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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54)화 (5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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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전륜대왕? 명부 시왕 중의 한 명인 그 오도전륜대왕? 인자한 인상인 남자의 정체를 듣자마자 하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상자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상자가 뚝 떨어졌다.

    온갖 장난감에 묵직한 상자가 발등 위로 떨어졌다. 하람이 악! 비명을 짧게 질렀다.

    『아이고!』

    얼굴을 찌푸리고는 손을 쥐락펴락했다가, 상체를 달싹였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하람의 모습에 전륜대왕이 기함하며 벌떡 일어섰다.

    “괜찮나?”

    전륜대왕보다 먼저 일어나고, 다가온 이한이 하람의 발치에 있는 상자를 치웠다. 앓는 소리를 내며 발을 짚고 떨던 하람이 네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으으, 어떻게 된 거예요?”

    “상자가 떨어졌다.”

    “아니, 대왕님 말이에요.”

    전륜대왕이 조만간 만나러 오겠다고 하고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오지 않는구나, 했는데 정말 뜬금없이 나타났다.

    이한이 알고서 숨긴 건 아닐까.

    하람이 숙이고 있는 상체를 바로 했다. 앞에 서 있는 이한의 팔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며 궁금함과 의심을 담아 물었다. 이한이 당기는 힘에 상체를 숙였다가 미간을 좁혔다. 이내 전륜대왕을 힐끔 보았다.

    “저 영감이 올 줄 알았냐고 묻는 거라면, 몰랐다.”

    “……정말이죠?”

    “연락 따위를 모르는 영감이라, 나도 먼저 와 있는 거 보고 뭔가 했다.”

    정말 몰랐는지 작은 얼굴에 마뜩잖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거짓이라고 보기 어려운 노골적인 기색에 뒤늦게 현실감이 들었다. 목이 바짝 탔다.

    어쩐지 있는 줄도 몰랐던 할아버지를 난데없이 만난 기분이다. 상자를 한쪽 팔로 안고 앞장서는 이한을 뒤따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녕하세요.”

    『어린 주인, 드디어 만나는군. 그래, 발은 괜찮은가?』

    인사 후 이한의 옆에 조용히 앉자 전륜대왕이 반색하며 맞이해 주었다. 하람이 예에, 작게 답하며 술잔을 든 전륜대왕을 살폈다.

    기름칠한 것처럼 한 올 빠짐없이 쓸어 넘겨진 새카만 머리카락과 시원시원하면서 진한 이목구비, 좋은 체격까지. 가까이에서 보니 깔끔한 인상의 미남이다.

    그런데 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거지?

    어쩐지 체육복 같은 트레이닝복을 의아하게 보는데 전륜대왕이 장죽을 든 이한을 보았다.

    『소개해 주지 않는 거냐?』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소개가 필요하지?”

    『쯧쯧. 내게 소개해 달라는 게 아니라 어린 주인에게 나를 소개해 주라는 말이다.』

    한심함이 물씬 느껴지는 전륜대왕의 말에 이한의 얼굴이 구겨졌다. 곧 입가로 가까이 가져가던 장죽을 내리며 한숨 쉬었다.

    “이름 알려줬으면 됐을 텐데. 참 귀찮군.”

    『……눈치도 없고, 버릇도 없는 놈. 그러니 네가 여즉 혼자인 거다.』

    “노안이 왔나. 옆에 사람 있는 거 안 보입니까?”

    사이 좋은 부자지간 같아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 얼굴이 조금 닮은 것도 같고. 주책맞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고 또 귀찮아하는 것 같은 이한과 아들을 한심해하는 아버지 같은 전륜대왕을 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전륜대왕이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미소 지었다.

    『놀란 것 같구나. 연락을 하고 여유 있게 오려고 했는데 아니, 오늘따라 일이 없지 무어냐. 언제 또 이럴지 몰라서 얼른 왔단다.』

    “……아, 그러시군요.”

    『나는 명부의 시왕 중 마지막 왕인 오도전륜대왕이라고 한단다.』

    자애로우면서도 인자한 목소리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람도 따라서 슬쩍 웃었다.

    “안녕하세요. 바쁘신데도 보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멀리서 보던 것처럼 기운이 좋구나. 그래. 오늘은 뭘 했느냐?』

    별안간 전륜대왕이 화려한 주안상 위를 손으로 슥, 훑었다. 그러자 하람의 앞에 앞접시와 수저가 생겼다. 하람이 깜짝 놀랐다가 아, 하고 술잔을 드는 전륜대왕을 보았다.

    “남산에 누가 기도터를 헤집고, 병을 고쳐 주는 자가 있다고 해서 남산에 다녀왔습니다. 병을 고쳐 준다는 자는 묘두사인 걸로 확인했는데, 나티가 나타나면서 기도터를 헤집는 존재는 확인하지 못했어요.”

    『나티?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술잔을 내려놓던 전륜대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잡고 있던 술잔을 다급하게 내려놓고 하람을 살폈다. 하람이 그게, 하고 이한을 보았다.

    “저는 괜찮은데, 이한 님이 다치셨어요.”

    전과 다를 것 없는 하람을 보던 전륜대왕이 한 박자 늦게 이한을 보았다. 그슨대와 싸운 이후로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검은 부분을 훑더니 어디를 다쳤냐고 물었다. 이한이 다 들리게 콧방귀를 뀌었다.

    “다 지켜보고 있으면서 뭘, 모른 척합니까.”

    『내가 네놈처럼 할 일 없는 놈으로 보이느냐? 아니, 그냥 말해 주면 혀에 가시가 돋느냐? 왜 이렇게 툴툴거리는 게야?』

    전륜대왕과 이한이 다시 투닥투닥 싸우기 시작했다.

    심판관과 죄인이라서 사이가 안 좋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을 신기하게 보다 슬쩍 젓가락을 잡았다. 영감 말 참 많다, 너는 성격이 글렀다 하고 말싸움하는 두 사람을 보며 육회를 슬쩍 집어 먹었다.

    한 입, 두 입. 집어먹다 보니 술이 당겼다. 제 앞에 술잔이 없어 이한의 술잔을 말없이 잡았다.

    “그러니까, 내 성격이 이런 걸 이제 알, 그만.”

    『너는, 아이고. 어린 주인아, 안 된다.』

    “……네?”

    맑은 술이 든 술잔을 입가로 가까이 가져가자마자 이한과 전륜대왕이 급하게 막았다. 하람이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막는 두 사람의 모습에 놀라 굳었다.

    “그건 인간의 술이 아니다. 우렁 도령에게 말할 테니 잠시 기다려라.”

    이한이 하람의 손에 잡혀 있는 제 술잔을 가져갔다. 전륜대왕이 정자 앞에 서 있는 방상시 탈을 쓴 도깨비에게 몸을 돌렸다.

    『주방에 가서 인간의 술을 가져오거라.』

    방상시 탈을 쓴 2m는 거뜬히 넘는 거구의 도깨비가 허리를 숙였다. 곧 쿵쿵 소리 내어 주방으로 떠나더니 그의 손가락만 한 소주를 한 병 가지고 왔다.

    『저놈이 내 허락도 없이 한 잔 줬다고 해서 내 얼마나 놀랐는지. 어쩔 수 없었다지만 죽은 것들만 마시는 것이니 다시는 마시지 말거라.』

    전륜대왕이 도깨비가 쭈뼛쭈뼛 내미는 소주병을 받았다. 알겠느냐? 하고 입구를 한 번에 개봉했다.

    “……아, 네.”

    이한도 모자라 전륜대왕까지 막으니 왜 마시면 안 되는지 물으면 안 될 것 같다. 하람이 두 손으로 잔을 잡고 내밀었다.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다쳤느냐?』

    별다른 말 없이 잔을 기울이던 전륜대왕이 장죽을 입에 문 이한을 보았다. 햄스터처럼 이것저것 조금씩 먹는 하람을 보던 이한이 장죽 끝을 입가에서 떼어 냈다.

    “소멸하지 않을 정도.”

    『제법 다쳤나 보군.』

    “나티가 등을 다 할퀴었어요.”

    이한의 대답이 너무나 태연자약하다. 마치 남의 상처를 말하듯 무심한 대꾸에 말없이 안주를 먹던 하람이 얼른 끼어들었다. 하람의 말에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전륜대왕이 굳었다.

    『……나티가 등을 할퀴었다고? 어디 보자.』

    전륜대왕이 들고 있던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동시에 이한이 드러내 놓고 귀찮다는 기색을 내보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멸 안 하고 잘 살아 있는데 뭐가 그리 궁금한지, 원.”

    『아니, 등 보여 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이리 버티는 거냐?』

    그저 셔츠를 벗으면 그만인데 귀찮아 죽으려고 한다. 셔츠를 벗지 않고 그저 연기만 내뿜어 대는 이한의 모습에 전륜대왕이 버럭 소리치고는 단박에 일어났다.

    『이렇게 버티는 걸 보니 내가 꼭 봐야겠다!』

    설마? 하는 순간 전륜대왕이 이한이 입은 셔츠 칼라를 덥석 잡더니 셔츠를 아무렇게나 죽죽 당겼다. 이한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하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영감, 결국 돌았나?”

    당기는 힘에 셔츠를 잡아 주던 단추가 맥없이 툭툭 뜯어졌다. 얼마 있지 않아 셔츠가 반쯤 벗겨졌다. 막무가내로 나서는 전륜대왕을 막아도 될까, 두 손을 내밀고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람이 헉! 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셔츠에 가려졌던 처참한 등이 드러났다. 나티의 굵은 손톱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한의 등에 전륜대왕의 얼굴이 굳었다.

    예상보다 상태가 심각한지 전륜대왕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하람이 눈치를 살피는데 전륜대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을 제법, 찾았나 보군.』

    등을 다 잡아먹고 있는 시커먼 상처를 살피던 전륜대왕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 속삭임을 들은 하람이 저도 모르게 어?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이한이 쯧, 혀를 차고는 손을 튕겼다. 새 셔츠가 입혀졌다.

    “무슨, 말인가요?”

    기억을 제법 찾았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불편한 기색의 이한과 얼빠진 전륜대왕을 번갈아 보던 하람이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꺼냈다.

    하람의 질문에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엉거주춤 서서 답을 기다리던 하람이 이한의 이름을 낮게 부르며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어린 주인. 이한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굳게 다물린 이한의 입술을 보는데 전륜대왕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람이 시선을 돌려 이한을 보는 전륜대왕을 보았다.

    『이놈 이러다 기억 찾기도 전에 육신이 먼저 사라지겠다. 명부에 가 있거라.』

    전륜대왕이 허공에 손을 짧게 저었다. 왜? 하자마자 정자 바로 옆으로 언제가 보았던 문이 생겼다.

    도깨비가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이한에게 따라오라는 듯 턱짓했다. 이한이 콧방귀 뀌며 열린 문과 도깨비를 모두 무시했다.

    『계속 똥고집 부릴 거냐.』

    전륜대왕이 손을 들었다. 장죽을 입에 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던 이한이 쯧, 혀를 찼다.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음산한 경고를 끝으로 이한이 도깨비와 문을 넘었다.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의심하고는, 쯧쯧.』

    이한과 도깨비가 떠나면서 정자에 하람과 전륜대왕만 남게 됐다.

    하람이 방금까지 이한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다 그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륜대왕이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어린 주인께서는 궁금한 것이 많겠지. 이한이 떠났으니 이제 편하게 얘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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