾狐),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요괴를 말하는 걸까? 노앵설에게 식혜를 먹여 주던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이한이 술잔을 내려놓았다.다는 소리는 없었나?”

    『정확한 건 못 듣고, 강북에 있는 바 어디에 나타난다는 소리만 들었어요.』

    “강북…….”

    강북 어느 동에 있는 바가 아니라 그냥 강북이라니. 범위가 너무 넓었다. 하람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강북의 범위를 생각하는데 이한이 내려놓았던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 느긋하게 기울였다. 곧 탁,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동시에 하람이 제 허벅지에 앉아 있는 노앵설을 옆에 내려놓았다.

    “일단 강북에 가 보죠.”

    이한이 지네 각시에게 따로 부탁했을 정도면 중요한 일일 테다. 헤매더라도 가야 했다.

    하람이 방으로 가 구겨진 셔츠를 갈아입고 지갑과 차 키를 챙겨 나왔다. 이한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자리 비워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몸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지네 각시가 왔는데 자리를 비우게 됐다. 하람이 허리를 짧게 숙여 인사 후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강북 BAR를 검색했다. 그런 다음 가장 가까운 곳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안내음을 들으며 운전을 시작했다. 잊지 않고 이한을 생각했다.

    “이한 님. 계세요?”

    조수석에 검은 연기가 번지더니 긴 다리가 나타나고 곧 이한이 앉았다.

    “그래.”

    조수석에 나타난 이한의 두 손에 아무것도 없다. 힐끔, 확인한 하람이 검은요? 하고 슬쩍 물었다.

    “구미호를 처리하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라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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