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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52)화 (5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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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이한과 사귀었던 사이였다면 아이가 없을 거고, 자식을 낳지 않은 죄에 포함된다.

    어떠냐는 뜻을 담아 보자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훅 들었다.

    “내가 자식을 가졌었는지, 가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다.”

    전부가 아니라고 하니 안도감이 든다.

    휴, 한숨 쉬다 문득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벌을 이리도 오래 받는 걸까 싶어졌다.

    과거에 가장 심했던 죄가 무엇일까. 살생? 불륜? 아니면 패륜?

    “……잠깐만.”

    이한의 가슴에 반쯤 기대 있던 하람이 상체를 들었다. 눈에 보이는 얼굴을 빤히 보았다.

    이한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스물 후반에서 서른 중반 즈음으로 보였다. 요즘 시대에는 결혼 적령기가 아니지만 과거에는 혼인하고 남았을 나이였다.

    만약, 혼인을 했다면?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아이도 가지지 않았다면?

    “이한 님, 혼인하셨어요?”

    너무 앞서 나간 것 같지만 혹시 모른다.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걸 보면 혼인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고민하다 묻자 이한이 미간을 좁혔다.

    “……모르겠군.”

    한참 고민하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썩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습에 똑같이 미간이 좁혀졌다.

    “상투 올린 적 있으세요?”

    “건상투라고 혼인하지 않은 남자가 혼인한 것처럼 상투 트는 일도 있다.”

    상투로 혼인 여부를 판별하려고 했는데, 글렀다. 하람이 길게 침음하다 생각에 빠진 이한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이한과 꽤 많은 스킨십을 했다.

    손을 잡았고 끌어안았고, 뽀뽀도 했고, 키스도 했다. 이제 남은 스킨십은 하나뿐.

    키스에 거부반응을 보였는데 그…… 무리다. 하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이한의 가슴에 기댔다.

    “어떻게 하면 또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악업을 줄이는 것도 좋지만 이한만 너무 무리한다.

    이왕이면 그가 무리하지 않는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은데 방법이 또 없을까.

    조금 전과 다른, 입술이 다 부르트도록 짙게 키스해 볼까. 고민하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악업을 줄이는 거다.”

    이한이 제게 기대 누운 하람을 약하게 안았다. 흐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하람이 놀랐다가 이내 씩 웃었다.

    “그거라면 제가 들은 게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사람이 많네요.”

    늦은 시간의 남산에는 예상보다 사람이 제법 있었다.

    하람이 난처한 눈으로 옆을 보았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기도터라는 건 어디 있지?”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듯 태연자약하다. 남산에 오기 전부터 기운을 한계까지 죽였다는 이한을 보다 이쪽이요, 하고 멀쩡한 계단 너머로 이끌었다.

    민원에 진입로 입구가 폐쇄되고, 길이 따로 없어 산을 타야 했다.

    출발하기 전 순영에게 기도터라는 게 산 곳곳에 있고 또 문제의 헤집어진 기도터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른다고 들었다.

    손전등이 내뿜는 새하얀 불빛에 의지해 산을 이리저리 헤매길 몇 분. 답답함에 짜증이 올라올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성큼성큼 산을 오르는 나이 든 여자와 남자를 발견했다.

    등산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 가벼운 차림, 묵직해 보이는 짐과 둘둘 말린 자리, 거침없는 발걸음. 기도하러 온 무속인이 분명했다.

    하람이 조용히 손전등을 껐다. 발소리를 죽여 무속인들을 뒤따랐다.

    그렇게 또 한참 걷는데 옆에서 따라 걷던 이한이 흠, 소리를 냈다.

    “위로 갈수록 바람이 강해지는군.”

    하람이 음? 하고 의아해하자 들고 있는 검을 들어 보였다. 검 끝에 장식된 검붉은 색 유소가 눈에 띄게 살랑거렸다.

    “산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불었어야지.”

    이한이 콧방귀를 뀌는 순간 무속인들이 멈춰 섰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는데 그사이가 뚫려 있었다. 그리고 제단 같은 낮은 테이블이 있었다.

    무속인들이 제단 앞에 작은 짚자리를 펼쳤다. 그 위로 무릎 꿇고 앉아 가지고 온 짐을 풀었다.

    하얀색의 큰 기둥 양초를 제단 위에 조심스레 두고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양초 사이로 일회용 접시를 몇 개 두더니 돼지머리부터 떡, 붉은 과일 등을 꺼냈다. 어쩐지 등 뒤가 싸해지고, 입이 말랐다.

    “……저거, 괜찮을까요?”

    저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팔짱을 낀 채로 멀뚱히 서 있는 이한을 보았다. 짝다리를 짚고 서서 무속인들을 보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괜찮지 않기를 바라야지.”

    무속인들이 입고 있는 코트를 벗었다. 하늘하늘한 무복 차림의 여자가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대신부채를 촥 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남자, 잽이(무악을 연주하며 반주를 하는 악사)가 전통 북을 약하게 쳤다. 제(祭)가 시작됐다.

    무어라고 하며 바삐 발을 놀리는 무속인, 그에 맞춰서 북을 치는 잽이. 평소 보기 어려운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점점 추워졌다.

    “왜 이렇게 춥지?”

    나무 뒤에 숨어 무속인들을 보던 하람이 으슬으슬한 팔 위를 슥슥 쓸었다. 이한이 한 걸음 멀어지며 하늘을 훑었다.

    “이상하군.”

    “예?”

    “들리는 소리가 없어.”

    푸드득 소리와 함께 새카만 새가 빠르게 떠났다. 하람이 깜짝 놀랐다가 저도 모르게 이한의 팔을 잡았다.

    “소리가 없다니요?”

    “주변에 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들리는 소리가 전혀 없다.”

    떠들기 좋아하는 목신(木神)부터 산을 떠도는 귀신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한이 미간을 좁히며 바로 옆 나무를 짚었다.

    “……기운이 나쁘진 않은데.”

    의아함이 담긴 읊조림과 함께 계속 이어지던 제가 끝났다.

    제를 올렸던 두 사람이 무어라고 말을 주고받더니 초와 음식을 두고 짚자리와 북을 챙겨 내려갔다. 얼른 나무 뒤에 숨었다.

    “……뭐지? 왜 아무 일도 없지?”

    저 동굴이 아닌 걸까. 예상과 다르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몇 번 그랬듯이 어마어마한 요괴에 문제가 생기고, 이한이 짠하고 요괴를 처리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얌전한 상황에 하람이 당황한 사이 이한이 한 걸음 나섰다.

    “어디 가세요?”

    “굴에. 조심해서 와라. 바닥에 뭐가 많이 묻어 있다.”

    아무 소리도 없이 굴로 다가간다. 하람이 숨을 삼켰다가 뒤따랐다.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와 나뭇가지 따위를 밟으며 조심조심 걷는데 기분 탓일까. 주변에 있는 나무의 굵직한 나뭇가지가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짧게 흔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한 님.”

    작게 부르자 한 걸음 앞에서 뒷짐을 지고서 걷던 이한이 멈춰 섰다.

    “저만, 이상한가요?”

    뭐라고 할까. 어쩐지 동굴과 가까워질수록 숨이 지그시 막히는 것 같은 어떤 스산함이 들었다.

    목을 슬쩍 감싸고서 주변을 훑는데 별안간 이상할 정도로 계속 밝혀져 있던 양초 불이 훅 꺼졌다. 그리고 쉬이이, 바람 소리가 들렸다. 몸이 굳었다.

    “불안해할 것 없다.”

    다가온 이한이 하람이 꽉 쥐고 있는 손전등을 가볍게 그러잡고 대신 밝혔다.

    “위험한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는 말과 함께 굳은 어깨 위를 두 번 툭툭 도닥였다. 하람이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 몇 번 걷자 금세 동굴 입구에 발이 닿았다. 생각보다 굴이 깊은지 안쪽에서 후우웅,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꼭 대중목욕탕에라도 온 것 같은 습한 눅눅함이 느껴졌다. 하람이 습관처럼 마른침을 삼키고는 손전등으로 앞을 밝히며 걸었다.

    남산에 동굴이 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깊기까지 했다.

    동굴에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듣는데 별안간 이한이 멈춰 섰다. 멈추라는 듯 잡고 있는 검을 슬쩍 들어 보였다. 하람이 손전등 불빛에 반짝이는 검을 보다 시선을 들었다. 동시에 이한의 앞에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스으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동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것은 푸른 빛이 도는 반짝이는 비늘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몇 개인지 감히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비늘에 뱀인가, 했는데 새끼 고양이를 닮은 머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이한을 당장 잡아먹겠다는 듯이 바로 앞까지 온 커다란 머리에 호흡이 멈췄다. 하람이 굳었다.

    “무, 무슨.”

    “묘두사(猫頭蛇)다. 다른 요괴와 달리 인간을 좋아하고, 병을 낫게 하는 요괴로 겁낼 필요 없다.”

    이한이 하람에게 괜찮다고 하고는 손을 들어 묘두사의 뺨을 짚어 얼굴을 살폈다.

    “어디에서 또 화살이라도 맞은 건가. 피를 흘리고 있군.”

    쯧쯧 혀를 차자 묘두사가 대답하듯 새끼 고양이처럼 불안하면서도 힘없이 그릉거렸다.

    퍽 익숙한 소리와 얌전한 모습에 하람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빼 묘두사를 보았다.

    “이럴 수가…….”

    자세히 보니 정말로 새끼 고양이 얼굴과 뱀의 몸 곳곳에 벌건 피가 나오고 있고, 피딱지가 앉아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픈 느낌의 수십 개의 상처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람이 걱정스레 보는 동안 이한이 거친 숨소리를 내는 묘두사의 몸에 있는 상처를 살피고는 손을 내렸다.

    “인간이 이렇게 만든 건가?”

    거의 느껴지지 않던 이한의 기세가 점점 짙어졌다. 묘두사가 목을 울리며 들고 있는 머리를 내렸다.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입을 열었다.

    『그르…….』

    말을 할 힘도 없다는 듯 입을 몇 번 벙긋거리더니 금세 다문다. 이한이 느릿하게 끔뻑이는 눈을 보다 거대한 몸을 길게 훑었다.

    “기운도 약하군. 인간이 아니라면 다른 요괴와 싸우기라도 한 건가?”

    물음에 묘두사가 온몸을 떨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 다른 요괴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싶은 순간 묘두사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곧 전신을 감싸는 푸른 기운이 꺼졌다.

    『인…… 간…… 조심…… 나, 티…….』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작고, 힘없는 목소리를 끝으로 묘두사가 검은 연기가 됐다.

    꼬리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지는 묘두사의 모습에 하람이 저도 모르게 어, 하고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가락 사이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가고, 사라졌다.

    잡히지 않고 그대로 사라지는 연기를 멀거니 보는데 별안간 손이 덥석 잡혔다. 하람이 놀라 이한을 보았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지금 당장. 이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동굴 너머에서 구어어어! 거친 울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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