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45)화 (45/87)

45. #04. 이어질 리(逦)

“잠깐,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나?”

미안해하는 배 교수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그만 일어나려는데 배 교수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하람이 놀라 굳었다가 슬쩍 옆에 서 있는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의자에 앉자 배 교수가 조심스레 편지를 꺼냈다.

배 교수가 원귀의 필체를 모른다고 했으나 긴장됐다. 불안하게 있는데 배 교수의 입가가 점차 덜덜 떨렸다. 곧 그의 눈가가 눈물에 서서히 젖었다.

“……우리, 우리 장희가 정말, 나한테 편지를 남겼, 흐윽. 미, 미안하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울던 배 교수가 갑자기 미안하다고 하며 급하게 눈물을 훔치더니 메모지와 펜을 내밀었다. 하람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건 왜…… 주시는 건가요?”

“딸을, 찾아주는 사람에게 사례금을 주기로 했었네. 편지지만 고마우니 계좌 적어주면 오늘 중…….”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상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이한의 악업이 줄었다. 괜찮다고 거절하는데 그만큼 배 교수도 단호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흔적을 찾지 못했네. 정말 고…….”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안 주셔도 됩니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한사코 돈을 받으라고 한다. 결국 두 손 들어 막는데 별안간 책상 위에 있는 배 교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때다 하고 도망가려는데 배 교수에게 손목이 딱 잡혔다.

나이 든 사람의 손을 쳐내는 게 도리는 아닌 거 같아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멈춰 섰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어째 배 교수의 상태가 이상했다. 네, 네 반복해서 말하더니 얼굴이 점점 허옇게 질렸다.

“……저, 정말입니까? 정말, 네, 네! 지금 바로, 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설마 하고 이한을 보자 팔짱을 끼고서 상황을 보고 있던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배 교수의 통화도 끝났다.

“자, 장희랑 홍희 시신을 찾았다고 하네!”

예상한 대로 시신 확인 전화였다. 하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인가요?”

배 교수가 잠시 멈췄던 눈물을 또다시 흘리며 하람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자네를 만나고부터 장희 편지를 받고 쌍둥이까지 다 찾았어. 정말, 정말 고맙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럽게 우는 배 교수의 모습에 그를 생각하던 원귀가 생각났다.

“저는 그저 편지를 찾아드린 것뿐이에요. 그보다 교수님, 어서 가셔야죠.”

“마, 맞아, 가야지! 우선 갔다가 내가 꼭 연락하겠네.”

배 교수가 정말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다급하게 교수실을 나갔다.

어쩌다 보니 주인 없는 교수실에 홀로 남았다. 하람이 멍하게 있다가 가방을 챙겼다.

“이렇게 될 거 다 알고 있었죠?”

아까부터 이한이 말이 없다. 하람이 슬쩍 묻자 창밖을 보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당연한 거 아닌가.”

“……허.”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이한의 얼굴에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왜 웃는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교수실을 나갔다.

차 시동을 걸던 중 문득 원귀는 이제 어떻게 되는가 싶어졌다. 조수석에 있는 이한을 보았다.

“원귀의 원한이 해결되면 어떻게 되나요? 저승에 가나요?”

“원귀가 원하는 만큼 원을 다 해소하면 가게 되지.”

“이제 도망 다니지 않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차사들을 피해 도망 다닌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잘됐다. 하람이 안도하며 차를 뺐다.

조수석에 있는 이한 덕분에 별일 없이 마음 편하게, 무탈하게 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왜 계속 옆에 있으세요?”

집과 가까워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떠나던 이한이 웬일로 계속 옆에 있다. 안채로 가던 하람이 웃으며 묻자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가 보면 안다.”

다시 앞을 보는 이한을 따라 앞을 보았다가 열려 있는 정려문 앞에 서 있는 두 여자를 발견했다. 하람이 어, 했다가 익숙한 낯에 반색하며 거리를 좁혔다.

“오셨어요?”

순영을 보러 온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원귀, 장희였다.

시신이 물 밖으로 꺼내져서인지 늘 젖어 있던 머리카락과 옷이 건조했다.

신기해하는데 원귀가 하람의 옆에 있는 이한을 보고 흠칫 놀랐다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하람이 따라 허리 숙여 인사했다.

『떠나기 전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 벌써 가시는 건가요?”

배 교수가 시신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떠난다.

『저도 아버지 얼굴을 보고 가고 싶었는데…….』

원귀가 슬그머니 돌담 쪽을 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돌담을 보았다.

돌담 위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흰색 상의에 감색 바지와 재킷을 입은 차사를 뒤늦게 발견했다.

『또 만나는군.』

시선이 부딪치자마자 손에 쥔 적패지를 까닥이던 차사가 아는 척했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가 이하란이라는 여자에게 사인을 말했던 그때 그 차사임을 번뜩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바쁘니까 빨리 인사 나눠라.』

차사가 재촉 후 하람을 보던 시선을 돌려 안채를 둘러보았다. 하람도 다시 원귀를 보았다.

“난감하네요.”

차사가 벌써 왔을 줄이야. 저승 세계는 참 뭐든지 빠른 것 같다.

하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원귀 장희를 보다 그녀의 옆에 있는 비슷한 인상의 여자를 보았다.

“아, 이분이 말씀하셨던 동생이신가 보네요.”

인사하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원귀, 홍희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두 분 덕분에 오랜 원이 다 풀렸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원귀 장희와 홍희가 다시 한번 더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여 인사했다. 이러다 큰절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에 하람이 두 손을 들어 막았다.

“저는 한 거 없어요. 옆에, 여기 이한 님이 다 하셨어요.”

저는 운전을 하고, 물에 빠지고, 대필을 부탁한 것 말고는 없다.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원귀들도 따라서 이한을 보고는 감사 인사했다.

『두 분 다 강녕하세요.』

허락된 시간이 끝난 듯 차사가 돌담에서 훌쩍 내려왔다. 하람이 모든 근심 걱정을 다 해결한 사람처럼 웃고 있는 원귀를 보다 그, 하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새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대로 두어도 정말, 괜찮은가요?”

장희, 홍희 원귀가 바라는 것에 이 모든 사태를 만든 새어머니와 남동생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

바란 게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영 찜찜했다.

다시 한번 더 의견을 묻자 장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다는 듯 원귀들은 후련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지.』

차사가 허공에 노크하듯이 두드렸다. 곧바로 세세한 무늬가 새겨진 검은 문이 나타나더니 끼이익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노을이 지는 것처럼 불그스름한 하늘과 황량한 풍경이 보였다.

하람이 풍경을 홀린 듯이 보는 사이 두 원귀가 문을 지났다. 차사가 그 뒤를 따랐다.

『또 보지.』

차사가 아까부터 말이 없는 이한을 짧게 보고는 문을 닫았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사라졌다. 하람이 움찔, 어깨를 떨며 깨어났다.

“한 건 해결했네요.”

예상보다 이르지만 어쨌든 해결했다.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문이 있던 자리를 보던 이한이 고개를 주억였다.

“먼저 가지.”

네, 라고 답하기도 전에 이한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대문을 지났다.

『안녕하세요, 하람 님.』

사랑채에 가 기다리고 있던 노앵설과 인사하는데 구렁덩덩신선비가 왔다. 하람이 깍듯한 구렁덩덩신선비에게 짧게 인사했다.

『식사하셨습니까?』

“이제 먹으려고요.”

『그렇습니까. 다 드신 후 오랜만에 수업 어떠신가요?』

그러고 보니 구렁덩덩신선비에게 인외 존재에 관해 배우고 있었다.

“아아, 네. 좋아요.”

이래저래 정신없어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급하게 긍정하자 구렁덩덩신선비가 노란 눈을 가늘게 했다가 미세하게 웃으며 떠났다.

“……들통난 거 같은데.”

마지막 웃음을 보니 아무래도 잊고 있었던 걸 눈치챈 것 같다. 하람이 끄으응, 소리 냈다가 툇마루로 올라갔다.

밥에 진심인 한국 요괴답게 우렁각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상을 내왔다. 기분 좋게 먹은 뒤 태블릿 PC와 간식을 챙겨 책방채로 갔다.

『자, 그럼 오랜만에 수업해 볼까요? 오늘은 차사부터 배울까 하는데 어떠신가요?』

“네. 좋아요.”

『차사들이 3인 1조로 다닌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이한에게 차사에 관해 전달받은 걸까. 구렁덩덩신선비가 저승 차사에 관해 알려주었다.

일직차사, 월직차사, 이승차사, 이원차사, 인황차사. 영화에서 짧게 보았던 차사가 다양하게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필기하는 사이 시간이 금방 흘렀다.

“차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정말일까요?”

『본래 죽은 자는 심판을 거치면서 생전의 기억을 잃는다고 합니다. 차사 또한 죽었던 자들이라 전생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차사들이 전생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궁금했었는데. 어딘가 익숙한 구렁덩덩신선비의 말에 호기심이 해결됐다.

몇 번 보았던 차사들을 생각하며 필기하는데 끼이익,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고개를 돌리자마자 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사랑채에 순영이 왔으니 여기까지만 해라.”

할머니가 왔다고 한다. 하람이 황급히 가지고 온 것들을 챙겨 일어섰다. 구렁덩덩신선비에게 인사한 후 앞서가는 이한을 따라 사랑채로 갔다.

“하람 님.”

서둘러 사랑채로 가자 대청 끝에 홀로 앉아 주변을 훑던 순영이 일어났다. 하람이 오늘따라 좋아 보이는 순영의 안색에 미소 지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순영의 작은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하람이 아, 했다가 제 목덜미를 쓸었다.

“그게, 다쳤었는데 다 나았어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크게 다쳤었는데 어쩌다 보니 바로 다 나았다.

감은장아기라는 운명신에게 도움받았다고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난감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영에게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이한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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