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53)화 (53/87)

53

귀가 얼얼하다 못해 등골이 오싹한 소리에 몸이 바짝 굳었다.

하람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자마자 이한이 검을 내던지듯 없애고 안아 들었다. 날듯이 빠르게 달렸다.

“내가 예상하는 것이 나타난 거라면 지금 내 상태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다.”

“이, 이한 님이요?”

갑자기 몸이 들렸다. 하람이 깜짝 놀라 이한의 어깨를 짚었다가 그의 말에 소리 없이 기함하며 꽉 부여잡았다.

느릿느릿 들어왔던 조금 전과 달리 쫓기듯 급하게 나가는데 쿵쿵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이한의 목과 어깨를 안고 있던 하람이 덜덜 떨다 무기처럼 꽉 쥐고 있는 손전등으로 앞을 비췄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금세 동굴 밖으로 나왔다.

“저쪽, 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속인들이 동굴 앞에 두었던 음식과 양초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다. 이한에게 주차장 쪽을 알려주던 하람이 어질러진 바닥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한이 하람을 따라 아래를 힐끔 보았다가 달렸다.

쿵, 쿵! 꼭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산이 울렸다. 그리고 꼭 곰이 내지르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이한의 품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하람이 뒤를 보았다.

“……곰?”

동굴 입구에 곰으로 보이는 붉은색 털의 거대한 것이 서 있다.

조금만 늦었으면 만났을 엄청난 크기의 곰을 멀거니 보다 곰의 정체를 번뜩 알아차렸다.

나티.

산을 들어 다른 곳으로 옮길 만큼 괴력을 가진, 짐승의 모습을 한 도깨비 나티였다.

나티가 남산에 왜? 라고 생각하는데 시뻘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하람의 입에서 탄식이 나오는 순간 나티가 크게 울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지는 나티의 모습에 이한이 하람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더했다.

그렇지 않아도 빨랐던 달리기가 더욱 빨라졌다. 훅훅 달라지는 풍경에 하람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도망가면 아래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나? 나무 위는 괜찮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나티의 울음소리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결국 감은 눈을 떠 뒤를 보았다가 다급하게 이한의 소매를 당겼다.

“뒤!”

하람이 품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나티의 발톱이 이한의 등을 그었다. 이한이 상체를 푹 숙이며 얼굴을 구겼다가 소환한 검을 잡았다. 검집에서 검을 빼 나티의 몸을 길게 벴다.

촤악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튀고 나티가 비명 지르듯 소리를 높였다.

“이한 님!”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가득한 땅바닥을 구른 하람이 큰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쿵쿵 발을 굴렀다가 검에 베인 몸을 더듬었다 하는 나티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이한에게 달려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굳어 있던 이한이 하람을 따라 앞으로 뛰었다.

나티가 몸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사이 거리가 멀어졌다.

계속 달려 턱 끝까지 숨이 찼다. 하람이 쇠 맛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여전히 쿵쿵거리며 크게 우는 나티를 보았다가 손을 잡고 있는 이한을 보았다.

“괘, 괜찮으세요?”

이한의 얼굴과 상체에 묻어 있는 피가 나티의 것인지, 이한이 흘린 것인지 모르겠다. 걱정스레 보며 묻자 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보았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속아 날뛰는 것 같군.”

나티는 험악한 외형과 달리 지능이 낮았다. 인간에게 잘 속았다.

정말 인간에게 속은 걸까. 하람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럼 나티가 묘두사를 해치고, 기도터를 헤집는 걸까요?”

“속았다면.”

도대체 누가 저 대단한 나티를 속였을까. 분을 참을 수 없는지 동굴 입구에 있던 바위를 깨부수고 있는 나티를 보았다가 다시 바삐 달렸다.

화날 대로 화난 나티를 피해 서둘렀더니 주차장 근처에 금방 도착했다. 하람이 더 보이지 않는 나티에 이한의 손을 놓았다.

“기도터는 다음에 둘러봐야겠네요.”

병을 고쳐주는 자에 대한 소문은 묘두사인 것으로 확인했는데 기도터를 헤집는 것은 알아내지 못했다.

다시 가자니 나티가 있다. 다음에 확인하는 것으로 하려는데 무슨 일인지 이한이 산을 가만 본다.

“산에 뭐 있어요?”

옆으로 가 서자 이한이 흠, 소리를 냈다.

“사기(死氣)가 보여서.”

“안 좋은 기운이요?”

사기라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남산을 보는데 어두운 탓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해서 노려봐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몇십 마리의 새 떼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불안하네요.”

나티 탓에 날아가는 걸까. 아니면 불길한 일이 벌어지려는 징조인 걸까. 별 하나 없는 하늘을 보다 아, 하고 이한을 보았다.

“등. 등 봐요.”

분명 나티의 발톱에 이한의 등이 그였었다. 뒤늦게 생각난 일에 얼른 이한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윽.”

너른 등에 발톱 자국이 선명하다. 너른 등을 다 뒤덮어 흉측하다 못해 끔찍한 상처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괴력의 나티답게 상처 수준이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르다. 더 볼 수가 없어 하람이 저도 모르게 상처를 외면했다.

흉측하고, 거대한 상처가 잔상처럼 자꾸만 생각난다. 속이 울렁거려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상태로 심호흡 후 마른세수를 했다가 느지막이 눈을 떴다.

“안 되겠어요. 이한 님, 지금 바로 집에 가세요.”

상처를 봐서일까.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이한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한 것 같고, 힘이 없어 보인다. 걱정이 돼 어서 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람의 말에 무표정하던 이한의 얼굴이 얼핏 구겨졌다. 곧 팔짱을 꼈다.

“혼자서 뭘 한다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저도 바로 집으로 갈 거예요.”

집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 않겠지만 그보다도 이한의 상처가 더 심각하다.

집에 가자마자 구렁덩덩신선비에게 묻거나, 책방채에 가서 치료와 관련된 요괴나 귀신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어서 가라고 하며 이한의 팔을 밀었다.

“내가 없으면 안 될 텐데.”

“아니요.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먼저 가세요.”

노앵설이든, 우렁 각시든, 우렁 도령이든, 누구든. 이한의 상처를 빨리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하람이 제발 가라고 하며 떠밀었다.

정말로 혼자 집으로 잘 갈 수 있다는 듯 단호하면서도 애절하다.

이한이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을 보다 시선을 아래로 슬쩍 내렸다.

어서 가라고 떠미는 손이 하얗게 질려 있다 못해 덜덜 떨고 있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떠는 하람의 손을 보다 고개를 짧게 가로젓고 팔짱을 풀었다.

“같이 가지.”

“아니, 저 혼자 갈…….”

“부행신에게 홀렸던 모습을 보았는데 어떻게 혼자 보내지.”

“그건…….”

“혼자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한이 어서 차에 타라는 듯 차를 턱짓했다. 하람이 차를 힐끔 보았다가 다시 이한을 보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다시 한번 더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턱이 당길 만큼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한 님, 제가…….”

‘길을 걷다 넘어지진 않을까. 누굴 잘못 따라가지 않을까. 무얼 잘못 먹고 체하진 않을까. 나는 하람이 네가 늘 걱정된다.’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이 과하다고 말하려는데 머리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울린다.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몸이 굳었다.

“……아무래도, 나는 예전부터 널 꽤나 지독히도 걱정한 것 같군.”

크게 뜨인 눈이 시릴 즈음. 이한이 깊은 그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입을 작게 벌린 채로 굳은 하람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크게 쓸어넘겼다. 이한을 보며 눈을 끔뻑이는 하람의 뺨이 점점 붉어졌다.

“같이 가지.”

이한이 손을 튕겼다. 나티의 발톱에 험악하게 찢어져 있던 셔츠가 새 셔츠로 바뀌었다.

결국 함께 돌아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하람이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사이 이한이 조수석에 앉았다. 곧 차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운전하고 있는데 운전에 집중이 안 된다.

시종일관 말없이 정면을 주시하며 운전하던 하람이 이한을 힐끔 보았다.

기억을 찾으면 이한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인지 기쁜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라서일까. 아니면 남자와 사귀었다는 게 충격적이라서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제가 연관되어 있어서?

“저, 이한 님.”

대시보드 부근을 보던 이한이 대답 없이 하람을 보았다.

“아, 아니에요.”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에 기쁘지 않냐고 물어볼까 했는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다.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있는 사이 차가 집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한이 사라졌다.

“하…….”

드디어 이한이 떠났다. 긴장이 확 풀렸다.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운 하람이 한숨을 길게 쉬며 축 늘어졌다.

기억을 찾아도 기뻐하기는커녕 복잡해 보이는 이한의 모습과 그의 몸에 가득한 상처에 머리가 복잡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진짜 아무것도 없나?”

이한에게 마냥 기대고 있는 이 상황이 도통 적응되지 않는다.

이한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혼자 다 해결했었는데.

이한도 이한이지만 운전 말고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처지가 너무 답답했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갑갑한 한숨을 푹 쉬고는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혼자 고민을 좀 하고 싶은데 이한이 걱정해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차에서 내렸다.

안채를 지나던 중 안 자고 바쁘게 움직이는 매형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낮게 인사했다.

“아, 처남. 오랜만이네.”

“뭐 하세요?”

“내일 벼룩시장 열린다고 해서 다움이 장난감 정리하고 있었어.”

매형이 애들은 금방 질려한다면서 상자 안을 보여주었다. 하람이 상자 안에 있는 장난감을 보며 새것 같다고 읊조리다 매형을 보았다.

“이거 다 정리하는 거예요?”

“응. 왜?”

“제가 살게요.”

“에이, 사긴 뭘 사. 그냥 가져가.”

지갑을 꺼내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넘겨준다. 하람이 묵직한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매형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사랑중문을 낑낑대며 열고, 닫았다.

상자를 꼭 안고서 걷는데 무슨 일인지 노앵설의 인사가 들리지 않고, 달려오지도 않는다.

의아해하며 걷다 환한 정자와 그 앞에 서 있는 둥근 눈이 네 개에 입이 볼까지 찢어지고, 귀가 커다란 탈을 쓴 자를 뒤늦게 발견했다.

『오, 드디어 왔군.』

낯선 존재에 뭐지, 하고 정자를 봤는데 이한은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서른에서 마흔 살 정도 됐을 법한 남자가 하람을 보며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하람이 정체 모를 남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가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물고 있던 장죽을 멀리했다.

“인사해라. 오도전륜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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