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57)화 (57/87)
  • 57. #05. 샘낼 투(妬)

    “대왕님 성격 좋으신 거 같아요.”

    생각만 하던 경첩을 드디어 샀다. 작업을 하기 전 빈백에 누워 핸드폰으로 명부를 서치하던 하람이 중얼거렸다. 보료 위로 누워 책을 보던 이한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도대체 어디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음성에 하람이 몸을 돌려 이한을 보았다.

    “뭐랄까, 약간…… 장난기 많고 주책맞은 아버지 같은 느낌?”

    어젯밤. 또 죽으라는 소리와 함께 나온 이한의 검에 전륜대왕이 나 죽겠다며 황급히 명부 문을 열었다.

    『그럼 열심히 하거라! 우리 어린 주인께서는 밥 잘 먹고, 잘 자고.』

    전륜대왕이 놀란 하람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후루룩 떠났다. 같이 온 도깨비가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어리둥절해하더니 한 박자 늦게 따라 떠났다.

    “어? 아, 아니! 대왕님 저 질문!”

    제일 중요한 할머니에 관한 질문도, 이한에 대해 궁금한 것도 더 묻지 못했다. 떠나는 전륜대왕에게 다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문이 쾅! 닫히고, 사라졌다.

    분명 도망치듯 떠났는데 계속 하하하 웃던 전륜대왕의 모습을 생각하던 하람이 안 그러냐고 덧붙였다. 이한이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전륜대왕과 무슨 말을 했지?”

    전륜대왕이 떠나고 더 할 것이 없고 또 술기운에 그대로 헤어졌다.

    이한이 어제 묻지 못한 말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하람이 음? 하고 빈백에 앉았다.

    “별 내용 없었어요. 이한 님이 해준 얘기를 조금 더 깊게 들었어요.”

    이한이 간추려 말했던 것을 더 자세하게, 몰랐던 것을 새로 들은 것이 전부다. 꿀릴 것이 없어 당당하게 말하다 아, 하고 허리를 바로 했다.

    “회복력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기억 찾았다는 걸 왜 말 안 했어요?”

    기억을 제법 찾았다는 전륜대왕의 말에 이한이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왜 말하냐는 기색을 보였었다.

    뒤늦게 이유를 묻자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가 짜증이 느껴지는 얼굴을 했다.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이해하기 어려워 의아한 얼굴을 하자 이한이 소리 없이 한숨을 길게 쉬더니 장침에 팔을 걸치고 느슨하게 늘어졌다.

    “너와 있으면 기억을 찾는 것도 찾는 거지만 그보다도……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같이 오래 있고 싶었다.”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어조에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하람의 얼굴이 뒤늦게 슬금슬금 풀렸다.

    “어, 그게, 그러니까…….”

    마음이 편하다니. 반려동물 같은 느낌일까. 아니면 기억의 영향인 걸까. 그도 아니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걸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다 이한의 말에서 이상함을 발견했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꼭 사실을 말하면 제가 떠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어쩐지 저를 아주 매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섭섭함에 작게 중얼거리고는 입술을 꾹 다물자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훅 들었다.

    “일 못 해서 안달이더니.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닙니다.”

    일을 못 해서 안달인 게 아니라 쉽게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평생 먹고살 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 있다. 하람이 의외라는 얼굴을 한 이한을 보다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가 일하는 게 맘에 안 들면 복권 번호 알려주세요.”

    “복권? 왜?”

    “저도 먹고살 돈이 있어야죠.”

    “집에 돈이 있는데 왜 요행을 바라는 거지?”

    “그건 제 돈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그 돈을 관리하려면 또 일해야 하잖아요.”

    복권, 이왕이면 꾸준하게 돈 주는 복권 하나 당첨됐으면 좋겠다.

    의외라는 눈에서 이제는 한심함이 느껴지는 눈으로 보는 이한을 보며 히 웃었다.

    이제 그만 작업하러 갈까, 하고 일어나다 불현듯 이한이 짜증 비슷한 것을 냈던 것과 집어 던진 것 등이 생각났다. 하람이 다시 앉았다.

    “그보다, 저랑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하면서 왜 저한테 짜증 내고, 던지고 그랬어요?”

    꼭 삐진 애인처럼 무슨 말만 하면 짜증 내고, 타박하고, 먼저 갔으면서. 도대체 언제부터 마음이 편했을까. 섭섭함과 의아함을 내보이자 이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이 있으니까.”

    “…….”

    츤데레야 뭐야.

    관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긴 하지만, 이건 뭐 관심 있다고 괜히 장난치는 애도 아니고. 하람이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리다 미간을 확 구겼다.

    설마, 몸정처럼 키스 정이 들었나? 아니면 제가 쉬워 보였나?

    “이런 쓰…….”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제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시잖아요.”

    밑도 끝도 없이 아니라고 하는 걸 보니 더 의심스럽다. 눈을 가늘게 하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언제예요? 언제부터 저한테 마음이 생겼어요?”

    제대로 알아야 할 것 같아 묻자 이한이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매를 구겼다.

    “감정이 생기는데 꼭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야, 뭐가 있어야 좋아지죠.”

    잘생겨서, 성격이 좋아서, 능력 있어서, 착해서, 잘 맞아서. 마음이라는 게 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생기는 거 아닌가. 이해할 수가 없어 말을 덧붙이자 이한이 한숨을 짧게 쉬었다.

    “그 이유가 틀리면. 만나지 않을 건가?”

    “……고민을, 하겠죠.”

    “그럼 이유가 틀어지면 천생배필을 버리기라도 할 건가?”

    “그렇게까지 극단…….”

    “그렇게 이유를 만들어서 만난 인연이 얼마나 갈까.”

    이한이 쯧쯧 혀를 차더니 고개를 약하게 가로저었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꼰대의 얼토당토않은 말 같기도 하고.

    어쩐지 생각 없는 사람으로 몰린 것 같다. 말을 무어라고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데 이한이 똑바로 앉았다.

    “……그래. 무슨 생각 했는지 말해 봐라.”

    답답함을 알아차린 듯 되묻는다. 하람이 눈을 크게 떴다가 재빨리 이한을 따라서 반듯하게 앉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랑 입을 맞췄잖아요.”

    “그랬지.”

    “너무 쉽게 입 맞추니까 제가 쉬워 보여서 갑자기 마음이 생긴 건가, 했어요.”

    무표정한 얼굴로 하람의 말을 가만 듣던 이한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누굴 파렴치한으로 아는 건가.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생각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질색팔색하는 얼굴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

    “……진짜요?”

    “그래.”

    칼처럼 단호한 이한의 대답에 하람이 눈을 둥글게 떴다가 이내 입꼬리를 느슨하게 늘려 웃었다.

    “알겠어요. 오해해서 죄송해요.”

    오해라니 다행이다. 소리 없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이한이 장죽을 집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가 했더니.”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구긴 채로 장죽을 신경질적으로 뻑뻑 태운다. 기분 상할 대로 상했다고 말하는 것 같은 이한의 얼굴에 안도하면서 또 눈치가 보인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경 쓰일 정도로 굳은 얼굴에 괜히 식은땀이 났다. 하람이 눈을 굴리며 눈치 살피다 슬그머니 거리를 조금 좁혔다. 이한의 허벅지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화, 나셨어요?”

    하람이 조심스레 묻자 주변이 부옇게 변할 정도로 연기를 내뿜어 대던 이한이 제 허벅지를 누르는 손을 보았다.

    소심하게 손끝으로 누르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는 손끝을 보다 시선을 들어 고개를 푹 숙인 채 풀이 잔뜩 죽은 하람을 보았다.

    “안 났다.”

    “……정말요?”

    화나지 않았다고 해도 눈치를 본다. 다시 한번 더 말하려는데 하람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검은 액들이 연기에 난리 부리는 모습이 보였다.

    꼭 하람 대신에 난리 부리는 것 같다. 소리 없이 달싹거리는 시커먼 액을 보다 그 위로 연기를 내뿜었다. 캬아악! 액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하람이 고개 들었다.

    “……화 안 났다고 하시면서 엄청, 화나 보이시는데요.”

    분명 입으로는 화 안 났다고 말하는데 눈에 보이는 얼굴이 한껏 굳어 있다.

    부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조금 낯선 느낌의 굳은 얼굴을 보는데 이한이 장죽을 내렸다. 곧장 하람의 머리 위로 손을 툭 두었다.

    꼭 팔걸이에 팔을 걸치듯 두더니 개 쓰다듬듯 슥슥 쓰다듬는다. 하람이 목을 움츠렸다가 쓰다듬는 대로 고개를 달싹였다.

    “화 안 났으니 눈치 그만 봐라.”

    화가 풀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커다란 손에 머리를 맡기고 이한을 보던 하람이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기억을 찾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화가 풀린 것 같다. 그래서 조심스레 기억을 묻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별거 없었다.”

    이한이 다시 장침에 팔을 걸치고 느슨하게 누웠다.

    “네가 널 안기도 하고, 달래 주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별거 아니라고 하기엔 스킨십의 연속이다.

    지금까지의 기억은 그저 대화뿐이지 않았나? 스킨십이라고 해봐야 고작 손잡는 것 정도가 다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렇게 진도가 나갔지?

    당황스럽다가 문득 이한과 한 키스 탓인가, 싶었다.

    고작해야 키스 한 번, 그것도 크게 유난스럽지도 않은 키스였는데. 키스가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걸까.

    “저랑 키스 아니, 입 맞춘 게 어떤 시발점이 된 걸까요? 얼굴은요? 얼굴도 봤어요?”

    “나도 키스라는 단어 안다. 시발점인지는 모르겠고. 얼굴은 안개가 낀 것처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얼굴 확인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람’이라는 사람의 얼굴이 기억을 찾는 데 히든 키인 거 같은데. 원귀를 잡으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람이 먼 곳을 보며 생각을 이어가다 이한을 보았다.

    “한 번 더 해볼까요?”

    “뭐?”

    “혹시 모르잖아요. 한 번 더 해 보죠.”

    키스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키스하자고 하고는 방 한쪽에 있는 물잔에 차를 채우고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한이 작게 경악했다.

    “뭘 해?”

    하람이 당황했는지 장침에서 팔을 내리고 보료에 엉거주춤 누워 있는 이한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얼굴 양옆을 손으로 턱 짚고 내려다보았다.

    “키스요. 한 번 더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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