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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더듬 불빛을 비췄으나 그슨대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키보다 더 높은 새카만 파도 중간에 육식 짐승이 가질 법한, 새빨간 피가 묻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아…….”
한입에 삼키겠다는 듯 거대해진 그슨대의 몸체에 하늘이 사라지고, 별이 꺼졌다. 그렇지 않아도 어둑한 바닥이 더욱 어두워졌다.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지그시 내려다보는 어둠에 섬뜩한 공포가 몰려와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여기 있었구나.”
하람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하늘이 금빛으로 번쩍했다. 그리고 거대한 어둠이 세로로 갈라졌다.
『어, 떻……게?』
“네 어둠은 참 보잘것없구나.”
세로로 쩌억, 느지막하게 갈라지는 그슨대 사이로 검을 검집에 넣는 이한이 보였다. 작게 열린 하람의 입술에서 탄식이 작게 터져 나왔다.
탁, 소리와 함께 검이 검집으로 들어가고 그슨대가 검은 재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고, 사방에서 이름 모를 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슨대의 어둠에 가려졌던 현실이 돌아왔다.
익숙한 풍경과 냄새, 소음에도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멀거니 앉아 있는데 창백한 손이 내밀어졌다.
“바닥 차다. 그만 일어나라.”
지금껏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던 하람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힘이 없어 무겁게 느껴지는 손을 들던 중 이한의 상태를 뒤늦게 발견했다.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였다.
“이, 이한 님 상태가!”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높게 하나로 틀어 묶은 머리가 짧아져 있고, 셔츠와 바지는 절반이 없다. 그만큼 얼굴과 상체, 다리가 군데군데 검게 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귀신과의 싸움에서 어깨를 길게 다쳤었는데! 하람이 놀라 큰 소리를 내며 기겁하는데 이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더 내밀었다. 하람이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낸 뒤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떻게, 괜찮으세요?”
“그슨대에게 먹혔다가 벗어났는데, 나보다 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군.”
이한의 시선이 하람의 왼쪽 다리에 고정됐다. 하람이 아, 소리 내며 다리를 슬그머니 뒤로 물렸다.
“걸을 수 있겠나?”
“당연, 읏!”
벌겋게 익은 겉보기와 달리 그저 화끈거리기만 했다. 걷는 데 딱히 문제없을 것 같아 한 걸음 내딛자마자 왼쪽 다리가 푹 꺾였다. 다급하게 이한의 팔을 덥석 부여잡았다.
“뭐, 뭐지?”
분명 화끈거리기만 하는데 무슨 일인지 왼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이가 없어 황당한 얼굴로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얼굴을 약하게 구겼다가 쯧,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냐고 잔소리하려나.
소리 없이 눈치를 살피는데 이한이 별안간 손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쯤 헐벗고 있던 그의 몸에 새 셔츠와 바지가 입혀졌다.
머리카락과 탄 자국은 여전하지만 멀끔해졌다. 그 모습을 부럽게 보는데 별안간 이한이 등을 보이고 앉았다.
“업혀라.”
“……네?”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걸까. 하람이 저도 모르게 크게 되물었다.
“못 들었나? 업혀라.”
헛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슨대를 상대하면서 귀를 다친 것 같다.
너른 등을 멀거니 내려다보는데 이한이 또 업히라고 한다.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왜, 왜, 왜 제가 업혀요?”
그슨대를 상대하면서 머리를 당하기라도 했나. 뛰는 게 느리다고 던질 때는 언제고 이제는 업히라고 한다.
아연한 낯으로 보며 기겁하는데 이한이 일어났다. 정말 귀찮다는 낯으로 혀를 찼다.
“여기에 계속 있을 건가?”
“아, 아니요. 가야죠. 그런데 왜 제가 업힙니까…….”
그냥 아까처럼 내던지면 안 되나. 짐처럼 내던져진 게 다소 충격이었으나 나름 나쁘지 않았는데. 하고 생각하는데 잘난 미간이 확 좁혀졌다.
“안아서 옮겼다고 할 때마다 얼굴을 붉혀서 업어준다고 한 건데. 너는 참 귀찮군.”
쯧쯧, 노골적인 소리와 함께 검이 사라지고, 두 팔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하람이 으헉, 소리 내며 질색하다 못해 주춤 물러났다.
“제가 알아서 갈, 으악!”
안아서 옮겨질 때는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말똥말똥했다.
맨정신으로 도저히 안길 수 없어 발을 끌어서라도 가겠다고 말하는데 별안간 몸이 훌쩍 들렸다.
다리가 공중으로 들렸다. 등과 허벅지 아래를 단단하게 받친 팔에도 무서워 하람이 이한의 어깨를 꽉 잡았다.
“말도 안 듣고, 손도 많이 가고.”
이한이 혀를 차며 무심하게 걸었다. 하람이 부끄러움을 더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음이 복잡한 가운데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있는 차에 도착했다.
하람이 가지고 온 손전등과 핸드폰을 다 챙겼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이한 님.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저도 무기 같은 것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불편한 왼발에 말없이 운전에 집중하던 하람이 슬쩍 이한을 보았다. 그슨대의 어둠에 삼켜져 검게 변한 손목을 보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미끼만 계속할 수 없잖습니까.”
“미끼를 하지 않으면 되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하람은 이한을 그저 귀신과 요괴에게 데려다주는 걸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왕 돕기로 한 거 제대로 돕고 싶었다. 하람이 이한의 검게 탄 뺨을 보았다.
“이한 님처럼 검을 쓰든. 활, 총을 쏘든. 미끼가 아니라 제대로 돕고 싶습니다.”
검이라고는 커터칼과 식칼 정도만 잡아봤지만 배우면 조금이라도 도움 되지 않을까.
배운다면 이한에게 배워야 하나. 라고 생각하자마자 이한이 허, 웃었다.
“검을 단기간에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활을 배우죠.”
이한은 모르겠지만 배우는 걸 좋아하고, 습득력도 나쁘지 않았다. 어떠냐는 눈으로 보자 가당치도 않다는 코웃음이 돌아왔다.
“활줄 당길 힘도 없어 보이는데.”
“……이한 님은 모르시겠지만 대한민국이 양궁으로 정말 유명해요.”
올림픽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양궁으로 금메달을 엄청 받았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신기록도 다 한국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째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다. 무표정한 얼굴로 창 너머로 비치는 달라지는 풍경을 보기만 한다.
“이한 님. 제 말 듣고 계시죠?”
“검이든, 활이든, 뭐든. 단기간 배워서는 제대로 쓸 수 없다. 특히나 너같이 겁이 많고 살(殺)을 해본 적 없는 자는 더더욱.”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소리를 끝으로 이한이 입을 다물었다. 냉랭한 기세에 하람도 무어라고 더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
차가 익숙한 길 근처에 들어섰다. 속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없는 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이한이 사라졌다. 하람이 빈 조수석을 본 뒤 한숨을 푹 쉬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가 버리네.”
바로 허락할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으나 기도 안 찬다는 반응에 마음이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미끼도 미끼지만 그슨대의 어둠에 먹혀 검게 변한 이한의 뺨 한쪽과 손 따위가 계속 떠올랐다.
이한을 돕기 위해 나선 건데 그가 다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 헉!”
무업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는데 별안간 차 앞으로 무언가가 확 나타나고, 쿵 소리가 났다. 놀라 급하게 차를 세웠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쿵쿵거린다. 크게 뜬 눈으로 앞을 가만 보다 조심스레 차에서 내렸다.
“고라니라도 나왔, 토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산에서 고라니라도 내려온 걸까 하고 앞을 보는데, 웬 토끼가 있다.
제법 잘 먹고 지내는 토끼인지 몸이 크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제 팔뚝보다 더 컸는데 애완토끼인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여기에 토끼가, 그것도 애완토끼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
하람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주춤주춤 다가가는데 토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이고, 오늘 사고수가 있더니 이렇게 부닥치네.』
지금 꿈을 꾸는 걸까. 토끼가 말을 한다. 입이 쩍 벌어졌다.
하람이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토끼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일어나 두 발로 섰다. 작은 두 손으로 제 몸에 붙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내더니 허리를 콩콩 쳤다.
하는 짓이 정말 사람 같아 입에서 헉, 소리가 새어 나갔다. 아이고, 아이고 하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점 대롱을 집어 들던 토끼가 헉! 화들짝 놀랐다.
『사, 사람이 아닌가?』
“괘, 괜찮, 으세요?”
토끼가 이제 막 집어 든 점 대롱을 손에서 툭 놓았다. 걱정하는 하람을 보다 아이고 아이고 하더니 길쭉한 귀로 제 빨간 눈을 가렸다. 귀가 제자리로 돌아갈까, 두 손으로 귀를 꾹 눌렀다.
『인간에게 걸려 버렸어. 이걸 어쩌면 좋아. 어쩌면…… 인간?』
귀에 채 가려지지 않은 주둥이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귀를 쫑긋 세웠다.
『인간이 어떻게 날 보지?』
토끼가 다시 한번 더 헉! 하고 크게 놀랐다. 하람도 따라서 놀랐다.
“……그, 그게 제가 영안을 가져서 그런 거 아닐까요?”
사람처럼 말하는 토끼를 본 것도 놀라운데 그 토끼에게 사정까지 설명하고 있다.
사실은 토끼를 친 게 아니라 제가 토끼한테 치인 게 아닐까.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은 상황에 어리둥절한데 토끼가 응? 하더니 커다란 눈으로 빤히 본다. 이상하게 전신이 긴장됐다.
“저, 토끼 님?”
『아이고…… 곧 흉(凶)과 화(禍)가 닥치겠어.』
흉과 화라니? 뜬금없는 내용에 미간을 좁히자 토끼가 또 아이고 하더니 떨어뜨린 점 대롱을 들었다.
『영안을 가진 인간아,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아. 아주 많아.』
토끼가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며 두 발로 걸어 떠났다.
“아니, 상태를 아직 묻지 못했는데…….”
요괴도 교통사고 후유증을 겪나?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토끼를 좇다가 다시 차에 탔다. 의아해하며 최대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왜 이리 늦었지?”
사랑채로 가자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 손에 검을 들고 있는 이한이 노앵설보다 먼저 반겨 주었다. 하람이 제 다리를 푹 끌어안은 노앵설의 머리를 쓰다듬다 아, 소리를 냈다.
“그게, 집으로 오는 길에 토끼를 만났어요.”
“토끼?”
“네. 말을 하고, 한복을 입고 있는 토끼요.”
이유를 말하는데 이한이 개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구긴다. 억울해서 진짜예요, 하고 덧붙였다.
“토끼가 뭐라고 했지?”
“……아이고, 아이고, 흉과 화가 닥치겠다, 조심해야 할 것이 많다?”
“아아. 점쟁이 토끼군.”
“네?”
점쟁이 토끼? 의아해하며 들고 있던 가방을 툇마루에 내려놓았다.
“길흉화복을 점치는 요괴로 점괘 정확도가 웬만한 신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