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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악신? 요괴? 기도터? 이게 다 무슨 얘기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의아한 얼굴을 하자 순영이 미소 지었다.
“구업이라고 무속인이 무업을 중단하고자 할 때, 무업을 더 할 수 없을 때, 죽었을 때. 사용하던 신구를 사람들 모르게 산이나 땅에 몰래 파묻어 숨깁니다. 일반인 중에 기운을 타고난 자는 그 신구를 통해 무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무업이 끝나면 신구를 물려주거나 분해해서 버리는 줄 알았는데. 이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새로운 사실에 놀랐다. 하람이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자 순영이 아는 사람이 적은 내용이지요, 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게 무업을 하고자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신구로 저주를 하거나, 신을 바꾸려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찾아다니는 자들이 있는데, 기도터까지 헤집는다는 걸 보니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하지 않다 못해 위험해 보이는데.
절대 평범하지 않은 신구를 노리는 자에 관한 이야기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이한이 움직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이번 일은 악업과 연관된 게 없어 보이는데. 어떡해야 하지.
“또 나이 든 사람들이 남산에 병을 고쳐 주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오른다고도 합니다.”
“병을 고쳐 주는 자요? ……일단, 이한 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순영이 따로 말할 정도면 아무래도 이한에게 말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하람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고는 영진의 짐을 챙겼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사랑채에서 먹겠습니다.”
우렁 각시에게 밥을 먹고 간다고 하지 않았다. 연락해서 먹고 가겠다고 할 수 없어 순영에게 내일 같이 먹자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밥은?”
방에서 나가자 때마침 통화를 끝낸 영진이 다가왔다. 하람이 가지고 있던 짐을 넘겼다.
“사랑채에서 먹으려고.”
“사랑채에 뭐 꿀 발라 놨니? 못 가서 안달이네.”
입술을 삐죽이는 영진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다가 아! 하고 떠나려는 영진의 팔을 다급하게 잡았다.
“누나, 예전에 할머니랑 책 이것저것 읽었다고 했었지?”
“나? 몇 개 읽었지. 왜?”
언젠가 순영이 다음 주인으로 영진이 될까 봐, 가지고 있던 책을 보여 주었던 적이 있었다. 하람이 궁금해하는 영진을 빤히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전생의 기억과 관련된 내용 있었어?”
“전생? 없었던 거 같은데, 왜?”
“전생의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말이니?”
영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가 헛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하람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궁금할 수도 있지.”
“왜, 신께서 전생을 기억하라고 하셔?”
그 신의 전생과 제 전생이 연관 있는 거 같으니 찾아야 할 것 같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척 돌아서는데 영진이 그러고 보니, 하고 운을 뗐다.
“왜, 도깨비 나오는 드라마에서 저승사자랑 키스하면 전생 기억한다고 했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릴까. 하람이 드러내 놓고 황당한 얼굴을 했다. 영진이 뭐, 뭐, 하고 쪼았다.
“드라마는 허구잖아.”
“야, 문헌도 다 사실 아니거든?”
“……됐다. 갈게.”
영진이 아니라 순영에게 물었어야 했다.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슬리퍼를 신었다.
“마님이랑 식사 안 하십니까?”
사랑채로 가는데 안채로 향하던 강원댁과 마주쳤다. 하람이 멈춰 서서 깜짝 놀란 얼굴의 강원댁을 보았다.
“네. 사랑채에서 먹으려고요.”
“사랑채에서요?”
강원댁도 제가 사랑채에서 지내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채에서 밥 먹겠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 강원댁 반응이 이상하다.
무슨 일 있냐는 듯 보자 강원댁이 사랑채 쪽을 힐금 보았다.
“……계속 사랑채에서 드셨습니까?”
“예. 무슨 일 있나요?”
“아니요. 저는 사랑채에서 인기척이 없어서 하람 님이 집에서 지내시면서 사랑채에 잠깐잠깐 들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강원댁의 말을 가만 듣던 하람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인기척이 전혀 없나요?”
제가 소란스럽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긴 한데 불도 켜고, 대화를 하고,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인기척이 전혀 없을 수가 없는데 강원댁이 여상하게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스러워졌다.
만화나 소설 속처럼 결계 같은 것이 쳐져 있는 걸까.
“자, 잠깐만요.”
의아해하다 슬쩍 강원댁의 손을 잡고 사랑중문 앞으로 이끌었다.
“혹시 뭐가 보이시나요?”
하람이 닫혀 있는 사랑중문을 열었다.
지네 각시와 팔미호는 갔는지 환한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한과 노앵설, 고양이가 보였다.
아무 말 없이 과일을 먹고 있는 둘을 보는데 강원댁이 음, 앓는 소리를 작게 났다.
“……어둑한 사랑채만 보입니다.”
이한과 노앵설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닭살이 올라왔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멍하니 사랑채를 보는데 하람 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 차렸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저는 그럼 가 볼게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남들 눈에 어찌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랑채에서 지내는 게 나쁘지 않다. 하람이 어색하게 인사한 후 중문을 넘어가고, 닫았다.
『하람아!』
사랑채로 가자 늘 그랬듯이 노앵설이 반겨주었다. 꽤 무거워 보이는 고양이를 안고 달려오려는 모습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순영을 만나고 왔나 보군.”
노앵설에게 안겨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데 빤히 보던 이한이 말을 걸었다.
제 말을 듣지 못한 줄 알았는데.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순영의 기운이 느껴져서. 밥 먹고 온 건가.”
“아아, 아니요. 여기서 먹으려고요.”
“그렇지 않아도 우렁 각시와 도령이 기다렸는데, 잘됐군.”
왜? 하고 물으려는 순간 우렁 각시가 두 손으로 상을 들고 쭈뼛쭈뼛 나왔다. 하람이 얼른 상을 받았다.
『기, 기운이 없으신 거 같아서 다, 닭백숙을 해, 해 봤어요.』
우렁 각시가 우렁 도령이 토종닭을 잡았다고, 새벽부터 지금까지 푹 고았다고 설명하고는 후다닥 떠났다. 하람이 상을 든 채로 엉거주춤하게 굳었다가 상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역시나 우렁 각시가 저녁을 준비했다. 안채에서 먹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진한 향이 풍기는 닭백숙을 한 숟갈 먹었다.
“와…….”
우렁 각시의 외모도 외모지만 음식 솜씨가 정말 놀랍다.
왜 가난한 총각과 관원이 우렁 각시를 붙잡고,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는지 조금 이해될 것 같다. 하람이 감탄을 연발하며 닭백숙을 먹었다.
그렇게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그릇이 금방 비었다.
“으, 배 터질 거 같아…….”
너무 맛있는 나머지 평소보다 더 먹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아 상 정리도 뒤로하고 툇마루에 길게 늘어져 앉았다가 그대로 누웠다.
『하람이 자꾸 이상한 소리 내.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배가 과하게 불렀다. 입으로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배를 살살 매만지는데 노앵설이 옆에 앉았다.
“그리 쉽게 안 죽는다.”
하람이 걱정하는 노앵설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노앵설을 보던 시선을 돌려 차를 마시며 담뱃잎을 태우는 이한을 보았다.
“……죽을 수도 있죠.”
괜히 심술이 돋아 한소리 하자 장죽 끝을 입가로 가져가던 이한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내 새카만 시선이 하람의 얼굴에 고정됐다.
“내가 있는 이상 급사할 일은 없다.”
웃기지도 않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비소하고는 장죽을 입에 물었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슬금슬금 이한 쪽으로 머리를 돌려 누웠다.
“……언제 다 나으세요?”
오도전륜대왕의 불에 손이 사라졌을 때는 날이 지날 때마다 손이 나아졌다. 이번에도 금방 낫겠지 했는데, 이한의 상태가 어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꼭 색을 칠하다 말고 검게 칠한 것처럼 뺨부터 목,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 움직이지 않은 왼손가락, 오른손등이 다 검다. 무섭기도 하고 또 안쓰럽기도 하고.
“언젠가.”
걱정스러운 맘에 심각하게 말하는데 돌아오는 답이 더없이 무심하다. 입술이 삐죽 나왔다.
“전에는 참, 물귀신에게 다쳤던 어깨는 다 나았어요?”
하람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셔츠에 가려진 이한의 어깨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한이 제 어깨를 짧게 본 뒤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렇게 무심하세요. 어디 봐요.”
아무리 피가 나지 않고, 절로 낫는다고 하지만 너무 무심하다.
하람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무심한 기색이 역력한 이한의 팔을 약하게 잡았다. 이한이 귀찮은 낯을 했다가 이내 혀를 차며 장죽을 내려놓았다.
셔츠 단추가 하나, 둘 풀렸다. 곧 완전히 벗겨졌다. 훤히 드러난 어깨를 보던 하람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상처가 거의 그대로예요.”
상처가 사람에 비하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흉측한 모습이 남아 있다.
하루하루 손이 쑥쑥 회복하던 전과 너무 다르다. 당황스러움에 떨리는 손으로 상처 위를 더듬었다.
“회복 빠르지 않았어요? 아니, 다친 상태로 상대하면서 생긴 상처라 느린 건가?”
눈에 띄게 당황하다 못해 말을 더듬는 하람과 다르게 차분한 이한이 제 몸을 훑었다.
“네 말대로 회복이 느리긴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아픔 따위는 없다. 그리고 곧 나아질 거다.”
별걸 다 걱정한다는 것 같다는 눈빛과 함께 셔츠가 다시 걸쳐졌다.
셔츠를 다시 입은 이한이 옆에 있는 빈 찻잔에 마시던 차를 따랐다. 그러고는 여전히 걱정스레 보고 있는 하람에게 건넸다. 하람이 음? 소리를 냈다가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무슨 차예요?”
“감국차다.”
이름과 냄새 모두 낯설다. 순영과 지내면서 나름 차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 마시겠다는 인사 후 한 모금 마셨다가 연한 단맛이 마음에 들어 홀짝홀짝 마셨다.
“아, 여행 일정이 좀 당겨졌어요.”
차를 마시다 이한에게 여행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
뒤늦게 운을 떼자 담뱃잎을 태우던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훅 들었다.
“무슨 말이지?”
바로 허락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뾰족하다. 하람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할머니가 일찍 가는 게 어떠냐고 하셔서요. 대신 일정이 짧아졌어요.”
눈치 보며 나름대로 차분하게 변명하는데 이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심각한 것도 같고, 불만인 것도 같고. 더 말하지 않는 이한을 가만 보며 숨죽여 눈치를 살폈다.
“……순영이, 일찍 가자고 했다고.”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낼 것 같던 이한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가 오늘 날짜를 물었다. 하람이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뒤 날짜를 말했다.
“벌써 그렇게 됐다고.”
“무슨, 문제 있나요?”
예상했던 잔소리를 하지 않고,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슬그머니 묻자 이한이 연기를 내뿜듯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무래도 준비를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