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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38)화 (3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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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저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나오는데 누가 작게 불렀다.

    상자 너머로 고개를 빼자 몇 번 봤다고 그새 익숙해진, 푹 젖은 몰골의 장희라는 원귀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 어!”

    『사, 상자가!』

    늘 그랬듯이 허리를 조금 숙여 인사하는데 들고 있는 상자 두 개 중 위에 있는 것이 기우뚱했다. 숙였던 허리를 황급히 바로 했다. 하람과 원귀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죄송해요.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네? 아, 아파트에 있는 귀신들에게 들었어요. 왔다 가셨다고…….』

    귀신들의 커뮤니케이션이 꽤 빠른 듯 원귀가 벌써 소식을 들었단다.

    귀신들이 핸드폰을 쓰거나 SNS를 하는 건 아닐 테고.

    어떻게 들었을까. 상자 옆으로 빼고 있는 눈으로 빤히 보자 원귀가 두 손을 어찌할 수 없다는 듯 꼼지락거렸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제대로 해결한 것도 아닌걸요. 아, 오신 김에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씀 저한테 말해 주실래요? 아버지께 편지 써서 전해 드릴게요.”

    『저, 정말인가요?』

    원귀가 정말 감격한 얼굴을 하더니 눈물을 흘렸다. 어쩐지 그 모습이 짠했다.

    그냥 돕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진심으로 돕고 싶어졌다.

    하람이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물에 푹 젖어 있는 핸드폰을 꺼내 원귀가 말하는 것들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저장했다.

    “배 교수님이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고, 후회하고 있었어요. 덕분에 별장 위치 찾았고 시신도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아…….』

    원귀가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가 들었다.

    “다음에는 원 다 풀려서 보겠네요.”

    『정말,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저보다 같이 있었던 그분이 다 하셨어요. 저승에 가게 되면 이한 님에게 도움 받았다고 해 주세요.”

    『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이게 맞는지,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이한에게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입이 또 계획 없이 떠들었다. 하람이 세상에 다시없을 은인을 만난 사람처럼 반복해서 감사 인사하는 원귀에게 인사한 후 상자를 들었다.

    “이거 뭐야?”

    “다움이 간식.”

    “그건?”

    사랑채를 가려면 자연스레 안채를 지나야 했다. 원귀를 떠나보낸 뒤 상자 두 개를 품에 안고 가다 영진과 딱 만났다.

    위에 있는 상자를 가져간 영진이 여전히 잡고 있는 상자를 턱짓했다. 하람이 내 거, 하고 말했다.

    “너 군것질 안 하잖아.”

    “가끔 해.”

    “……너 사랑채에서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지?”

    흡사 사랑채에서 저 모르게 애라도 키우는 거 아니냐고 묻는 것 같은 눈빛이다. 하람이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무슨, 아. 누나 나 좀 도와줘.”

    “뭐? 그 상자 옮겨 달라고?”

    “아니. 편지 하나만 써 줘.”

    “편지?”

    들고 있던 남은 상자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영진에게 메모해 둔 내용을 보여 주었다.

    “이 내용 그대로 적어 줘.”

    “이게 뭔데?”

    “사랑채 신이랑 연관된 일이야.”

    사랑채에 있는 신과 연관된 일이라는 하람의 말에 영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잡고 있는 상자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누나?”

    “어? 어, 신과 연관된 거면 해야지. 알았어.”

    원귀에게 배 교수가 필체를 모른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가 써도 됐으나 이왕이면 같은 여자가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영진에게 대필을 부탁했다.

    하람이 핸드폰으로 보내 준다고 하고 상자를 들고 안채로 넘어갔다.

    『하람이다! 하람이 왔어!』

    안채로 가자 툇마루에 앉아 있던 노앵설이 두 팔 들고 우다다 달려와 다리를 꽉 부여잡았다. 하늘에 있는 별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반짝거리는 노앵설의 두 눈에 어쩐지 정말로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약속 지켰어.”

    안고 있는 상자를 흔들어 보이자 노앵설이 그렇지 않아도 큰 두 눈을 더욱 크게 뜨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인간들이 먹는 과자가 한가득이야!』

    툇마루에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를 동물 선객이 가득했다. 그 선객 사이로 상자를 두자 노앵설이 신나게 과자를 뒤적거렸다.

    “저기, 이한 님.”

    과자를 죄다 뜯을 기세인 노앵설을 애써 말린 뒤 봉지 과자 하나를 뜯어주는데 도포 차림에 장죽을 입에 문 이한이 나왔다.

    하람이 이한을 부르고는 개별 포장된 핸드크림 두 개를 내밀었다.

    “우렁 각시랑 우렁 도령한테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선물을…….”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하려다 뒤늦게 이한의 선물을 사지 않은 게 생각났다.

    매번 이한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그의 선물을 까먹었을까. 당황스러워 그만 말문이 막혔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지금이라도 가서 사 와야 할까. 아니면 이한 님 것은 신중하게 고르는 중이라고 회피해야 할까.

    소리 없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이한이 가까이 내밀어진 핸드크림을 한 손으로 가지고 갔다.

    “우렁 각시랑 우렁 도령에게 주면 되는 건가?”

    눈치로 뜻을 알아차린 이한이 핸드크림을 가지고 부엌으로 떠났다. 그리고 1분도 채 있지 않고 다시 왔다.

    “마셔라.”

    이한이 가지고 나온 샛노란 액체가 든 대접을 내밀었다. 하람이 의아한 얼굴로 엉거주춤 받았다.

    “우렁 각시의 보답이다.”

    단내가 폴폴 풍기면서 얼음과 밥알이 동동 떠 있는 액체는 호박식혜였다.

    빛깔 고운 식혜를 보다 이 식혜의 의미를 듣게 됐다. 하람이 부엌 쪽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잘 마실게요.”

    입 한번 떼지 않고 시원하게 호박식혜를 다 마셨다. 달달함 탓인지 아니면 시원함 탓인지 가슴이 지끈지끈 잘게 진동했다.

    어쩐지 친구에게 생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두근두근했다.

    뺨을 슬쩍 붉히며 대접을 툇마루에 내려놓는데 푸드득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쫓다 정자 쪽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데 그보다 이한이 더 빨랐다. 허공을 젓자마자 소환된 검의 칼자루를 쥐는 순간 시커먼 것이 그 손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반응이 제법이구나.』

    “갑자기 나타나는 건 여전하시고.”

    『네놈 보러 온 거 아니다. 썩 비켜라.』

    “싫습니다.”

    머릿속에 나이가 느껴지는 낮은 남자 목소리가 얕게 울렸다.

    목소리를 신기하게 듣고 있던 하람이 슬그머니 이한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뺐다. 새하얀 손등 위로 당당하게 앉아 있는 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하루 고생했을 텐데 얼굴빛이 좋구나.』

    까마귀는 입을 벌리지 않았으나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손자 대하듯 친근하게 말했다.

    이 상황이 더없이 당황스럽고, 믿어지지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저 까마귀가 바로 이한의 상사 오도전륜대왕이었다. 하람이 이한의 옆으로 나와 까마귀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누구와 달리 인사성이 좋구나.』

    “그 인사성 좋은 것이 여즉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본론을 말하세요.”

    『저가 처먹지 않는다고 주인을 굶기다니. 아주 빌어 처먹을 놈일세.』

    이한의 말에 그제야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혹여 꼬르륵 소리라도 날까, 배를 슬그머니 가리는데 까마귀가 몹시도 격한 말을 쏟아냈다. 다소 황망해졌다.

    『주인의 밥도 차려 주지 않는 것을 보니 참으로 쓸모없는 양손이로다. 다음 번에는 아주 없애 주마.』

    “밥상 들 필요 없으니 그것 참 맘에 드는군요.”

    『쯧쯧, 빌어먹을 놈. 이런, 배고픈 어린 주인을 마냥 세워놨구나.』

    이한을 노려보던 까마귀가 멀뚱히 서 있는 하람을 보았다.

    『그래. 오늘 하루 어땠느냐?』

    까마귀가 갑자기 순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한을 향해 모진 말을 했으면서 더없이 인자해졌다. 당황스러워 대답이 늦게 나왔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당황스러웠으나, 괜찮았습니다.”

    『분명 지키는 것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심성이 곱다 고아.』

    상사답게 이한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동질감 비슷한 것이 느껴져 긴장감이 조금 줄었다. 하람이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네가 마음씨를 곱게 쓴 덕분에 원귀가 하나도 모자라 둘씩이나 원을 풀게 됐다. 그도 모자라 또 다른 자들의 원까지 저승으로 오게 됐다. 처음치고 아주 기특하구나.』

    귀신도 모자라 저승까지 소식이 간 듯 오도전륜대왕이 칭찬해 왔다. 빠른 속도가 놀랍기도 하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받은 이른 칭찬에 부끄럽기도 했다.

    “아직, 처리된 것이 없는걸요.”

    『겸손하기까지 하고.』

    이한의 손등에 있던 까마귀가 짧게 날아 하람의 손목 위에 앉았다.

    『이무기가 내린 비와 움직임에 강 아래에 묻혀 있던 시신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다. 근방에서 일하는 자들이 슬슬 발견할 거다.』

    일주일 정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발견될 것 같다.

    와, 하고 슬쩍 이한을 봤다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혀를 차는 모습에 다시 까마귀를 보았다.

    『내 조만간 만나러 오마. 그때까지 밥 잘 먹고 건강하거라.』

    까마귀로 분한 오도전륜대왕이 떠나려고 하는데 이한이 버릇없이 까마귀를 부여잡았다.

    『네, 네 이놈! 정녕 미쳤느냐!』

    어서 놓지 못하냐고 외치는 까마귀를 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닫힌 사랑방 문을 보던 하람이 몸을 돌렸다.

    『우렁 각시가 상 가지고 왔어! 어서 먹어!』

    까마귀를 피해 용마루로 가 과자를 먹고 온 노앵설이 하람의 바지 자락을 잡아당겼다. 하람이 언제 놓았는지 툇마루 한쪽에 있는 칠첩반상 앞에 앉았다.

    종일 굶었더니 부담스러운 밥상도 반갑다. 숟가락을 들다 아, 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영진에게 메모해 두었던 내용을 보냈다.

    20대 여자처럼 써 달라는 어딘가 황당한 부탁을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앞마당에서 동물들과 뛰어다니는 노앵설을 보며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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