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우렁 각시가 언제 조용히 가져다 놨는지 대청에 다과상과 두툼한 방석이 놓여 있었다.
하람이 한마디 하고 방으로 가는 이한을 보다 순영에게 방석을 가까이 해줬다. 역시나 이한을 보던 순영이 방석 위로 조심스레 앉았다.
“하람 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단순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린 듯 순영의 얼굴이 몹시 심각하다.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하람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게, 하고 운을 뗐다.
“현장 갔다가 사고가 있었어요.”
“사고요?”
“네. 현장에 있던 귀신을 보고 피했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발목이 잡혀서 계단에서 굴렀어요.”
“……세상에.”
순영에게 말을 하는데 잊고 있었던 그때 느꼈던 충격과 고통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다. 하람이 마른침을 삼켰다가 결국 커피를 또 마셨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지내다 이한 님께 부탁해서 귀신을 처리하고, 우연히 신의 도움을 받아 나았어요.”
“신이라면, 설마…….”
순영이 짐짓 겁에 질린 것 같은 눈으로 위를 보았다. 하람이 따라서 서까래를 보았다가 아, 소리를 내고 고개를 바로 했다.
“……예. 하늘에 계신 분이요.”
하람의 조심스러운 답에 순영이 숨을 크게 삼키다 못해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람이 말을 잃어버린 순영을 보다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하늘이 도와주시다니.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계속 감춰졌던 순영의 입이 드러나고, 속삭인다. 인절미를 먹던 하람이 어느새 긴장한 얼굴의 순영을 보았다.
“정말요?”
“……정말, 하람 님에게 무언가가 있나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에 설마 했는데. 감은장아기가 했던 말을 통해 하람은 확실히 깨달았다. 아무래도 제가 이한과 아주 많이 연관되어 있음을.
저희 집안을 위해 몇십 년을 고생하고, 스스로 죽으려고까지 하는 이한을 무시할 수 없다.
움직여야 했는데……. 하람이 잡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할머니, 혹시 이한 님이 소멸하면 저희 집안은 어떻게 되나요?”
이한이 준비했다지만 또 모른다.
만약을 위해 조심스레 묻자 순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찻잔을 들었다. 차를 길게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대대로 신기를 가진 자가 계속 태어났으나 이한 님 외에는 받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럼 무업이 끊긴다는 건가요?”
“이한 님의 기운이 워낙에 강해서 다른 신께서 오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을 받아 무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건데, 아니라면? 의아함과 걱정을 담아 보자 순영이 미소 지었다.
“생각하시는 대로 이제 더는 무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이한 님이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만약을 위해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듣자 하니 집안에 돈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돈이 얼마나 갈까. 그리고 이한이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람 님.”
커피를 보며 멍하니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이름이 불렸다. 하람이 시선을 들어 순영을 보았다.
“쏟아지는 물을 손으로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끝은 옵니다. 하람 님께서 무슨 선택을 하시든 누구도 무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고 정하신 대로, 마음먹은 대로 하세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던 순영이 늘 짓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미소를 보던 하람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바라보던 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영 믿음이 가지 않습니까?”
“네? 아, 아니요! 아닙니다.”
쏟아지는 물을 막을 방법과 하지 말라던 감은장아기의 말을 생각한다고 반응이 늦었다. 하람이 두 손을 뻗어 약하게 손사래 치다 느릿하게 내렸다.
“……정말 제 맘대로 해도 되는 걸까요?”
“이미 정하신 거 아니신가요?”
혜안을 가진 순영은 역시 다 알고 있었다. 하람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역시 할머니는 속일 수 없네요.”
“할머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요.”
인자한 미소와 함께 진중한 이야기가 끝나고 안부로 주제가 바뀌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밝았던 하늘이 주홍빛에서 감색으로 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기다리던 밤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순영이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안채로 갈게요.”
“좋은 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저녁 준비가 다 끝났는지 안채 굴뚝에서 새어 나오던 연기가 더 올라오지 않는다. 순영이 이렇게 자주 이야기하자는 말을 남기고 안채로 떠났다.
『갔어?』
우렁 각시를 위해 접시를 정리하는데 보이지 않던 노앵설이 왔다. 하람이 달려오는 노앵설을 안았다.
“안 보여서 놀러 간 줄 알았는데 자리를 피해 준 거구나.”
『하람이 불편할 수도 있잖아!』
노앵설이 킥킥 웃더니 머리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어쩐지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것 같아 쓰다듬자 두 눈을 잔뜩 찡그리며 웃었다.
어쩐지 나이 차이가 한참 있는 여동생 같다. 노앵설의 머리를 장난스레 쓰다듬다 문득 이한이 사라지면 이곳에 있는 귀신들은 어떻게 되나 싶어졌다. 손이 굳었다.
이한을 신경 쓴다고 다른 귀신들을 생각 못 했다.
이한이 사라지면 사랑채에 머무는 귀신들은 어떻게 되지? 집은 남아 있으니 여기서 계속 지내는 건가?
생각하지 못한 귀신과 요괴의 거취에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노앵설의 머리를 헝클던 그대로 굳어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순영과 얘기하는 동안 보이지 않던 이한이 한 손에 장죽을 든 채 나왔다. 하람이 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을 거뒀다.
“생각할 게 있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마루로 갔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하람이 한 박자 늦게 이한을 부르고 손을 뻗었다. 이한이 멈춰 서서 왜, 하고 하람을 보았다.
“저랑 살인 사건 현장 안 가실래요?”
하람이 괴상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와락 구기는 이한을 보며 하핫, 어색하게 웃었다.
“귀신 보고 싶어서 환장한 놈 같구나.”
이한이 거길 내가 왜 가야 하냐는 눈을 하든 말든, 하람은 만약에 대비해 순영에게 가 신구(무속인이 굿을 하거나 점칠 때 쓰는 의례 도구)인 부채와 대신방울을 빌렸다. 또 손전등을 넉넉하게 세 개 챙겼다.
마지막으로 생수병을 백팩에 넣는데 언제 왔는지 이한이 빈정거린다. 하람이 백팩 지퍼를 채우고 일어나 이한을 보았다.
“설마요. 저 준비됐어요.”
“그런다고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모르죠.”
혹시 아나. 1%의 확률로 제가 귀신이나 요괴를 잡을 수 있을지.
뭣하면 제가 죽지 않길 바라는 감은장아기와 오도전륜대왕에게 도와달라고 외쳐야지. 드러내 놓고 황당해하는 이한에게 웃고는 재킷을 입고 백팩을 등에 멨다.
“그리고 제가 위험하면 이한 님이 도와주실 거 아닌가요?”
이한이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좁힌 채로 반쯤 넋을 놓았다. 하람이 이한을 두고 씩씩하게 주차장으로 가 차 운전석에 탔다.
출발하기 전. 기사를 통해 다수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위치를 대략 확인했다.
기사 내용을 토대로 내비게이션에 위치를 찍고 차를 출발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어둑함에 숨은 인간 외의 존재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라디오에 집중하며 운전하던 중 신호에 걸렸다. 동시에 사람들 속에서 검붉은 귀기를 풍기고 있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차에 치여 죽은 것 같은 새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을 훑고 있었다.
부행신인지 악귀인지 모를 것의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는데 별안간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푸드득, 소리가 들렸다.
새가 날갯짓할 때 나는 소리와 함께 차 앞 유리에 새가 날아와 퍽퍽 부딪쳐 댔다. 시커먼 날개와 검은 피에 앞이 점점 가려졌다.
“뭐, 뭐야?”
난데없는 상황에 오싹해졌다. 하람이 당황했다가 날개 사이로 보이는 녹색 신호에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아무리 달려도 앞 유리에 있는 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앞에 속도를 계속 올렸다.
차에서 거친 소리가 나오고, 더욱 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함과 오싹함에 식은땀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핸들을 쥔 손이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을 즈음. 앞 유리가 뜯어지고, 피 흘리는 새카만 날개에 완전히 뒤덮였다.
“……이, 이한 님!”
새카만 시야에 더 참지 못하고 이한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앞 유리가 가로로 길게 베였다.
“속도를 줄여라.”
낮은 목소리를 따라 앞 유리를 뒤덮는 날개가 하나, 둘 사라졌다.
하람이 액셀러레이터를 계속 짓밟고 있는 발에서 힘을 탁, 뺐다. 매섭게 달리던 차의 속도가 급하게 줄어들고, 상체가 앞으로 확 쏠렸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라.”
혀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슴에 서늘함이 닿았다. 가슴이 얼얼할 정도로 강한 서늘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람이 시종일관 앞을 노려보고 있던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
온통 시커멓던 시야에 색색의 불빛과 차가 보였다. 멍하니 앞을 보던 하람이 제 이마를 짚었다.
“뭐,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부행신에게 홀렸다.”
“예?”
홀리다니? 구미호 같은 그런 건가? 당황하며 이한을 힐끔 보자 이한이 혀를 찼다.
“차에 치여 죽은 새들을 대신해서 인간을 죽이려 드는 부행신이었다.”
하마터면 사고로 죽을 뻔했다는 말에 그제야 제가 속도를 과하게 높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헛숨을 크게 토해냈다.
“그저 시선이 부딪친 것뿐인데, 능력이 무슨…….”
고작해야 시선, 아니, 정확하게는 고개를 마주한 것뿐인데 홀렸다. 부행신의 능력이 상상 이상이라 지레 질렸다.
“부행신의 능력이 강하다는 건 그만큼이나 새들이 많이 죽었다는 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새가 죽었길래. 하람이 약하게 질색하다 앞에 보이는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하겠습니다.
동시에 내비게이션에서 밝고, 친절한 안내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