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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43)화 (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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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대리님, 여기 왜 오셨어요?”

    “아, 성준 씨. 두고 간 게 있어서요.”

    현장 사람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성준이 있다.

    하람이 성준에게 인사한 후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 뒤로 기운을 한계까지 죽인 이한이 뒤따랐다.

    “여기 어떤 거 같아요?”

    건물에 일하는 사람이 많아 말을 하는데 눈치가 보였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작게 중얼거리자 곳곳을 살피던 이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해도 안 될 거다.”

    건물 상가 주인이 1층부터 5층까지 계약 완료됐다고 엄청 자랑했는데.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당한 건물주님을 생각하는 사이 문제의 3층에 도착했다.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둘러보았다.

    『어, 또 왔네?』

    『그렇게 굴러놓고 어떻, 히익!』

    안쪽부터 둘러보다 다리를 저는 귀신과 딱 마주쳤다. 어, 하며 손을 드는 순간 귀신들이 기겁했다.

    “이것들인가.”

    이한이 이를 갈듯 낮게 읊조리고는 손을 저어 검을 그러쥐었다.

    『사, 살려줘!』

    혹부리 영감을 닮은 귀신이 다리가 풀린 듯 풀썩 주저앉았다. 이한이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산 자를 괴롭히는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건가. 그것도 감히 내 것을.”

    『자, 잘못, 잘못했…….』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용서를 구하는 귀신의 목이 단 한 번의 움직임에 툭, 잘렸다. 하람이 움찔, 떨었다.

    혹 귀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놀라 굳은 사이 다리 저는 귀신이 이한을 피해 달아나려 했으나 너무나 쉽게 목덜미가 틀어 잡혔다.

    “다리를 저는 것을 보니 네가 저놈의 다리를 다치게 했군.”

    이한이 그래? 하고 물으며 고개를 슬쩍 숙여 귀신과 시선을 맞췄다. 그렇지 않아도 허연 귀신의 얼굴이 더욱 허옇게 질렸다.

    “대답이 들리지 않는군.”

    『……시, 신을 모시는 자인 줄은 몰랐어!』

    “신을 모시든, 모시지 않든.”

    이한이 목을 놓고 귀신의 머리채를 잡고, 검을 들었다.

    “너는 사과부터 해야 했다.”

    높게 들린 새카만 검날이 가로로 긴 선을 그었다. 무어라고 외치려던 귀신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고 검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지켜보던 하람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기운이 더 느껴지지 않는군.”

    이한이 검날 위를 손으로 짧게 쓸고는 검집에 넣었다. 하람이 아, 하고 헛기침했다.

    “……그, 떡볶이 사러 갈 건데, 급한 일 없으면 같이 갈래요?”

    이한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하람이 아하하, 어색하게 웃고는 앞장서서 내려갔다.

    귀신을 잡고, 귀신이 옆에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는지 조용하다. 안도하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얼마 없고 조용했다. 절뚝이며 열심히 걷던 하람이 오른쪽을 보았다.

    “저렇게, 사람 모습이 아닌 건 요괴인가요?”

    하람의 옆에서 걷던 이한이 반대편 거리에 있는 이목구비가 다 뭉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부행신(浮行神)이다.”

    “부행신이요?”

    “떠돌아다니는 못된 귀신.”

    얼굴이 멀쩡하지 않아서 요괴인 줄 알았는데 귀신이라고 한다.

    귀신은 그래도 형태가 좀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못된 귀신이면, 그냥 두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다 깜짝 놀라 하며 묻자 이한이 고개 저었다.

    “저것들 또한 신이다. 저것을 따르는 자가 있을 거고, 내가 굳이 처리할 필요도 없다.”

    못된 귀신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니. 하람이 짐짓 놀랐다가 이내 앞을 보고 걸었다.

    “부행신도 뭐, 능력이 있나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그게 뭐예요.”

    “귀신이라고 해서 다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구나.”

    떡볶이를 핑계로 대화하며 걷길 몇 분. 시야에 점집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점집이 보이고부터 어쩐지 공기가 조금 묘해졌다. 어느 점집을 지날 때는 기운이 좋았고, 어느 점집은 아무렇지도 않고, 어느 점집은 몸이 무거워졌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중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이한이 보였다.

    “불편하시면 돌아갈까요?”

    “됐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한 것 같다.

    하람이 더 가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들며 멈췄다가 따라서 몸을 돌렸다.

    “거기, 잘생긴 오빠 둘!”

    귀신 만나기 좋은 폐가나 병원을 가야겠다, 생각하는데 등 뒤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둘, 이라는 말에 가던 길을 가는데 다시 한번 더 “오빠들!” 소리가 또 들렸다.

    “거기, 깁스한 오빠랑 머리 긴 오빠!”

    깁스와 긴 머리라는 꽤 자세한 설명에 설마 하고 뒤를 보았다. 끝이 조금 해진 낡은 느낌의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했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 이제 오네.”

    타로 가게로 이끈 여자가 앉으라고 하며 자리를 가리켰다. 엉거주춤 앉자 여자가 김이 올라오는 차 두 잔을 앞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로 이한을 본다.

    하람이 놀라 이십 대 초반의 여자를 멀거니 보다 이한을 보았다. 이한 또한 놀란 듯 잘생긴 눈매를 좁힌 채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니. 차 식는다, 어서 마셔.”

    “아, 아니. 이분이 보이세요?”

    믿어지지가 않아 이한을 가리키며 묻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거짓말하는 거 같니?”

    고운 인상의 여자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한을 보고, 그렇다고 귀신이나 요괴인가 하면 기운이 지나치게 맑았다.

    도대체 정체가 뭔가 싶어 가만 보는데 계속 말이 없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인간이 아니군.”

    의심 가득한 이한의 말에 여자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더니 이내 쿡쿡 웃었다.

    『알아볼까, 했는데. 역시 직접 놀러 나온 보람이 있구나.』

    귀에 박히듯 또렷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오도전륜대왕과 같이 머리에 울렸다. 그리고 민낯에 가깝던 여자의 얼굴이 화려하게 변했다. 그도 모자라 검은 원피스 대신 선녀들이 입는 것과 비슷한 하늘하늘한 차림으로 바뀌었다. 하람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 일 좋아하는 오도전륜대왕이 일도 안 하고 지켜본다고 해서 왔는데 참으로 재미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하람을 보며 다시 한번 더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삼신이 장난치는 줄 알았건만, 참이었어.』

    삼신이라는 게 설마 삼신할머니를 말하는 걸까.

    여자의 혼잣말에 놀라움에 기껏 다물었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여자가 입가를 가린 손을 내렸다.

    『우리 아가가 놀랐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나. 나는 널 괴롭히러 온 자가 아니니 마음 놓으렴.』

    괴롭히러 온 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괴롭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하람이 반쯤 넋을 놓고 있다가 옆에 앉아 있는 이한의 허벅지를 꽉 잡고서 그와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 이한 님은 아, 아시죠? 조, 좀 알려 주세요.”

    여자가 이 상황이 웃기는지 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반대로 눈을 가늘게 하고서 여자를 보던 이한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나도 모른다.”

    이한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람과 같이 여자의 기운과 얼굴을 살피는데 여자가 눈을 접어 웃었다.

    『이러다 울겠구나. 그래. 나는 감은장아기라고 하는데 우리 아가, 들어본 적 있니?』

    감은장아기? 삼신할머니는 많이 들어봤으나 감은장아기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었다.

    낯선 이름에 난감해져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러자 감은장아기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삼신보다 못한 것이 없다만 삼신만큼 유명하진 않지. 잘 알고 있으니 그리 당황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말렴.』

    이런 일이 자주 있는지 감은장아기가 여상하게 넘겼다. 그 모습에 긴장이 다소 풀렸다.

    하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가 앞에 있는 종이컵을 들었다. 안에 든 것을 단숨에 삼켰다가 뜨거움에 얼굴을 와락 구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구, 저런!』

    뜨거움에 어찌할 줄을 모르는 하람의 모습에 감은장아기가 종이컵에 찬물을 가득 따라 주었다. 이한이 제 허벅지를 잡고 있는 하람의 손에 종이컵을 쥐여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차가운 물에 탈 것 같은 목이 조금 나아졌다. 하람이 뜨끈뜨끈한 목을 감싼 채로 감은장아기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은장아기가 호호 웃었다.

    『우리 아가는 나이를 먹어도 귀엽구나.』

    “저, 제가 서른이 넘었습니다. 아가는 좀…….”

    꼭 어린 손자 보듯 흐뭇한 얼굴로 난처해하는 하람을 보던 감은장아기가 이한을 보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해졌다.

    『너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감은장아기와 이한이 서로 잘 아는 사이 같다. 말없이 눈치를 살피던 하람이 이한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저분이 누군지 아시나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귓속말하자 이한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가 다시 감은장아기를 보았다.

    “운명신이다.”

    그리스의 모이라이 여신 같은 그런 신인 걸까. 하람이 크게 뜬 눈으로 감은장아기를 멀거니 응시했다. 감은장아기가 웃었다.

    『그래. 아가, 나는 운명신으로 우리 아가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어서 이렇게 직접 왔단다.』

    어린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부처와 같이 자애롭게 웃어 보인 감은장아기가 테이블에 있는 하람의 손끝을 짚었다.

    『생각하고 있는 거, 그거 하지 말거라.』

    손톱 위로 가볍게 닿은 감은장아기의 미끈한 손을 보던 하람이 고개를 들었다.

    “……네?”

    『저놈을 위해 네가 굳이 희생할 필요 없단다. 네 인생을 살거라.』

    다소 뜬금없는 감은장아기의 말에 의아해하던 하람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던 감은장아기가 쓰게 웃었다.

    『아가, 네가 희생할수록 너의 천명(天命, 타고난 수명)이 짧아진다. 하지 마.』

    대답 없는 하람의 모습에 감은장아기가 응? 하고 되물으며 상체를 가까이하는 순간 시커먼 검날이 그녀의 목과 가까워졌다.

    목을 베겠다는 듯 매서운 날카로운 검날에 하람이 놀라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마른 손가락 하나에 검날이 턱, 멈췄다.

    『망자들 중에 강하다 해서 하늘도 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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