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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49)화 (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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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만났던 토끼가 점쟁이 토끼라는 요괴고, 점괘 정확도가 웬만한 신 이상이라는 건…….

    “제게 흉과 화가 닥친다는 거네요.”

    어떤 흉과 화가 닥치는 건지 모르겠고, 확실한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목덜미가 서늘하다. 하람이 제 목덜미를 크게 감쌌다. 지켜보던 이한이 길게 침음했다.

    “……토끼가 어떤 흉과 화인지 말하지 않았나?”

    “네. 그냥 닥친다고, 아! 조심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고 했어요.”

    이한도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본 점쟁이 토끼는 점괘 정확도가 높다는 것치고는 정확하게 말해 준 것이 없었다. 온통 모호했다.

    그래서 백 퍼센트 믿을지, 말지 고민하는데 별안간 바지가 죽죽 당겨졌다. 아래를 보자 의아한 얼굴의 노앵설이 보였다.

    『신발 한 짝은 어디에 두고 왔어?』

    “신발? 아, 그슨대라는 나쁜 요괴를 처치하다가 다리…….”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다리가 아프지 않다.

    이상함에 왼쪽 다리를 보자 믿을 수 없게도 붉은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더없이 멀쩡한 다리와 발 상태에 그만 멍해졌다. 의아해하던 중 불현듯 라디오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또다시 헐벗은 시신이 발견.”

    왜 헐벗고 있고, 상처가 없는 건가 했는데. 하람이 바지와 신발만 사라진 제 다리를 보다 고개를 들어 이한을 보았다.

    “저는 돌아왔는데 왜, 이한 님은 그대로죠?”

    바지와 신발은 사라졌으나 다리는 멀쩡하게 돌아왔다. 그런데 이한의 얼굴과 팔, 손 곳곳이 여전히 검다.

    걱정과 의아함을 담아 묻자 이한이 제 검은 손을 슬쩍 보았다.

    “난 살아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점쟁이 토끼 말은 잊고 쉬어라.”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말하고 돌아섰다. 하람이 떠나는 이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방으로 향했다.

    * * *

    『안녕하세요, 각시가 왔어요!』

    점쟁이 토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 이한을 제대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이 날이 밝았다.

    아침 겸 점심으로 간단하게 밥을 먹는데 사랑채 뒤쪽에서 지네 각시가 이동식 왜건 가득히 무언가를 싣고 가지고 왔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팔미도 왔어요!』

    아이돌처럼 분홍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에 화사하게 화장한 미녀와 함께 왔다. 하람이 밥 먹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나?』

    어깨에 커다란 종이가방을 멘 처음 보는 여자가 하람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길게 훑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하람이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긴장했다.

    『지네가 말한 대로 정말 귀엽게 생겼다!』

    여자가 너무 귀엽다고 하며 하람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양껏 쓰다듬었다. 거침없는 손길에 하람의 몸이 이리저리 휘청였다.

    “저, 저기…….”

    『솜털이 보송보송한 게 어후!』

    서른 넘은 남자에게 귀엽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피부 탱탱한 거 좀 봐. 듣는 것만으로도 닭살 돋는 말을 쏟아냈다.

    『얘! 하람 님 넋 나간 거 안 보여? 적당히 해!』

    미쳐 버릴 것 상황에 혼이 반쯤 나갔다. 뺨을 잡아 쭉 늘였다가, 매만졌다가, 손을 잡았다 하던 여자를 멀거니 보는데 지네 각시가 여자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여자가 잉, 하며 하람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동시에 그녀의 뒤로 흰색의 꼬리로 보이는 무언가가 사라락 나타났다.

    흰색 페르시안 고양이 같은 복슬복슬한 하얀 꼬리가 하나, 둘, 셋… 여덟.

    『하람 님, 여기는 팔미호예요.』

    만지지 않아도 보드라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꼬리를 보다 소개말에 정신 차렸다. 하람이 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팔미호를 보았다.

    “그, 구미……호?”

    『네네. 아직 꼬리가 여덟 개라 팔미호랍니다.』

    팔미호가 킥킥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하람이 어색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하람 님, 이한 님은 어디 계세요?』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안 보이셨, 아, 저기 오시네요.”

    짧게 인사한 후 지네 각시가 끌고 온 왜건에 든 것들을 모두 꺼냈다.

    오늘도 사 온 진한 커피에 케이크, 쿠키를 먹는데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이한이 왔다.

    “일찍 왔군.”

    『아휴, 이한 님이 부르셨는, 어머! 왜 이렇게 다치셨어요?』

    “그럴 일이 있다. 오랜만이군.”

    『……아, 오랜만에 봬요.』

    반쯤 넋을 놓고 이한을 보던 팔미호가 화들짝 놀랐다. 이내 뺨을 슬쩍 붉히더니 가지고 온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가지고 왔는데, 언제가 편하세요?』

    “지금 하지.”

    이한과 팔미호가 방으로 떠났다. 커피 마시던 하람이 문 닫힌 방을 가만 응시하다 지네 각시를 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아, 이한 님이 머리를 다듬을 줄 아냐고 하길래 헤어 숍에서 일하는 팔미 데리고 왔어요.』

    머리카락 자를 수 있는 거였나.

    생각하지 못한 내용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노앵설이 이한의 방에 다녀왔다.

    『이한 님 머리카락이 이렇게 막막 쏟아져!』

    그슨대를 상대하면서 이한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짧아지고, 중구난방이었다. 예전처럼 깔끔하게 묶을 수 없을 테다.

    다듬을 수 있다면 다듬는 게 좋긴 하지. 하람이 양반다리를 한 제 다리 위로 앉은 노앵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네 각시와 리모델링 관련으로 대화하던 중 바지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네 각시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어머나, 인물이 확 사네! 진작 자르지 그러셨어요!』

    영진에게 일주일 뒤 천안 어떠냐는 물음과 할머니가 할 말 있는데 올 수 있냐는 문자가 왔다.

    답장을 쓰는데 지네 각시가 호들갑을 떨었다. 하람이 핸드폰을 보던 시선을 들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진짜 기가 막힌다!』

    『머리카락이 짧아졌어!』

    누구에게 함부로 잘린 것 같았던 이한의 머리가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깔끔한 스타일이 됐다.

    머리카락이 짧아지니 완전 요즘 시대 사람으로 보인다.

    여상한 모습을 넋을 놓고 멀거니 보던 중 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할 말 있나?”

    “……네? 아, 아니요.”

    머리 스타일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낯설다. 바보처럼 맹하게 대꾸하고는 커피를 꿀꺽꿀꺽 마시다 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저, 저! 할머니가 불러서 가 볼게요.”

    어색함을 참을 수가 없다. 눈치를 살피다 때마침 순영 생각이 나 벌떡 일어났다. 다녀와라, 같은 답을 듣지도 않고 화급하게 슬리퍼를 신고 뒤도 보지 않고 안채로 넘어갔다.

    “하람 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할머니 계시나요?”

    안채로 가자 마침 밖으로 나온 강원댁이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슬리퍼를 벗고 툇마루로 올라가다 뒤늦게 순영에게 빌렸던 신구가 생각났다.

    나중에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노크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뭐야, 금방 왔네?”

    선객이 있었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영진을 짧게 보고는 그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방석을 두고 앉았다.

    “부르셨다고 해서요.”

    순영이 하람의 앞으로 찻잔을 두고, 차를 따랐다.

    “여행 가는 걸 저희끼리만 정하는 것보다 다 같이 정하는 게 어떨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순영과 영진에게 일임했던 여행 계획을 함께하기로 했다.

    순영의 제안으로 조금 일찍 가기로 했다. 하람이 이한에게 허락을 다시 받겠다고 하고 다음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정했다. 그런 다음 영진의 노트북으로 숙소를 살폈다.

    “호텔이 편하지 않아?”

    “룸을 할머니, 누나 가족, 나 이렇게 세 개 해야 하나? 독채가 편할 거 같은데.”

    “그런가? 참, 온천 들어갈 거야?”

    “매형 안 가면 안 가고.”

    “들어간다고 했어.”

    온천은 어디, 음식은 뭐, 차는 어떻게. 따뜻한 국화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는 사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이랬는데 이하람. 신께서 가지 말래, 하면 진짜 죽는다.”

    “무슨…… 누나나 갑자기 안 된다고 하지 마.”

    “내가 뭐, 아, 전화 왔다.”

    영진이 중요한 전화라고 잠시만, 하고 급하게 방을 나갔다. 하람이 영진 대신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챙겼다.

    여행 일정을 정한다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하람 님.”

    순영이 쉬어야 할 것 같아 일어나려는데 이름이 불렸다. 하람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지 순영의 얼굴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근심이 느껴진다. 걱정스레 보자 순영이 슬쩍 웃더니 어제 일을 물었다. 하람이 한 박자 늦게 헉, 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제가 중요한 신구를 빌려 가면서 이유를 제대로 설명 안 했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을 테죠. 안 그렇습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 이한 님 악업을 줄이려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어요. 어제는 라디오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내용에 이한 님이 인외 존재가 한 것 같다고 해서 갔다가 그슨대를 상대했어요.”

    “그슨대요?”

    “예. 이한 님이 다 하셨지만…….”

    대리기사처럼 이한을 문제의 장소에 데리고 간 것 말곤 없다.

    씁쓸함을 삼키다 문득 순영은 이한과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졌다.

    “할머니는 어떻게 악업을 줄였나요?”

    순영은 운전을 할 줄 몰랐다. 기사의 도움을 받아 저처럼 악업을 줄였다고 하기에는 기사는 이한의 기운을 버틸 수 없었다.

    어떻게 했을까. 기대와 호기심을 담아 보자 순영이 차를 한 입 짧게 마셨다.

    “저는 제게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한 님이 듣고 골라서 해결했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생각해 보니 순영을 찾아오는 사람이 참 많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를 수가 있었다.

    어떻게 악업을 줄이나 했는데. 이한과 순영의 관계가 끊어졌으니 또 써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고.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영이 눈에 띄게 얼굴이 어두워진 하람을 보다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오늘 아침에 무업하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최근에 남산에 가본 적 있냐고, 누군가가 기도터를 헤집고 다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남산이 무업하는 사람들 사이로 기운 좋은 기도터로 유명하다고 신문 기사로 보았었다.

    촛불로 인한 산불 위험과 주술 행위에 민원이 많아 단속을 강화해서 요즘은 덜하다고 들었는데?

    “기도터를 헤집는다는 건…….”

    “남산에 악신(惡神)이나 요괴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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