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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41)화 (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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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추위에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떨리는 소리를 작게 내며 몸을 트는데 몸이 꼼짝도 안 했다. 하람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아.”

잠기운에 부연 시야에 어스름한 천장과 굳은 얼굴의 이한이 보였다.

“일어났나.”

이한이 하람의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거뒀다. 하람이 제 머리맡에 앉아 있는 이한을 가만 응시하던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어, 툇, 마루에 있었는데?”

분명 툇마루에 누웠는데 눈에 보이는 천장이 방이다. 하람이 의아한 얼굴로 읊조리자 이한이 한숨을 짧게 쉬었다.

“내가 옮겼다.”

잠결에 몸이 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어지러움에 힘 하나 없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읊조렸다.

“네가 자는 동안 순영이 왔다가 갔다.”

“아, 이런.”

할머니가 왔다 갔다니. 걱정 많이 하고 있으시겠다. 난감함에 이마를 매만졌다.

“……몸은 누가 이렇게 만든 거지?”

이한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꼭 지친 사람처럼 곧 꺼질 것 같은 목소리에 하람은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발작 같은 것을 앓는 걸까. 물어보면 안 되겠지. 하람이 새벽 특유의 푸르스름한 불빛에 보이는 이한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열었다.

“……계단이요.”

“계단이 스스로 움직이진 않았을 텐데.”

복수는 좋은 마음이 아니었다. 악업을 줄여야 하는 이한에게 웬 잡귀가 제 발목을 잡아당기고 또 공처럼 굴린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제가, 굴렀어요.”

혼자 굴렀다는 말을 믿지 않는지 이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모습에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더 말하지 못하도록 질문했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옮기고부터 계속.”

어쩐지 머리가 아프지 않더라니. 이한이 해열 시트처럼 이마를 계속 짚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하람이 아, 말끝을 흐렸다.

감사 인사를 하고픈데 어쩐지 조금 부끄럽다. 얼굴을 작게 붉힌 채로 말을 삼키다 마른침을 삼켰다.

“이한, 님은, 평소에 제가 자는 동안 뭘 하세요?”

전부터 궁금했었다. 제가 자는 동안 잠을 자지 않는 이한이 무얼 하는지.

하람이 질문하기 좋은 타이밍에 슬쩍 묻자 이한이 맞은편에 열려 있는 창을 보았다.

“책을 보기도 하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생각을 하거나 자는 네 모습을 보기도 한다.”

잠들지 못할 때는 책과 산책, 하릴없이 생각하는 게 최고였다.

사람이나 귀신이나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얕게 끄덕이다 마지막 말을 늦게 들었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어, 언제부터요?”

이한이 자는 제 모습을 지켜볼 줄은 조금도 몰랐다. 놀라움에 말을 더듬거리는데 이한이 내려다보았다.

부딪친 시선이 침잠했다. 그리고 바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답답할 정도로 한참 굳게 다물려 있었다.

하람이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이한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그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다시 위로 들렸다.

“네가 태어난 날부터.”

끽해야 사랑채에 온 날부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하람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 틈 사이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여리게 새어 나왔다.

“……네가 태어난 날.”

당황스러운 나머지 말을 잃어버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리고만 있는데 이한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보에 싸여 있는 널 처음 본 날. 그때 내 이름을 알게 됐다.”

이한에게 전에 들었었다. 네가 태어날 때 이름을 알게 됐다고.

알고 있다고 답을 할까 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님, 신, 도깨비. 늘 그렇게만 불리다 이한 님이라고 처음 불렸다.”

몇백 년 만에 이름을 알게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이한이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당겼다.

“나는 이 집과 사람들을 지키고 있지만 어떤 애착이나 관심이 없었다. 아니, 처음 몇 명에게는 있었다. 이자는 내 기억을 찾게 해줄까, 이자는 어떨까. 나도 모르게 기대했었는데 돌아오지 않는 기억에 점점 흐릿해졌다.”

이한이 미세하게 당겼던 입술을 바로 하며 한 손을 하람의 이마에 가볍게 두었다. 뜨뜻한 이마에 서늘함이 퍼졌다.

“억겁의 세월을 사는 나에게 있어 필멸자, 그것도 아주 짧은 삶을 사는 이 집 사람들은…… 단풍이었다. 짧은 즐거움을 주는 단풍.”

이마 위로 솜처럼 내려앉은 손이 보드라운 앞 머리카락을 쓸었다.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에 하람이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막지 않았다.

“붉었던 단풍이 검게 변해 떨어지고, 다시 붉게 물들고 하는 것처럼 이 집 사람들도 죽고 새로 태어나길 반복했다. 나는 그 순환을 지켜보며 나는 영영 죽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지.”

혼잣말하듯 덤덤하게 읊조린 이한이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허무해졌다. 기억을 찾고 싶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지겨워지고,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사라졌다. 더 버티고 싶지 않았다. 소멸하고 싶어 주인을 닦달해 온갖 것들을 상대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계속 살아남았다.”

찌르르, 이름 모를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창을 보던 이한이 고개 숙였다.

“그러던 중 네가 태어나고, 내 이름을 알게 됐다.”

새카만 시선이 짧게 빛났다. 그 찰나와 같은 순간을 하람이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는 네가 처음이었는데, 내 이름까지 찾게 했다. 네가 신경 쓰여서, 그래서 지켜보았다.”

혹시나 하람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기운을 한계까지 죽이고 몰래 지켜보았다. 기름칠 된 툇마루를 아장아장 걷던 하람, 엄마보다 할머니를 먼저 배운 하람, 처음 가는 학교에 신난 하람, 연애에 설레는 하람, 미래를 고민하는 하람까지.

“나는 자라는 널 보면서 어쩌면, 하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됐다. 그 희망에 처음으로 내가 주인을 선택했다. 날 믿지 않는 너를, 내 주인으로 선택했다.”

씁쓸하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하고. 복잡한 이한의 얼굴에 내가 뭐라고, 하고 말하려던 하람이 입술을 작게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한이 다시 창 너머를 보았다.

“오도전륜대왕이 후회할 거라고, 하늘의 뜻을 거스른 대가를 치를 거라고 하더군.”

“……후회하시나요?”

오싹한 말을 너무 덤덤하고 무심해서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람이 단호해 보이는 이한의 턱을 보며 이불 아래 감춰진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내 선택의 결과가 어떻든, 나는 너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이다.”

아주 오랜 세월을 고독하게 살아온 이한이 끝을 내겠다고 한다.

끝이라니. 이한을 응시하던 하람이 넋을 놓았다가 얼굴을 구기며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자연스레 상체를 뒤로 물리는 이한을 마주 보며 앉았다.

“저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특별하지도 않고요. 그냥…… 남들이랑 다른, 조금 특이하게 태어난 것일 수도 있어요.”

이한의 마지막이자 집안의 마지막이 되기엔 저는 너무나 평범했다. 끝에 어울리는 특별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과거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게 그저, 그저…… 제가 이단아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술가 집안에 태어난 운동선수, 학자 집안의 만화가 같은 그런 이단아일 수 있었다. 실제로 하람은 무업(巫業)과 나랏일 하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건축 일을 하고 있기도 했다.

하람이 부담감과 당황스러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재고해 달라고 말하는데 이한의 무표정이 달라지지 않고, 입도 열리지 않았다.

“이한 님…….”

조금 전에 이한이 소멸하고 싶어 온갖 것들을 상대했으나 실패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끝을 본다는 게 아닌가.

정말로, 이한이 원하는 대로 악업을 줄여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소멸할 기회가 있을 수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치게 하고 싶지 않고, 큰 문제 없이 돌아가는 집안을 폭풍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한 님, 다…….”

“널 주인으로 정하고부터 이미 준비해 두었다. 내가 소멸해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생각을 읽은 걸까.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이한이 먼저 꺼냈다.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어느 날에 와락 구겼다.

“……처음 만난 날. 저한테 했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셨군요.”

순영의 부름에 오랜만에 본가에 오고, 이한을 만났던 날. 그때 이한이 지금 하는 일을 잠시 쉬고 재산과 주변 정리를 도우라고 했었다.

“그래.”

설마 하고 물었는데 이한이 너무나 여상하게 그렇다고 한다.

그저 순영의 재산을 정리하는 것을 도우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이한은 처음 만나기 전부터 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무슨 이유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람이 이한을 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 특별할 것 없는 이불을 멀거니 보다 다시 시선을 들었다.

“소멸한다는 거. 끝도 다 준비했다는 건가요?”

오도전륜대왕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래서 오도전륜대왕과 대화하러 갔던 걸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 이어졌다.

“그래.”

오도전륜대왕에게 이 사실을 말해 볼까, 라고 생각하는데 이한이 또 긍정했다. 하람이 여전히 무표정한 이한을 보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스토커 같은 말로 사람 놀라게 하더니.”

하람이 나한테 왜 이러냐고 혼잣말하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해 가슴이 답답했다.

왜 하필 저일까 하는 부담감과 이한이 소멸된다는 슬픔에 말문이 막혔다.

얼굴을 덮은 채 울컥울컥 올라오는 답답함을 한참 삼키던 하람이 손을 내렸다. 토끼처럼 발간 눈으로 이한을 보았다.

“진짜, 후회할 수 있어요.”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달라는 뜻을 담아 응시하는데 이한이 기운 없어 보이는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후회라면 이미 여러 번 했다.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 부담 가지지 마라.”

이한이 일어섰다. 올려다보는 하람에게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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