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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39)화 (3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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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출근하기 싫어.”

    또다시 아침이 밝았다.

    하람이 시끄러운 알람을 껐다. 그러고는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다 한숨 쉬며 밖으로 나가 씻고, 출근 준비를 했다.

    꾀병을 부려서일까 아니면 전날 물에 빠져서일까. 몸이 으슬으슬했다.

    셔츠 소매에 감싸인 팔 위를 쓸며 방 밖으로 나가자 모여 있는 참새를 보는 이한이 보였다. 꾸벅 인사했다.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들을까.”

    이한이 하람의 손에 잡혀 있는 브리프 케이스를 보며 장죽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의 눈빛을 따라 아래를 본 하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바로 그만둘 수 없어요.”

    그저께 일을 생각하면 정말 일을 그만두고 싶은데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한에게 이전에 장례식장 갔을 때처럼 유소 좀 빌려주면 안 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물으면 안 될 것 같다.

    귀한 것이라고 했으니 쉽게 빌려주지도 않겠지. 하람이 한숨 쉬듯 담뱃잎을 태우는 이한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려다 아, 소리를 냈다.

    “……혹시, 필요한 거나 가지고 싶은 거 있으신가요?”

    어제 잠들기 전까지 이한에게 줄 만한 것을 생각해 봤으나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물어볼 사람도 딱히 없어 보여 결국 이한에게 직접 물었는데, 이한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묻지?”

    무슨 수작이냐는 듯 보는 시선에 목이 탔다. 하람이 브리프 케이스를 꽉 쥐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없으면 말고요. 다녀오겠습니다.”

    괜한 의심을 사면 좋지 않았다. 여상하게 인사하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채로 갔다.

    “어, 하람아!”

    주차장으로 가는데 등 뒤에서 이름이 불렸다. 뒤를 보자 영진이 툇마루에 올라갔다가 다가와 하얀색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네가 말한 거.”

    “아. 고마워.”

    “이거 진짜 신이랑 연관된 거 맞아? 이상한 데 쓰는 거 아니지?”

    “신이랑 연관된 거 맞고, 이상한 데 쓰는 거 아니야.”

    “……믿는다?”

    하람이 편지를 브리프 케이스에 넣었다. 의심 가득한 영진을 뒤로하고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차가 산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귀신과 요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 한쪽이 으깨진 귀신, 다리를 저는 귀신, 사나운 고양이처럼 털을 잔뜩 세운 요괴, 썩은 나무 위로 입이 달린 요괴까지. 흉측한 꼴을 한 것들을 계속 보자 구토감이 올라왔다.

    “……미치겠네.”

    분명 엄청나게 큰 이무기와 스산한 분위기의 창귀까지 봤는데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다.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운 하람이 핸들에 이마를 기댄 채로 쓴 물을 계속해서 삼켰다.

    “진짜, 일을 쉬어야 하나…….”

    도통 적응되지 않는 것들에 출근길이 고욕이다. 속이 진정될 때까지 핸들에 기대 숨을 고르던 하람이 어느새 식은땀에 반쯤 젖은 앞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하람아, 괜찮아? 얼굴색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아요.”

    가다, 서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더니 하마터면 또 지각할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하람이 저를 걱정스레 보는 우진에게 힘없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 앉아 있는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업무를 준비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출근했다. 일에 집중해야 했다.

    뒤집힐 것 같은 속을 모른 체하며 회의에 참석하고, 의견을 내고, 전달해야 할 내용을 말했다.

    “하람이 혼자 못 보내. 내가 같이 갈게.”

    조금 나아진 속에 편하게 일하던 중 막내 격인 여직원이 죄송하다고 몇 번 말하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뭔가 싶어 대신 전화를 받았다.

    현장에 문제 있으니 당장 오라는 격한 닦달에 나갈 준비를 하는데 우진이 들었는지 같이 가자며 왔다.

    “괜찮아요. 혼자 다녀올게요.”

    “괜찮다니. 너 지금 상태 안 좋아. 급한 건 없으니까 나 찾는 전화 오면 연락해 줘요.”

    곧 죽어도 같이 갈 거라는 기세에 결국 하람이 졌다. 대신 제가 운전하겠다고 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자, 단둘이 있으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

    현장으로 가는데 계속 잠잠하던 우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운을 뗐다. 정면에 보이는 사람이 아닌 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운전하던 하람이 우진을 힐끔 보았다.

    “무슨 일이요?”

    “마음의 준비 했어. 네가 어떤 상태인지 말해.”

    우진이 후우, 한숨을 길게 쉬며 제 가슴을 짚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우진이 심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아 난감해졌다.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저 암…….”

    “오해든 뭐든. 사실대로 말해.”

    사실대로 말하기가 더 난감한데. 하람이 저도 모르게 으음, 침음했다.

    우진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로 착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넘어갈 사람이었다.

    어떡하지. 사실대로 말하고 편하게 일을 쉴까. 아니면…….

    “그냥, 어릴 때부터 앓던 두통이 심해진 것뿐이에요.”

    입을 잘못 놀려 집안과 무관한 우진을 꼬이게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사실대로 말하는 대신 거짓을 말했다.

    “정말이지?”

    우진이 믿지 않는 눈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속이 우진을 속였다는 생각에 다시 안 좋아졌다. 목까지 올라온 쓴 물을 어렵게 삼키는 사이 현장에 도착했다.

    “보여 줬던 색이랑 누가 봐도 다른데, 이거 어떡할 겁니까!”

    대표가 올 줄은 몰랐는지 여직원을 쥐잡듯이 잡았던 남자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하람이 차분하게 고객을 달래는 우진을 보다 홀로 현장을 살폈다.

    『요상한 냄새가 나네?』

    『냄새가 달아, 아주 달아.』

    인부들이 없는 3층으로 가자마자 한쪽 다리를 질질 끄는 귀신과 얼굴에 커다란 혹을 단 귀신이 보였다.

    못 본 척 조금 빠르게 둘러보는데 꼬리처럼 계속 뒤따라오더니 이제는 말까지 했다. 안 들리는 척 딴 곳을 보았다.

    『요거, 요거 우리 봐놓고 딴 곳 보는 거 봐라?』

    『본 거 맞아? 또 나 속였지?』

    『나랑 이렇게 눈이 딱! 부딪쳤다니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하람이 태블릿 PC를 꽉 잡고 몸을 홱 돌렸다.

    입구 쪽으로 가는데 계단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진이 왔다.

    “해결됐어요?”

    우진이 3층 입구 쪽을 휘 둘러보고는 하람의 곁에 섰다.

    “다른 분이랑 다 얘기된 거라고, 얘기해 보라고 했더니 통화하고 오더만 잘 넘어갔어.”

    “다행이네요.”

    “바로 돌아가기 아쉬운데 오랜만에 커피 어때?”

    “좋죠.”

    쑥덕거리는 귀신들을 더 보지 않아도 된다.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쁘게 태블릿 PC를 가방에 넣었다.

    『저놈 봐. 우리 보이는 거 맞다니까. 간다니까 신났잖아!』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까부터 맞다, 아니다로 싸우던 귀신들이 슬슬 눈치채는 것 같다. 서두르던 하람이 눈치를 살피며 계단으로 나갔다.

    “사무실에서 연락 온 거 없어요?”

    “응. 다들 나 없다고 노는 거 아닌지 몰라. 운전 내가 할게.”

    우진이 아침 먹었냐고 하며 손을 내밀었다. 하람이 차 키를 넘겼다.

    “차 빼둘 테니 천천히 내려와.”

    『너! 나 보이지?』

    가는 길에는 조금 편하게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얼굴에 혹 달린 귀신이 앞을 막아섰다. 깜짝 놀라 그만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거 봐! 우리 보인다니까!』

    『얘, 왜 안 보이는 척하니!』

    두 귀신이 앞을 막아서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놀려 댔다. 가만 굳어 있던 하람이 이미 저만치 내려간 우진의 머리를 보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말려들 수 없었다. 멈춰 선 적 없는 것처럼 발을 내딛는데 다리를 저는 귀신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놈 봐라?』

    귀신이니 부딪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나가려는데 별안간 발목이 잡혔다. 그리고 강하게 당겨졌다.

    “어…….”

    허리가 뒤로 훅 휘었다. 곧 긴 계단 위로 맥없이 굴렀다.

    우당탕!

    복도에 거친 소리가 웽웽 울릴 정도로 정신없이 굴렀다.

    전신에 가해지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도 없고, 몸이 말을 듣지도 않았다. 파도에 휩쓸리듯이 맥없이 굴렀다.

    “하람아!”

    고소해 죽겠다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사이로 우진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이, 어찌 ……맞아.』

    『……쯧, 그놈이 알면…… 거야.』

    가물가물한 정신에 깊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으, 앓는 소리를 내며 감은 눈을 떴다.

    “하람, 여기! 여기 좀 봐주세요!”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새하얀 조명이 보였다.

    눈이 시려 고개를 슬쩍 틀어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조명만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우진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언젠가 보았던 흰색 상의에 감색 바지와 재킷을 입은 차사가 보였다.

    『오호, 드디어 눈 떴군.』

    『저희도 이제 그만 일하죠.』

    차사와 시선이 부딪쳤다. 차사 중 한 명이 피식 웃었다. 시선을 돌렸다.

    “……대표, 님. 여기, 어디예요?”

    “병원이야. 너 계단에서 굴렀어.”

    아, 그러고 보니 계단을 굴렀었다. 하람이 무거운 머리를 끄덕이는데 순간적으로 구토감이 확 올라왔다.

    “너 이상할 정도로 한참 굴렀어. 뇌진탕 증상 있을 수 있다고 하니까 가만히 있어.”

    반사적으로 또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우진이 이마를 짚었다. 맥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머리가 멍하고 힘이 없었다. 응급의의 질문에 짧게 답을 이어가는데 어디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쫓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하란.』

    잘 들어보니 비슷한 이름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이름이 정확히 세 번 불리자마자 옆 침대 누워 있던 여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체를 들었다.

    『……음력 시월 이십육 일. 오후 여섯 시 사십구 분. 사인 일산화탄소 중독. 쯧쯧, 아무리 세상 살기가 팍팍하다고 해도 그렇지 자살이라니.』

    『예? 무, 무슨…….』

    『이하란, 저승 대왕을 뵈러 갈 것이다. 옷을 정갈하게 하라.』

    차사 중 한 명이 허공을 똑똑, 노크하듯 쳤다. 그러자 새카만 문이 나타났다. 적패지를 잡고 있는 차사가 이하란을 향해 순하게 웃었다.

    『이제부터 저승 심판을 받을 거예요. 살아생전에 문제가 없었다면 별일 없이 환생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세세한 무늬가 새겨진 새카만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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