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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44)화 (4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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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람을 보며 검지 하나로 다가오는 검날을 멈추게 만든 감은장아기가 고개를 들어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여봐란듯이 입꼬리를 당겨 웃고 있는 감은장아기를 보며 움직이지 않는 검에 칼자루를 꽉 그러잡았다.

    “하늘에 있다 해도 사람이 아니니 내가 베지 못할 이유 없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왜, 내가 네놈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도 불만인 것이냐?』

    감은장아기가 검날을 짚고 있는 검지를 굽혔다. 검지가 검날 위로 새겨진 사인참사검 글자 위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도 아니면 내가 아가에게 해라도 끼칠 것 같아 겁나느냐?』

    “……날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한의 두 눈이 일그러졌다. 반대로 감은장아기의 눈은 작게 호선을 그렸다.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든 자를 다 알고 있지.』

    감은장아기의 검지에 눌리는 사인참사검이 눈에 띄게 떨었다. 오시하는 감은장아기를 내려다보던 이한이 떨리는 검날을 보았다. 감은장아기가 검지에서 힘을 툭, 뺐다.

    『네놈이 저승 시왕이 지켜보는 자라 해도 그저 망자에 지나지 않는 것을. 또다시 아수라도(阿修羅道, 늘 싸움만을 일삼는 아수라들의 세계)에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치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감은장아기의 조곤조곤한 경고에 이한의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이내 신경질적으로 검을 거뒀다. 어느새 그의 팔을 부여잡고 있던 하람이 의자에 맥없이 풀썩 소리 내어 주저앉았다. 감은장아기가 깜짝 놀라 했다.

    『이런, 아가를 놀라게 했구나. 어떻게, 따뜻한 차라도 마시겠니?』

    “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조금 전까지 손가락 하나로 검을 막고 있던 감은장아기가 다시 인자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하람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슬그머니 제 옆에 앉는 이한과 가까이 당겨 앉고, 힐끔 보았다.

    『아가. 이걸 보렴.』

    이한의 표정이 더없이 좋지 않았다. 신경이 쓰였는데 낮게 불렸다.

    이한을 보던 시선을 돌리자 감은장아기가 검날을 막았었던 검지를 들었다. 그러고는 핏방울이 맺혀 있는 손끝으로 마치 선을 그리듯 허공을 가로로 길게 그었다.

    손가락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사라지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새빨간 실 두 개가 나타났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명이란 하나의 실과 같단다. 천명이 짧은 자는 실이 짧으면서 얇고, 천명이 긴 자는 실이 굵고, 튼튼하지.』

    감은장아기가 여리게 쓸던 굵은 실을 현을 튕기듯 짧게 튕겼다. 실이 파르르 떨더니 금방 제 위치로 돌아갔다.

    『아가, 네 운명의 실은 어떤 거 같니?』

    감은장아기가 어디 한번 골라보라는 듯 두 팔을 작게 벌렸다. 하람이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실을 가만 보다 미세하지만 조금 더 얇은 실을 선택했다.

    『우리 아가 똑똑하구나. 그래, 지금 네 눈에 보이는 이 얇은 실이 바로 네 천명이란다.』

    아주 약간의 바람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얇은 실이 제 천명이라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가.』

    “네.”

    『네가 생각한 대로 희생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이 짧고 약한 실이 더욱 얇아질 것이다. 그러다 불타 사라질 거다.』

    감은장아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르르 소리가 들리더니 실 끝에 새빨간 불이 붙었다. 시뻘건 불길에 얄팍한 실이 느릿느릿 타들어 갔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가슴을 짚고 움찔, 떨었다.

    『희생을 하면 할수록 실은 더욱 타들어 갈 것이고, 너는 결국 죽을 거다. 그래도 희생할 거니?』

    이래도 희생할 것이냐고 묻는 감은장아기의 시선이 자애롭고, 여렸다. 절반 가까이 탄 실을 보던 하람이 대답 대신 턱이 바짝 당겨질 만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럼 이건 어떠니.』

    감은장아기가 별안간 눈빛을 서늘하게 하더니 허공에 나타난 귀족들이 쓸 법한 우아한 모양새의 가위를 잡았다. 곧장 타들어 가는 실을 툭, 잘랐다.

    『이래도 저놈을 위해 희생할 거니?』

    가슴 위로 무언가가 떨어진 것처럼 쿵! 울렸다. 하람이 얼굴을 구기며 가슴을 꽉 잡았다. 동시에 이한이 하람의 어깨를 감싸며 감은장아기를 보았다.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했을 텐데.”

    이한이 마치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리자 하람이 가슴을 짚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허벅지를 짚었다.

    “괘, 괜찮아요.”

    분명 가슴에서 충격이 느껴졌는데 멀쩡하다.

    하람이 사실이냐는 듯 보는 이한의 시선에 반쯤 얼빠진 얼굴을 끄덕였다. 그러고는 감은장아기를 보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청개구리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편입니다.”

    감은장아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한번 마음먹은 것은 잘 바꾸지 않았다.

    하람이 다시 한번 더 죄송하다고 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켜보던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지.”

    “네?”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하람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잠깐, 이…….”

    『아가.』

    끌고라도 가겠다는 기세에 어어, 당황하던 하람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걱정 가득한 얼굴의 감은장아기가 손을 내밀었다.

    『……너는 어느 생을 살아도 여전하구나.』

    길게 뻗은 감은장아기의 손이 하람의 머리 위로 닿았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가엾은 아가. 제 끝도 모르고.』

    둥근 머리를 짚은 손이 뺨으로 내려갔다. 곧 손에서 새하얀 빛이 번졌다. 곧 하람의 얼굴에 있는 얕은 상처들이 하나, 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구나.』

    상처에 간질간질했던 얼굴도 모자라 어깨와 팔, 다리가 멀끔하게 나았다. 하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팔과 다리를 더듬었다.

    『아가. 전력을 다하렴.』

    욱신거림 대신 깁스 특유의 묵직함만 느껴지는 다리를 내려다보던 하람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운명을 바꾸고 또 바꾸렴.』

    안타까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감은장아기의 얼굴에 의아해하는데 갑자기 굳게 닫혀 있던 입구 문이 벌컥 열렸다.

    “노…….”

    노력해 보겠다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이한의 손에 몸이 당겨졌다. 하람이 어색하게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이한 님, 잠깐만!”

    타로 가게를 나와서도 팔을 잡고 걷는 이한의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

    묵직한 깁스를 한 채로 따라가던 하람이 주변을 살폈다가 이한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비명에 가까운 큰 소리에 드디어 이한이 멈췄다. 꾸역꾸역 힘겹게 따라가던 하람이 무릎을 짚었다.

    “후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아니, 왜 이렇게 서둘러요?”

    누가 보면 쫓기는 줄 알겠다. 숨을 몰아쉬던 하람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이한이 이를 으득, 소리 내어 짧게 갈았다.

    “감은장아기.”

    “네?”

    평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신, 그것도 운명신이 직접 강림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하람의 운명을 운운하는 것이 더없이 불길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까부터 계속 잡고 있는 하람의 팔을 놓았다. 하람이 말을 삼키는 이한을 보며 눈을 끔뻑이다 똑바로 섰다.

    상태를 보니 뭘 물어봐도 답해 주지 않을 것 같다. 말하는 대신 한숨 쉬고는 차로 돌아갔다.

    어쩌다 보니 몸이 완벽하게 다 나았다.

    깁스를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다.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가 깁스를 제거했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병원에서 나오자 배 교수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됐다. 배 교수의 학교로 운전했다.

    - 최근 다수의 시신이 발견된 서울 세곡동에서 또다시 헐벗은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밤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전에 발견된 시신과 같이 별다른 상처가 없…….

    운전 중 영 심심해서 라디오를 켰는데 켜자마자 시신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왜 시신 얘기가 나와.”

    정면을 응시하던 하람이 라디오 주파수를 바꾸려는데 이한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동안 뉴스가 길게 이어졌다.

    다양한 연령대, 남녀 무관, 증거가 없음, 수사에 난항. 낮부터 듣기 꺼림칙한 뉴스에 슬슬 버티기 어려워졌다.

    “저기,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사람의 짓이 아닌 것 같다.”

    “네? 그럼 귀신이 한 건가요?”

    이건 또 무슨 일일까. 하람이 이한을 힐끔 보았다. 이한이 느릿하게 다리를 꼬았다.

    “혹시 무속인들이 나랏일을 예측한 것을 들어본 적 있나?”

    이한의 말에 하람은 언젠가 보았던 실종자에 관해 어느 유명한 무속인이 너튜브에서 예측했다는 신문 기사가 생각났다.

    “들어본 건 아니고 봤었습니다.”

    “정말 사람이 한 짓일 수도 있지만 부행신, 악귀에게 씐 사람이나 요괴가 한 짓일 수도 있다.”

    이한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어쩐지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

    “믿지 않는군.”

    어르신들이 모든 일이 다 귀신이 했다고 말씀한다고 하긴 하던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침음하는 데 딱 걸렸다. 하람이 이한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귀신과 요괴를 보고, 심지어 귀신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나 바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한 듯 이한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람이 다시 운전에 집중하다 아, 소리를 내며 이한을 보았다.

    “가 볼까요?”

    정말 귀신이나 요괴의 짓이면 현장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운이 좋으면 악업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람이 어떠냐는 의미를 담아 이한을 보았다.

    “내가 귀신과 요괴를 조심하는 조건으로 여행 가는 걸 허락했을 텐데.”

    이한이 옆에 있는데 별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너무 나댄 것 같다. 하람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혹시나 하는 아쉬움에 고민하는 사이 대학교에 도착했다. 가방을 챙겨 내렸다. 배 교수가 기다리고 있는 교수실로 향했다.

    “바쁜 사람한테 내가 오라 가라 한 거 같아 미안하군.”

    교수실로 가자 배 교수가 맞이해 주었다. 하람이 옅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배 교수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원귀 일이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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