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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55)화 (5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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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지긋한 웃어른과 단둘이 남은 상황에 하람이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전륜대왕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예?”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걸까.

    『당사자가 옆에 있으면 질문을 하기도, 답을 하기도 불편하기 마련 아닌가.』

    그러니까, 이한을 일부러 명부로 보냈다는 걸까. 하람이 놀라 입을 벌리자 전륜대왕이 잔을 들었다.

    『그래. 이한이 돌아오기 전까지 얼른 궁금한 것을 다 물으시게.』

    오도전륜대왕이 편하게 앉았다. 하람이 한 박자 늦게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이한 님은, 명부에 가면 상처가 낫나요?”

    『이한은 죽은 자. 여기, 남섬부주(南贍部洲, 인간들이 사는 곳)보다 명부에 더 어울리는 자로서 명부에 가면 상처가 금방 낫고, 고통도 덜하지.』

    그렇지 않아도 회복이 늦어 걱정했는데.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다 고통이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고통이요?”

    이한은 처음 다칠 때를 제외하고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기함하자 어느새 이한의 것과 비슷한 장죽을 꺼내 물던 전륜대왕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까지 상대한 것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던가?』

    의아한 기색에 이한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인간 외의 존재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그림 귀신부터 그슨대까지. 이한이 상대한 모든 존재가 고통을 느꼈었다. 인간 외의 존재인 이한 또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왜 지금에서야 알아차렸을까. 너무 늦은 깨달음에 당황스러웠다가 그를 무리시켰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한을 돕겠다고 나섰던 것이 사실은 이한을 몰아붙이는 것이었다니. 어깨가 무거워지면서 아래로 내려가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어린 주인. 잘하고 있네. 그러니 그리 심려치 말게.』

    당장이라도 땅속에 꺼질 듯 전신을 축 늘어뜨린 채로 심각하다. 지켜보던 전륜대왕이 인자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달랬다.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간다고 생각하시게.』

    하람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전륜대왕이 울 것 같은 하람을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하람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한, 님이 다치는 동안 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나요?”

    그저 목적지에 갈 수 있도록 돕는 것 말고는 없는 걸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과 씁쓸함에 어렵사리 묻자 전륜대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한의 기억이 어린 주인에게까지 영향이 갔나 보군.』

    전륜대왕이 대견하다는 것도 같고, 불편하다는 것도 같은 얼굴을 하더니 술잔을 들었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슬쩍 좁혔다.

    『이한을 처음 만날 때만 해도 불편해했던 어린 주인이 이제는 걱정하지 않는가.』

    술잔을 단번에 비운 전륜대왕이 술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고, 채웠다.

    『어린 주인께서는 내가 명부에서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 중 가장 마지막에 만나는 왕인 것을 알고 있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윤회의 바퀴는 앞선 아홉 번의 심판으로 어느 정도 돌아간다네. 나는 그저 마지막 바퀴를 돌려 환생할 곳을 결정할 뿐이지.』

    전륜대왕이 술이 채워진 잔을 들어 비우고, 내려놓았다. 곧장 장죽을 들었다.

    『꽤 긴 시간을 일했고, 많은 자를 심판했지. 그중 다섯 명 정도 기억에 남는데, 한 명이 바로 이한일세.』

    생각에 빠진 듯 전륜대왕의 시선이 잠시 먼 곳을 응시했다.

    『……살아생전의 선악업을 비추는 업경대(業鏡臺)에 비치는 모습이 참으로 특이했다지. 염라가 머리를 붙잡고 고민할 정도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는가?』

    업경대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염라가 염라대왕이라는 건 알겠다.

    시왕 중의 대표라고 불리면서 가장 잘 알려진 염라대왕이 고민했다는 말에 이상하게 불안했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가 씁쓸하게 웃는 전륜대왕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염라가 고민하다 이한에게 물었지. 네 업이 이리도 많아 판결이 고민되는데 네 의견은 어떠냐고. 그때 이한이 무어라고 한 줄 아는가?』

    “……아니요.”

    『‘명부의 왕이라는 자가 스스로 결정 하나 하지 못할 만큼 하찮을 줄이야. 지상의 모든 인간이 참으로 불쌍하구나.’라고 했네.』

    뭐? 형을 줄여 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국에 염라대왕을 자극했다고? 너무 놀라운 나머지 입이 쩍 벌어졌다. 전륜대왕이 허허허 웃었다.

    『그 자리에 없어서 염라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건너 들으니 죄목을 적은 두루마리를 찢었다는 소문이 있어.』

    “……맙소사.”

    엄청난 죄를 지어 소멸하지 못하는 건 줄 알았는데. 염라대왕에게 제대로 밉보여서였던 걸까.

    다소 황망해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하람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럼, 그때 그 일로 지금까지 벌을 받고 있는 건가요?”

    『다행히 염라의 일은 염라의 선에서 끝난다네.』

    “아…….”

    『혀가 뽑힌 채로 다음 왕, 변성에게 넘겨졌지.』

    안도했다가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람이 당황한 얼굴로 혀를, 하고 한 손으로 제 입가를 덮었다.

    『이한을 위한 추선 공양(追善供養)이 없기도 없고, 반성하는 기미가 조금도 없어 심판이 길어졌어.』

    전륜대왕의 말에 뒤늦게 이한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전에 지나온 아홉 개의 지옥에서 이미 많은 것을 잃은 상태였다. 스스로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라던 말이.

    『지금의 이한을 보면 못 할 것이 없어 보이겠지만 길어지는 심판 기간 동안 지금의 어린 주인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

    어느 요괴를 만나도 당당하던 이한이 아무것도 못 했다니. 선뜻 믿어지지 않아 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전륜대왕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하늘과 지옥의 일이거든.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말을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게 당연하니 걱정할 것 없네.』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제가 검을 배우거나, 활을 배운다고 해도 말인가요?”

    아쉬움에 조심스레 묻자 입가로 술잔을 가까이하던 전륜대왕의 손이 멈췄다, 이내 술잔을 비웠다.

    『……어린 주인은 참 신기하군.』

    시종일관 낮던 전륜대왕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하람이 예? 하며 의아한 기색을 비치며 어느새 빤히 응시하는 전륜대왕을 마주 보았다.

    『윤회를 하다 보면 달라지기 마련인데 어린 주인은 그대로야.』

    윤회? 그대로? 하람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제 전생을 아시나요?”

    이한의 기억을 통해 그의 기억과 제 전생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제가 전생을 기억하면 이한에게도 도움 된다는 것!

    하람이 놀라움과 기대감에 소리치듯 크게 묻자 전륜대왕이 미간을 좁혔다가 장죽을 입에 물었다.

    『윤회 바퀴의 마지막을 담당하는데 어찌 만나지 않았을까.』

    “어, 그, 그러면 제 전생…….”

    『우리 어린 주인께서 마냥 착한 줄만 알았는데, 잔꾀를 부릴 줄도 아시는구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가당치도 않은 장난을 친 아이 보듯 보는 전륜대왕의 시선에 어색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저는 이한 님을 도울 방법이 전혀 없나요?”

    이한을 도울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긴장하는데 부연 연기가 옅게 번졌다.

    『어린 주인은 무슨 일을 해도 날붙이가 아니라 펜을 잡을 팔자(八字)다.』

    “아…….”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사무실에 더 있긴 한데 팔자라니. 당황스러운 와중에 전륜대왕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혹시, 이한에게 검이나 활을 배운다고 그리 말하셨는가?』

    “……네.”

    갑자기 이한을 왜 꺼낼까. 의아해하며 그렇다고 답하자 전륜대왕이 하하 웃었다.

    『그것참 볼만했겠구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재미있어 죽으려고 하는 전륜대왕에게는 미안하지만 검을 배우겠다고 할 당시의 상황이 참 냉랭했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한숨 쉬듯 작게 덧붙이자 상체를 떨며 웃던 전륜대왕이 그러냐고 하며 시선을 맞췄다.

    『어찌 이리도 똑같을까.』

    전륜대왕이 아이고, 소리를 내더니 술잔을 들었다.

    『기억을 찾았는지 모르겠는데, 어린 주인께서는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전생에도 이한에게 똑같이 말했었다네.』

    “네?”

    이건 처음 듣는다. 새로운 내용에 눈이 확 뜨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전륜대왕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특한 작은 주인에게 선물을 줘야겠다, 생각했는데.』

    전륜대왕이 술잔을 내려놓더니 하람의 앞으로 손을 길게 뻗었다. 곧 딱! 경쾌하게 손을 튕겼다. 검은빛이 짧게 번쩍했다.

    ‘……제가 검을 배우면, 함께 갈 수 있습니까?’

    메아리처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엄동설한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전신이 추워졌다.

    닭살이 오소소 올라올 만큼 오싹했다. 몸을 끌어안고 떨다가 작은 술잔 위로 무언가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어, 하고 술잔을 보았다.

    “……손?”

    반듯한 느낌의 손이 마디가 반듯하면서도 긴,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한 손끝을 조심스레 부여잡았다.

    ‘제가 활을 쏠 줄 알면, 저도 이한 님 곁에 있을 수 있을까요?’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한 님을 돕고 싶은데 또 그만큼…… 홀로 있는 것이 외롭고, 너무 힘이 듭니다.’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를 끝으로 술잔 위로 비치는 손이 사라졌다. 목소리도 더 들리지 않았다.

    술잔을 내려다보던 하람이 천천히 고개 들었다. 전륜대왕이 약하게 미소 지었다.

    『말했지 않으냐.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똑같이 말했다고.』

    지금까지 찾은 기억으로는 이한이 저를 꽤 아니, 아주 많이 의지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번 기억은, 마치 제가 이한에게 매달리는 것 같다. 당황스러워졌다.

    『당황했나 보구나.』

    “네? 네, 조금…….”

    당황도 당황인데, 전생의 기억이라지만 어쩐지 조금 부끄럽다.

    누구한테 매달려 본 적 없는데. 지금과 너무 다른 전생에 얼굴이 슬쩍 달아올랐다.

    『분명 몇 번이고 윤회했을 터인데, 참 신기하지. 안 그런가?』

    결국 손등으로 홧홧한 뺨을 꾹꾹 누르다 전륜대왕의 말에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이한 님과 제가 연관되어 있는데 어째서 저만 윤회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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