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56)화 (56/87)

56

궁금해서, 정말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무슨 일인지 전륜대왕의 얼굴이 굳었다.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은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것을 건든 것도 같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선 앞서 묻지 못했던 것을 물으려는 순간 전륜대왕이 옅은 연기를 내뿜었다. 곧 입을 열었다.

『……이한이 기억을 제법 찾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궁금했던 것 같던데, 맞는가?』

“예? 아, 네.”

그렇지 않아도 물으려고 했었는데 전륜대왕이 먼저 꺼낼 줄이야. 늘어뜨리고 있는 어깨를 바로 하며 반듯하게 앉았다.

『이한에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죄가 한두 개가 아니었지. 거기다 본인 스스로 반성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지옥도(地獄道) 판결이 거의 확실했고 심지어 아수라도(阿修羅道)에 한 번 빠지기도 했었지. 그러다 보니 내게 왔을 때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는데, 나는 이대로 끝을 내고 싶지 않았다.』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던 전륜대왕이 잔을 들어 마셨다가 내려놓았다.

『방법을 생각하다 지장보살(地藏菩薩)에게 가 물었지. 방법이 없냐고.』

“……지장보살이요?”

설마 절에 있는 불상 중의 하나인 그 지장보살을 말하는 건가?

눈을 크게 뜨며 한 박자 늦게 묻자 전륜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장보살은 육도(六道)의 중생들을 몸소 교화, 구제하지. 그의 자비를 받은 자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는데 이한이 그 기회이자 벌을 받았다네.』

“……아.”

왜 이한만 윤회하지 않고 벌을 받는 건가 했는데. 놀라움에 입이 작게 열렸다.

『다음은 반성할까, 기존의 죄를 모두 지웠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의 악업을 줄이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오면 바라는 대로 소멸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다. 몸에서 힘이 빠져 조금 늘어졌다.

『그 기억을 찾는 조건에 이한은 기억을 찾으면 몸이 기억을 잃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회복이 느린 건가요?”

『그렇다네.』

살아생전의 기억 중 아주 일부만 찾은 것 같은데 벌써 회복력에 영향이 있다니. 모든 기억을 찾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참. 어린 주인, 혹여라도 한이의 검을 오래 잡거나, 뽑지 말거라.』

“네? 그 검은 검 말씀하시는 건가요?”

생각에 깊게 빠져 아래를 보던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전륜대왕을 보았다.

『이한이 검을 함부로 할 놈이 아니지만 궁금하다고 해서 잡았다가 그대로 검에 홀릴 수 있으니 절대 함부로 잡지 말거라.』

왜냐고 묻지 못할 만큼 단호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둥글게 뜨고 있던 하람이 무어라고 더 묻지 않고 예, 하고 짧게 답했다.

대화가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전륜대왕을 보며 또 무얼 물을지 생각하다가 아, 하고 전륜대왕을 보았다.

“혹시 이한 님이 기억을 다 찾고 소멸하면, 윤회할 수 없는 건가요?”

『소멸은 말 그대로 소멸. 윤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그…… 꼭, 소멸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도 고생했는데. 소멸이 아니라 윤회하면 안 되는 걸까.

혹시나, 하고 묻자 전륜대왕이 어딘가 묘한 얼굴로 응시하더니 입꼬리를 미세하게 당겼다.

『본인이 바라고 또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길도 있지.』

이대로 완전히 소멸하는 건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어린 주인께서는 이한이 소멸하지 않고 다시 살았으면 하는가?』

이한이 무슨 죄를 지었고, 왜 윤회를 거부했던 걸까. 물어보고 싶은데 직접적인 것 같고 또 개인적인 것 같아 주저하는데 질문이 들렸다.

“네. 행복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많은 죄를 지었다는 말을 들은 탓인지. 아니면 소멸하고 싶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기억 속의 그가 그리 밝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하람은 이한이 죽기 전까지 그리 행복한 삶을 산 것 같지 않았다.

“태어나고 지금까지 고생한 만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셨으면 합니다.”

이왕 다시 사는 거, 바라는 대로 살면 좋지 않을까. 진심을 담아 말하자 전륜대왕이 의심이 담긴 것도 같고, 인자한 것도 같은 시선으로 보았다.

『이한이 어린 주인의 생각과 다르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못되게 살았어도 말인가?』

질문의 의도가 뭘까. 그저 떠보는 걸까, 아니면 정말일까. 의도를 물을까 하다 그냥 네, 하고 답했다.

『그래, 그렇다고…….』

하람의 답에 전륜대왕이 추억에 젖은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약하게 주억거리더니 술잔을 들었다.

『……억울하게 죽거나, 바라던 것을 끝끝내 이루지 못하고 죽은 자 중 일부는 명부에 오지 않고 원귀가 되어 구천을 떠돌지.』

갑자기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하람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드는데 전륜대왕이 장죽을 입가로 가까이하며 저 먼 너머를 가만 응시했다.

『그중에서 원의 정도가 강한 원귀는 웬만한 요괴만큼이나 강한데 바라는 것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저주하고 또 괴롭힌다.』

후우, 소리와 함께 연기가 번졌다.

『사자들이 원귀를 찾아 처리하자니 명부에 죽은 자의 이름이 많아 찾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수사를 하자니 일이 너무 많지.』

후욱 번진 연기 사이로 시선이 마주쳤다.

『제사, 제령(際靈) 등으로 달래주고 또 구마(驅魔)를 해도 남는 것들은 끈질기게 남지. 이것들을 이한과 같은 자들에게 맡기는데…… 귀신과 요괴는 잘 처리하는 이한이 무슨 일인지 원귀의 일에는 나서려고 하질 않아.』

전륜대왕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침음하더니 멀리했던 장죽을 다시 입에 물었다. 그의 말을 듣던 하람이 응? 하고 미간을 좁혔다.

“이한, 님이요?”

현장에 갔다가 다치게 만든 잡귀 둘을 이한이 처리했는데?

먼저 나서서 처리한 건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이상함에 조심스레 묻자 전륜대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한이 먼저 원귀를 상대했느냐?』

“어…… 그게, 원귀는 아니고 잡귀를 처리했었어요.”

놀라기라도 했는지 전륜대왕의 손이 굳고, 미간이 구겨졌다. 하람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 가만히 있길 몇 분. 전륜대왕이 장죽을 아래로 내리며 시선을 맞췄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원귀가 있다. 원귀 주제에 원귀와 잡귀를 선동해 일을 벌이기도 하고, 하늘을 저주하기까지 하지. 이것을 찾아 처리하거라.』

“……네? 원귀요?”

갑작스러우면서도 다소 밑도 끝도 없는 지시에 조금 어리둥절했다. 눈을 끔뻑이며 묻자 전륜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다 할 정보가 없으니 내가 말한 원귀를 처리하면 이한의 기억 일부를 주고 네 소원 하나를 들어주마.』

이한의 기억뿐만 아니라 소원까지? 엄청난 보상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였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고, 이한을 힘들게 할 수 있지만 보상이 달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 할게…….”

고민 끝에 한다고 답하는 것과 동시에 쿵! 큰 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쫓아 옆을 보자 명부로 가는 문이 끼이익, 소리 내어 열리고 있었다. 곧 활짝 열린 문 사이로 거대한 덩치의 도깨비와 이한이 나왔다.

『뭐야, 왜 이리 일찍 왔느냐?』

“영감이 이상한 소리 할까 봐. 영감이 해코지하거나 하지 않았나?”

이한이 깜짝 놀란 전륜대왕을 무시하고 하람의 옆에 털썩 앉았다. 하람이 놀란 눈으로 이한을 보았다.

명부에 허준의 영혼이라도 있는 걸까. 군데군데 검던 부분이 눈에 띄게 줄었다.

멀쩡한 다섯 손가락을 보자 이한이 왜, 하고 손을 내밀었다. 하람이 이한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가 내밀어진 손을 보고, 잡았다.

“아…….”

기억 속의 그 손이고, 완벽하게 다 나았다.

손끝에서부터 손목까지. 더없이 멀쩡한 손을 멀거니 보다 시선을 들어 이한을 보았다.

“이제 안 아파요?”

의외의 질문을 받은 듯 이한이 눈매를 찌푸리더니 전륜대왕을 보았다.

“……역시 헛소리를 했군.”

『이놈아, 고작해야 아프냐고 물은 건데 의심이냐.』

의심과 짜증이 한가득한 이한의 시선에 전륜대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숨을 크게 토했다.

『네놈이 없는 동안 어린 주인이 일을 하나 받았다.』

“일?”

이건 무슨 소리일까. 이한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말없이 전륜대왕을 보았다.

『원귀 하나만 처리해라.』

“원귀? 무슨 원귀를 말하는 거지? 아니, 왜 내가 없을 때 말했지?”

『넌 안 들으니까!』

드러내 놓고 황당해하고, 짜증 내는 이한이 보이지 않는 걸까. 전륜대왕이 약 올리듯 웃으며 큰소리친다.

약 오르지 까꿍, 하고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하람이 괜히 눈치를 살피는데 이한의 얼굴이 종이처럼 와락 구겨졌다.

“……판관들이 왜 이렇게 붙잡나 했더니, 이러려고 날 명부로 보낸 거였군.”

“……네?”

『으흠!』

그러니까 이한을 낚은 게 아니라 저까지 낚인 거라고? 하람이 한 방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한 순간 이한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이 빌어먹을 영감……!”

“이, 이한 님!”

당장이라도 전륜대왕을 베어 낼 것처럼 기세가 엄청나다. 이러다 진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하람이 왁 소리 지르며 얼른 팔을 부여잡았다.

『아이고, 영가(靈駕)가 시왕 죽이네!』

“이한 님, 참아요!”

진짜로 벨 것 같은데 심각성을 모르는지 전륜대왕이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며 넘어간다. 그 꼴에 이한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결국 다급하게 이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빌어먹을 영감, 일이 없어서 왔다더니. 순 거짓이었군. 원귀를 처리하라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거짓이라니. 정말 일 없었다. 그리고 이미 어린 주인이 허락했다.』

검이 탁, 하고 검집 속으로 들어갔다. 지켜보던 전륜대왕이 흠흠, 소리 내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하람이 이한을 아래로 약하게 당기며 천천히 앉았다.

“……제가요?”

『어린 주인이 분명 네, 라고 했다.』

그랬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명확하지가 않아 생각하는데 이한이 사실이냐고 추궁하듯 뚫어져라 본다.

“어, 그게…….”

『설마, 시왕을 상대로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양반다리 위로 놓인 전륜대왕의 창백한 손 위로 까만 무언가가 일렁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는 느낌에 하람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하, 한 거 같아요.”

『거 봐라. 내가 뭐랬느냐?』

이거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전륜대왕의 모습에 이한이 다시 한번 더 검을 뽑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