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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42)화 (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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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편하게 쉬어.”

    하람이 무너지듯 몸을 숙였다.

    욱신거리는 허리에도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한숨을 반복해서 쉬다 아, 하고 상체를 들었다.

    “나를 마지막으로 한다고 했으니, 내 선까지는 버틴다는 거지?”

    주인은 보통 죽기 전, 죽어서 바뀐다고 했다. 제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말을 듣지 않았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이한이 움직이기 전에 제가 먼저 움직인다면, 이한의 말대로 제가 특별하다면 제 선에서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람이 턱이 당겨질 만큼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내 아침이 밝아오는 창 너머를 보다 일어섰다.

    『하람이가 나왔어!』

    방 밖으로 절뚝절뚝 나가자 툇마루에 있던 노앵설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하람이 깁스를 하지 않은 다리를 잡고 올려다보는 노앵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잤, 안녕.”

    아무래도 노앵설도 잠을 자지 않는 것 같다. 인사말을 급하게 바꾸자 노앵설이 보고 싶었다고 하며 다리를 주물러 댔다. 하람이 미소 지었다.

    “몇 시간 안 잔 거 같은데.”

    『아니야! 하람이 이틀 동안 안 나왔어!』

    “……아, 그래?”

    한두 시간 잔 거 같은데 이틀을 잤다고.

    황당했지만 지금 몸 상태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가, 그럼 이한이 이틀 동안 옆에 있었던 건가 싶어 당황스러워졌다.

    『밥 먹을 거야?』

    “어? 아, 그래야지?”

    『각시한테 말해 줄게!』

    노앵설이 기다렸다는 듯이 부엌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다 화장실로 가 간단하게 씻고 나왔다.

    『각시가 조금만 기다려 달래.』

    짧지만 우렁 각시의 얼굴을 봤다. 이제 얼굴을 계속 보여 주는 건가 했는데 전과 똑같다. 하람이 부엌을 힐끔 보고는 앉았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참새들을 구경하는 사이 툇마루에 죽상이 놓였다. 진한 팥죽을 후후 불어 먹으며 핸드폰을 보았다.

    “어? 발견됐네.”

    깨진 화면에도 여상하게 뉴스를 보다 금강 하굿둑에서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신원 확인 후 인도할 거란 내용에 아직 전달하지 않은 편지가 생각났다.

    방으로 가 조금 구겨졌으나 나쁘지 않은 편지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넣었다. 다시 상 앞에 앉아 핸드폰으로 귀신을 검색했다.

    “이한 님 어디 있는지 알아?”

    『아까 각시가 저 방으로 다과상 들고 갔어!』

    이한에게 일 쉬는 김에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고 배 교수에게 전화해 봐야겠다. 하람이 시간을 확인한 뒤 팥죽을 열심히 먹었다.

    『하람이 힘들어 보여.』

    “응, 조금 힘들어.”

    죽을 다 먹고 씻으려는데 팔, 다리가 움직임이 편하지 않아 씻는 데 한참 걸렸다.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나가자 안타까운 눈으로 보는 노앵설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씻는 것이 어려워 오래 걸렸는데 젖은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는 것도 일이다. 진심으로 계단에서 민 귀신에게 복수하고 싶어졌다.

    “……진짜 복수할까.”

    사무실에 확인해서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면 이한에게 말해야겠다.

    하람이 멀끔한 제 상태를 확인하고는 방에서 나가 사랑방 앞에 섰다.

    “이한 님, 하람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 위를 가볍게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는 이한의 앞에 앉았다.

    “금강 하굿둑에 있던 시신이 발견됐다고 해요.”

    “그렇군.”

    “오늘 편지를 전달할까 합니다.”

    “원귀 일은 다 해결되겠군.”

    이걸로 두 원귀의 원한을 해결하게 됐다.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죽을 무는 이한을 보다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른 귀신들의 이야기를 좀 들을까 합니다.”

    “무슨 말이지?”

    예상대로 이한이 미간을 훅 좁혔다. 주먹을 약하게 그러쥐었다.

    “악업을 줄이는 데 도움만큼 좋은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지금 나보고 잡귀 따위를 도우라는 건가?”

    남을 많이 돕고, 착하게 살면 덕이 쌓인다고들 했다.

    악업을 줄이는 것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말했는데 이한의 반응이 영 좋지 않다. 하람이 잡고 있는 장죽으로 저를 때릴 것 같은 이한의 모습에 슬그머니 깁스한 팔을 들었다.

    “잡귀라고 해도 도우면 나중…….”

    “잡귀를 도와봐야 쓸모없다.”

    잡귀도 잡귀 나름이지 않을까. 아니면 잡귀들이 소문을 듣고 오거나 하지 않을까.

    SNS를 하는 사람처럼 정보가 빠른 귀신들을 생각하는데 이한이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잡귀 말고 악귀나 요괴는 어떤가요?”

    잡스러운 것이 영 별로면 조금 더 단계가 높은 것을 말했으나 이한의 얼굴이 펴지지 않는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한숨을 짧게 쉬었다.

    “이한 님을 돕고 싶은데 제가 방법을 잘 모릅니다.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악업을 줄이는 걸 도우라는데 어떻게 줄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디서 모자란다는 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는데. 이상하게 이한의 앞에서는 바보가 되는 것 같다.

    좀 알려 달라고 하자 이한이 장죽을 입에 물더니 빤히 응시했다.

    “네 말대로 잡귀를 도와준다고 하면, 그 잡귀를 어떻게 찾고 돕겠다는 거지?”

    이한이 하람의 부스스한 머리에서부터 깁스를 하고 있는 다리까지 길게 훑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하람이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냈다.

    “잡귀는 길거리에도 많고, 인터넷으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한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정보가 가득한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다.

    하람이 화면이 깨진 핸드폰을 영 미덥지 않다는 듯 보는 이한에게 웃어 보였다.

    “……저 일단, 배 교수한테 연락하고 오겠습니다.”

    답을 아무리 기다려도 하지 않는다. 기다리던 하람이 눈치 보다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끄응 소리 내어 일어나 방을 나갔다.

    얼마나 오래 씻었는지 영진의 출근 시간이 다 됐다. 하람이 영진에게 차 좀 태워달라고 톡을 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영진에게서 알겠다는 답이 왔다. 곧장 배 교수에게 전화했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이어지더니 네,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찾아뵀던 하람이라고 합니다.”

    -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연락했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 뵐 수 있을까요?”

    - 오늘 수업 때문에 하루 종일 대학에 있을 거 같은데 괜찮다면 이쪽으로 와줄 수 있나?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점심시간에 맞춰 가는 것으로 약속 시간이 정해졌다.

    하람이 전화를 끊고 방으로 가 지갑과 차 키, 편지를 가방에 챙겨 넣고 나왔다.

    『어디 가?』

    강아지와 놀고 있던 노앵설이 강아지를 두고 달려왔다.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와야 해.”

    『하람이는 왜 이리 바빠?』

    “그러게. 노앵설이랑 놀아야 하는데 계속 바쁘네.”

    섭섭해하는 노앵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는 사랑방을 힐끔 본 뒤 안채로 갔다.

    “할머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다 아프네, 다 아파.”

    “할머니가 아프다고?”

    다움을 품에 안고 있는 영진이 하람의 상태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다 순영이 아프다는 소식에 놀란 하람이 방에 올라가려 하는 모습에 팔을 잡았다.

    “기력이 약하시대. 그래서 그런 거니 저녁에 인사드려.”

    “병원은, 병원은 다녀왔어?”

    “어. 병 같은 거 없었어.”

    정말 기력이 약한 것뿐일까. 걱정에 안채 쪽을 멀거니 보고는 걸었다.

    차보다도 병원과 핸드폰이 더 급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병원에 가 젖은 깁스를 새로 하고 제 상태를 제대로 들었다. 그런 다음 서비스센터에 가 핸드폰을 수리하고 택시에 탔다.

    - 대리님, 괜찮아요?

    계단에서 굴렀던 그 건물과 관련된 내용이 필요했다.

    건물로 이동하며 사무실에 전화하자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안부를 물어왔다. 하람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일일이 답한 뒤 건물에 관해 물었다.

    - 안 그래도 거기 심심하면 사람들이 다친대요.

    “그래요?”

    - 네. 갑자기 계단에서 구르고, 어디에 세게 부딪치고, 막 넘어지고.

    혹시나 했는데. 저뿐만 아니라 인부들도 몇 명 다쳤다고 한다.

    사정을 알게 됐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어졌다. 하람이 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문제의 현장에 도착했다.

    멀쩡한 정신으로 오자 확실히 귀기(鬼氣)라고 불리는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졌다.

    “현장 사람들을 돕는 거니 악업을 줄이는 데 도움 되겠지.”

    아니면 대략 난감한데. 하람이 으음, 소리를 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신당동이었지.”

    신당동이 현재는 떡볶이로 유명하지만 본래 무당촌이었던 곳이었다. 그 탓에 점집이 많았다.

    그렇다는 건 이런저런 사연과 온갖 무속인이 가득하다는 것. 한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선, 이한 님.”

    하람이 주변으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한을 소리 내어 부르고, 생각했다.

    정말 올까, 하고 생각하고 얼마 있지 않아 옆으로 검은 연기가 훅 번졌다. 곧 혀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연기 사이로 이한이 걸어 나왔다.

    “왜 불렀지?”

    난데없이 불렸다. 귀찮다는 낯의 이한이 주변을 짧게 둘러보고는 손을 튕겼다. 도포 차림에서 하람과 비슷한 셔츠와 바지로 바뀌었다. 하람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에 있는 잡귀들이 작업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해요.”

    죄 없는 여직원을 울린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현장에 좋지 않다. 하람이 어떠냐는 눈으로 이한을 보았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이런 쓸데없는 일로 감히 저를 불렀냐는 듯 더없이 귀찮은 기색이다. 예상했던 대로 무심한 낯에 하람이 슬픈 얼굴을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기 있는 잡귀가 제 발목 당겨서 이렇게 다쳤어요.”

    남들은 부모님한테 한 번씩 다 해봤다는 고자질을 지금껏 한 번도 안 해봤다.

    어릴 때도 안 했던 고자질을 어색하게 하고 눈치를 보는데 이한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넘어왔나? 넘어온 건가? 넘어온 거 같은데? 하는 순간 이한이 건물을 턱짓했다.

    “앞장서라.”

    대신 복수해 준다는 큰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람이 빨리 앞장서라는 듯 보고 있는 이한의 모습에 터지려는 웃음을 힘겹게 참으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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