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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59)화 (59/87)

59

누구한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렸다. 불편함에 끄응 소리 내며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얼마나 잤는지 사위가 밝다. 환한 풍경을 훑다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장죽을 물고 있는 이한이 보였다.

생각에 빠진 듯 멍한 모습을 보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데 허리가 찌릿, 했다. 입에서 읏 소리가 새어 나왔다. 창 너머를 보던 이한이 엉거주춤 굳은 하람을 보았다.

“일어났나?”

“……네, 흠흠.”

목이 형편없이 쉬었다. 하람이 얼굴을 슬쩍 붉히며 헛기침했다. 그사이 이한이 창문에서 내려와 물을 건넸다. 하람이 한 손으로 이불을 꼭 부여잡고 앉아 물잔을 받아 마셨다.

“……저, 얼마나 잤어요?”

“점심시간이다.”

이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톡톡, 작은 소리가 들렸다.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떡국 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먹기 힘들면 남겨라.”

눈에 보이는 떡국이 맛있어 보여 먹고 싶은데, 조금 민망하다. 하람이 눈치 보다 조심스레 저, 하고 운을 뗐다.

“죄송한데, 저기 옷 좀…….”

밥을 먹고 싶은데 지금 헐벗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체가 너무 부끄러워 방 한쪽에 던져져 있는 옷을 슬쩍 가리켰다. 이한이 하람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옷을 보다 곧 터질 것 같은 하람의 얼굴을 보았다. 소리 없이 웃으며 일어나 손을 딱, 튕겼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에 잡힌 제 셔츠를 하람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하람이 감사 인사 후 큰 셔츠를 더듬더듬 입었다.

“자, 잘 먹겠습니다.”

키스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진도가 더 나갔다. 그것도 맨정신으로. 덕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어떻게 했는지, 이한이 무슨 얼굴을 했는지 다 기억났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이한과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엄청 민망하다.

열심히 준비해 준 우렁 각시에게 미안하게도 떡국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다 떡국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리 못 먹지? 힘드나? 떠먹여 줘야 하나.”

허한 속에 떡국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한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떡국에 코를 박을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람이 고개 들었다.

“……아니요. 정말 아니요.”

떠먹여 준다니. 절대 안 된다! 하람이 고개를 빠르게 가로젓고는 숟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지켜보던 이한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웃고는 다구를 꺼냈다.

“잘 먹었습니다.”

무슨 맛인지 모를 떡국을 어찌어찌 다 먹었다. 배가 불러 푹 늘어지려는데 이한이 찻잔을 건넸다. 보얀 김과 향긋한 향을 풍기는 찻잔을 받았다.

“저 씻고 일하러 갈 거예요.”

“움직일 수 있나?”

차를 마시던 이한이 하람의 부스스한 머리부터 보얀 얼굴, 커다란 셔츠에 감싸인 상체까지 훑었다.

“안 될 거 같은데.”

“할 수 있어요.”

경첩 바꿀 거라고 영진에게 이미 말해 두었는데 못 했다. 꼭 해야 했다.

계속 안 하면 영진이 왜 안 했냐고 닦달하고, 쫓아올 수도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얼른 하고 치워야 했다.

“도와줄까.”

“안채에 사람 많아요. 괜찮아요.”

몸 곳곳이 쑤셨으나 사람 가득한 안채에 이한을 데리고 갈 수도, 경첩 바꾸는 작업을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 지엄한 신께 어떻게 경첩 따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혀 피식 웃으며 남은 차를 다 마셨다.

든든하게 먹었다. 이한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 후 일어나 방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데 온몸이 삐걱거렸다. 이한에게 함부로 덤비지 말자고 다짐하며 경첩과 전동 드라이버를 챙겨 방을 나갔다.

툇마루로 가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노앵설의 옆에 앉아 있던 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한이 일어섰다.

“무리하지 마라.”

“네.”

커다란 손이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람이 목을 움츠렸다가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안채로 갔다.

“아, 하람 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할머니 깨셨어요?”

안채로 가자 바삐 걷던 사람들과 강원댁이 인사해 왔다. 하람이 짧게 인사 후 안방 쪽을 힐끔 보았다.

“알아볼 것이 있다고 일찍 외출하셨습니다. 오후에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아, 저 낡은 경첩 좀 바꾸려는데, 시끄러울 수 있어요.”

“영진 님께 들었습니다.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강원댁이 허리를 짧게 숙여 인사 후 떠났다. 하람이 크게 심호흡 후 안채 위로 올라갔다.

안채가 크고, 넓은 만큼 문이 많았다. 오늘 중으로 끝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안쪽에서부터 경첩을 일일이 확인하고, 바꿔 나갔다.

“너 여기서 뭐 해?”

작업하는 데 허리가 영 불편하다. 작업을 잠시 멈추고 허리를 주먹으로 쿵쿵 치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고개를 크게 젖혔다.

“언제 왔어, 경첩 바꾸고 있어.”

얼마나 집중했는지 영진과 다움이 온 것을 몰랐다. 하람이 바닥에 있는 경첩을 슬쩍 들어 보였다. 영진이 투명 봉투에 가득한 새 경첩을 보았다.

“어제 한다더니 안 했어?”

“……어? 어.”

“왜? 뭐 했어.”

왜, 냐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어제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이 탔다. 하람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내려놓았던 전동 드라이버를 들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낡은 경첩이 빠지고, 반짝이는 새 경첩이 끼워졌다. 지켜보던 영진이 다움을 두고 떠났다가 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하람이 네가 건축 일 한다고 해서 힘도 없는 게 무슨 건축이야 했었는데. 제법 태가 난다?”

“뭐?”

설계할 때는 이상한 거 본다고 하더니 전동 드라이버 하나에 인정받았다. 하람이 황당해하다 드라이버를 내려놓고 주스를 받아 마셨다.

“참, 너 인감 줘.”

“인감? 왜?”

“변호사가 필요하대.”

고개를 끄덕이자 영진이 따라서 고개 끄덕이더니 아, 소리를 냈다.

“너 다움이 장난감 가져갔다면서? 네가 왜 들고 가? 사랑채에 뭐, 애 있어?”

“응.”

“……진짜?”

영진이 크게 놀라더니 하람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성별, 나이, 성격 등을 물었다. 하람이 영진의 물음에 답하다 역시나 궁금해하는 다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 애랑 만날 순 없어?”

“이한 님한테 한번 물어볼게.”

“그래그래. 아, 근데 진짜 다 나은 거 봐도 봐도 진짜 신기하다.”

영진이 하람의 다리를 꾹꾹 눌렀다. 하람이 헛웃음을 흘렸다.

“여행 가는 거 허락받았지?”

“응. 누나는?”

“나도 갈 수 있지. 아, 맞다. 뒤뜰에 가봐. 은행 난리 났어.”

“알았어.”

영진이 저녁 준비한다며 떠났다. 하람도 문 위쪽 경첩을 바꾸기 위해 일어났다. 다움이 따라 일어났다.

“삼촌, 내가 해 보면 안 돼?”

“그럴래?”

다움의 손에 전동 드라이버를 쥐여준 뒤 손을 겹쳤다. 오래된 경첩 나사를 풀고, 새 경첩으로 바꿨다. 소란스러운 소리에도 재미있어하는 다움과 경첩을 하나하나 바꿨다.

아무 생각 없이 경첩을 바꾸길 몇 번. 열심히 보조하던 다움이 밥 먹는다고 떠나고, 환하던 사위가 어느새 어두워졌다.

하람이 하고 있던 작업을 끝으로 드라이버를 내려놓았다. 동시에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경수의 이름에 전화를 받고 귓가에 가져갔다.

“어, 경수야.”

- 바쁘냐?

“아니. 괜찮아.”

- 많이 늦었지만 장례식 와 줘서 고맙다고.

“당연한걸. 어떻게 지내?”

- 정리 거의 다 끝나서 일 복귀하려고. 우리 작가님들 재촉해야지.

걱정했는데 목소리가 여상하다. 경수의 너스레를 들으며 짐을 챙기다 ‘작가’ 단어에 어,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경수야, 혹시 네가 담당하는 글 중에 진짜 같은 공포물도 있어?”

건너 듣기로는 집필 전에 이런저런 조사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경수가 담당하는 작가님 중에 그런 분이 계시거나, 글이 있을까. 기대하며 묻자 침음이 들렸다.

- 나는 현대 판타지 쪽이라서, 왜?

“아, 어…… 요새 귀신이랑 요괴 같은 거에 관심 생겨서.”

- 네가? 이하람 특이한 건 진짜 알아줘야 한다. 내일 출근해서 알아보고 연락 줄게.

“고마워.”

- 그래, 쉬어라.

경수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공포 소설과 너튜브 영상을 좀 봐볼까. 아, 원귀도 찾아야 하는구나. 하람이 외출할지 고민하며 짐을 모두 챙겨 일어섰다. 곧바로 사랑채로 넘어갔다.

『하람아!』

사랑채로 가자 늘 그랬듯이 노앵설이 달려와 다리를 푹 안았다. 하람이 노앵설의 손을 잡고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한에게 다가갔다.

“언제 오나 했는데. 그래, 작업은 다 끝났나?”

“다녀왔습니다. 네. 뭐 하고 계셨어요?”

“토라진 노앵설과 놀아 주고 있었다.”

이한이 툇마루에 어질러져 있는 젠가를 가리켰다. 툇마루 끝에 앉아 젠가를 보던 하람이 제 옆에 앉은 노앵설을 보았다.

“왜 토라졌어?”

『나 빼고 둘이서만 놀았잖아. 나 너무 섭섭해!』

“아…….”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노앵설의 귀여운 모습을 보다 삐진 이유에 말문이 턱 막혔다. 하람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고개 돌렸다.

“저 이한 님, 누나랑 다움이가 노앵설을 궁금해하는데 만날 수 있나요?”

“노앵설을? 왜지?”

“음, 친구가 되고 싶은 거 아닐까요?”

다움이는 안타깝게도 인외 존재를 본다는 사실이 들통나고부터 사람 친구가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닐지언정 비슷한 또래에 같은 성별을 가진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게 아닐까. 하람이 흠 소리를 내며 노앵설을 보는 이한을 가만 응시했다.

“노앵설은 이 집에서 머무는 귀신이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다움이를 네가 이 집으로 데리고 오고, 이 집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허락하지.”

“아, 정말요? 지금 바로 연락해 봐야겠어요.”

『여기에 누가 또 와?』

이한과 하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노앵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곧장 다람쥐처럼 하람의 품으로 파고들어 허리를 안았다.

“응. 노앵설이랑 비슷한 나이의 여자애가 올 거야.”

『정말?』

하람이 한쪽 팔로 노앵설을 안고 남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바로 영진에게 전화했다.

- 어, 하람아.

“누나, 지금 통화 괜찮아?”

- 왜, 무슨 일인데?

“다움이만 사랑채에 오고, 다른 사람에게는 만난 사실을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하셨는데 괜찮아?”

- ……나한테 말하는 것도 안 돼? 나도 궁금한데.

아쉬움이 느껴지는 영진의 목소리에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안 된다.”

“……누나, 안 된대.”

무어라고 더 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다. 어쩔 수 없이 안 된다고 하자 핸드폰 너머에서 영진이 아쉽다고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휴, 어쩔 수 없지. 다움이가 언제 만나냐고 하는데 언제 만나?

이번에는 품에 안겨 있는 노앵설을 보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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