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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51)화 (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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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얼 준비한다는 걸까. 하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안채 쪽을 응시하는 이한을 보다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어떤 준비를 말씀하시는 건지 물어도 되나요?”

    이한이 고개를 돌려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궁금해하지 마라, 나중이 되면 알게 될 거다, 같은 답을 할까. 걱정하며 보는데 무슨 일인지 이한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말없이 빤히 응시하는데 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여행 잘 다녀와라.”

    “……정말요?”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예상하지 못한 선선한 허락에 기쁘기보다 이상한 의심이 들었다.

    “정말, 정말 허락하시는 건가요?”

    “그래. 기운이 맑은 순영과 함께 가니 별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유소를 줄 테니 전날 한 번 더 말해라.”

    허락도 모자라 아끼는 유소까지 준다고 한다. 하람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진짜로 허락하시는 건가요?”

    이걸 믿어도 되는 걸까. 의심을 담아 응시하며 묻자 장죽을 입가로 가져가던 이한이 시선을 맞췄다.

    “속고만 살았나?”

    “……아니, 너무 쉽게 허락하셔서요.”

    적어도 내 말이 말같이 안 들리냐, 같은 그런 말은 들을 줄 알았는데.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쉬운 허락에 맥이 딱 풀렸다.

    늘어져 앉아 이한을 보다 불현듯 영진이 말한 저승사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겐 허무맹랑하지만 또 모른다. 거기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한번 물어볼까. 홀로 끙끙 고민하다 슬쩍 이한을 불렀다. 이한이 대답 없이 하람을 보았다.

    “그…… 혹시, 차사랑 키 아니, 입, 맞춰 보신 적 있으세요?”

    조심스럽게 묻자마자 이한의 잘빠진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딴 것들과 왜 입을 맞추지?”

    역시 허무맹랑한 것이었던 걸까. 이한의 반응이 좋지 않다. 난감함에 마른침을 소리 없이 크게 삼켰다.

    “드라마를, 봤는데 차사와 입을 맞추면 전생을 기억할 수 있다고 봐서…… 혹시나 하고 여쭤봤어요.”

    변명하기가 무섭게 이한이 콧방귀를 뀌고는 하람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 장죽을 입에 물었다.

    하람이 조용히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다 멈췄다. 황급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한 님. 그럼 주인이나 다른 사람과 입 맞춰 본 적은 있으세요?”

    설마 하고 묻자마자 반듯한 이한의 얼굴이 또 구겨졌다. 곧 물고 있는 장죽을 짜증스레 내렸다.

    “내가 왜 인간과 입을 맞추지?”

    인간을 놀라게 하고, 잡아먹는 귀신은 있지만 입 맞추는 귀신은 없는 걸까. 반응이 예상보다 더 안 좋다.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아무래도 이것도 틀린 것 같다. 하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는 남은 차를 다 마셨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대로 넘어갈 줄 알았건만 역시나. 얼핏 짜증이 느껴지는 질문에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까 차사 이야기하다가 문득 이한 님과 연관된 사람과의 접촉은 어떨까? 하고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왜, 접촉이라는 게 친밀한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그 접촉을 통해 어떤 작용이 일어나 전생을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는데 엄청 기분 나빠한다.

    아무래도 우리 신께서는 좀 막힌 구석이 있는 듯하다.

    다시는 이런 질문 하지 말아야지. 하고 일어나려는데 이한이 입에 물고 있던 장죽을 내렸다.

    “네 말대로라면 내가 같은 남자인 너와 입을 맞춰야 한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비식비식 웃는 이한을 보던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할 것도 없죠.”

    이한은 모르겠지만 인간 남자랑 키스 그 이상도 했다. 키스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그 키스로 전생의 기억을 찾을 수 있다? 흔쾌히,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람이 놀란 듯 굳은 이한의 얼굴을 드러내 놓고 뜯어 보았다.

    성격은 모르겠지만 얼굴만큼은 확실히. 안 그래도 잘났는데, 머리카락이 짧아지면서 더 잘나진 것 같다.

    잘생긴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데 이한의 입이 느지막이 열렸다.

    “……뭐?”

    어렵게 열린 입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마치 한숨 같은 작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한과 어울리지 않는 맥없는 소리에 하람이 저도 모르게 짧게 웃었다.

    “기억 찾는 거 돕는다고 했잖아요.”

    여상하다 못해 호쾌한 답에 이한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 다시 보기 어려운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보던 하람이 그래, 하고 이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이렇게 된 거, 한번 해 볼까요?”

    분명 이한의 전생과 제 전생은 연관되어 있었다. 그저 만난 것만으로도 기억의 일부분이 돌아온 만큼 보다 가까운 접촉으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뭐?”

    “어린아이 앞에서 하기에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거 같으니 방에 가요.”

    하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장 얼마나 놀랐는지 장죽을 손에서 놓은 채로 굳은 이한을 일으켜 세웠다. 얼빠진 이한과 함께 그의 방으로 가고, 문 걸쇠를 걸어 잠갔다.

    “먼저, 가볍게 해 볼까요?”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무릎이 곧 맞닿을 만큼 가까이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하람을 지켜보던 이한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제정신인가?”

    입술 위로 입술이 닿지 않고 어처구니가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람이 감은 눈을 떴다.

    “제가 먼저 할까요?”

    “……이하람.”

    아무래도 우리 신께서는 같은 남자와 입 맞추는 상황이 영 탐탁지 않으신 거 같다.

    오래 살아서 깨어 있는 분일 줄 알았는데 보수적이시다.

    당장 잔소리를 쏟아낼 기세인 얼굴을 보다 그의 허벅지를 짚고 상체를 훅 들었다. 기습적으로 쪽, 입을 맞췄다. 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때요?”

    놀란 얼굴이 뽀뽀 탓인지, 기억 탓인지 모르겠다.

    모호한 이한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해볼까, 하는데 반듯한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이하람.”

    정말로 잔소리가 쏟아질 것 같다.

    하람이 두 손으로 이한의 양 뺨을 짚었다. 달려들 듯 온몸을 내던져 입을 맞췄다.

    쏟아지듯 기대 오는 하람의 무게에 이한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이한이 본능적으로 하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안았다. 동시에 열린 입술 사이로 말랑한 혀가 밀려들어 왔다.

    고른 치열, 뺨 안쪽, 입천장, 미끈한 혀. 하람의 혀가 이한의 입 안을 이리저리 헤맸다.

    제 입 안을 더듬듯 움직이는 혀에 딱딱하게 굳었던 이한이 뒤늦게 하람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하람이 순순히 밀려났다.

    “기억난 거 있어요?”

    사람과 똑같으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입 안을 나름대로 열심히 핥았다. 효과가 있는지 기대하는데 이한이 점점 얼굴을 구겼다.

    “이, 이게 지금…….”

    기억을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자극한 것 같다.

    잔소리도 모자라 당장 검을 들 것 같은 모습에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데 머리가 핑, 어지러웠다.

    익숙한 두통에 설마 하는 순간 이한과 시선이 부딪쳤다.

    ‘하람아…… 널 어찌하면 좋을까. 널 이렇게 옆에 계속 두고 싶은데, 내가 가는 곳마다 피와 칼이 낭자하구나.’

    ‘저도 ……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 이리와 나를 안아 주고, 내 귀에 대고 이름을 불러다오. 어서…….’

    노이즈가 낀 것처럼 정확하지 않지만 분명 이한의 목소리고, ‘하람아’라고 했다.

    “이, 이한 님, 지금, 들으셨어요?”

    하람이 이한의 어깨를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꽉 부여잡았다.

    하얗게 질린 하람을 말없이 멀거니 올려다보던 이한이 별안간 쫓기듯 다급하게 하람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슴이 쿵, 부딪쳤다.

    “이름, 내 이름을 불러라.”

    기억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느껴진 걸까. 늘 당당한 목소리와 강한 손이 사시나무처럼 안타까울 정도로 떨린다. 그러면서 숨소리까지 거칠어졌다. 하람이 당황했다가 느릿느릿 팔을 움직여 이한을 끌어안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짧게 잘린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이, 이한 님.”

    “……한 번 더.”

    “이한 님.”

    “……다시.”

    다시, 또다시. 요구가 몇 번이고 이어졌다. 힘 하나 없는 간절한 요구에 하람도 이한 님, 이한 님, 이한, 이한.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요구에 맞춰 이름을 부르길 몇 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요구가 더 없다.

    어느새 불안하던 이한의 숨소리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급하게 들썩이던 가슴도 고요해졌다. 그리고 하람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서도 힘이 빠졌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한에게 맞춰 하염없이 이름을 부르던 하람이 감은 눈을 떴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조심스럽게 상체를 조금 들었다.

    눈을 감고 있는 이한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하다.

    “……이, 이한 님?”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걸까. 슬쩍 부르자 눈이 스르륵 뜨였다.

    복잡함이 느껴지는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 눈을 가만 보는데 느릿하게 감겼다가 뜨였다. 조금 전보다 나은 상태에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 놀랐잖아요. 괜찮으세요?”

    걱정을 담아 보며 묻자 천장을 응시하던 시선이 움직였다.

    “……그래.”

    늦은 답과 함께 시선이 맞닿았다.

    “넌, 괜찮나?”

    마주한 시선과 얼굴, 목소리가 평소와 같다. 하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 가능하세요?”

    머리가 복잡했다. 당장 풀고 싶어 묻자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람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저희가 전생에 사귀었던 사이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헷갈렸는데 이번 기억으로 확실히 알게 됐다.

    이한이 전생의 저를 구했고, 이한과 저는 단순한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이한은 전생의 나를 꽤 의지했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널 구한 게 아니라 네가 날 구했다.’

    그래. 아주 많이 의지했다.

    그렇지 않냐는 뜻을 담아 빤히 보자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내가 널, 좋아했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반듯한 미간이 좁혀졌다. 그 모습에 하람이 따라서 미간을 구겼다가 별안간 아, 소리를 냈다.

    “그 제가 인터넷으로 오도전륜대왕님을 알아봤는데…….”

    언젠가 인터넷으로 오도전륜대왕을 검색해 본 적 있었다. 그때 보았던 내용 중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불안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에 끄응, 앓는 소리가 나왔다.

    “오도전륜대왕님이 특히 그…… 자식을 낳지 못한 죄를 다스린다고 하던데, 맞나요?”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지?”

    하람이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난, 뜬금없는 말을 한다.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훅 들었다. 하람이 그게, 하고 말끝을 끌었다.

    “이한 님이 과거의 저와 사귀면서 자식을 가지지 않아서 벌 받는 중인 게 아닐까,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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