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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37)화 (3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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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한번 터진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인 눈물이 이때다 하고 일제히 터진 것처럼 한참 울었다.

    하람이 언제부터인가 잡고 있던 이한의 손목을 놓으며 헛기침했다. 이한이 하람의 벌건 눈두덩을 보고는 팔을 거두고 벗고 있던 셔츠를 입었다.

    “그래. 다 울었나.”

    “……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아프다 못해 목까지 쉬었다. 거치대에 있는 생수병을 들어 남은 물을 다 마셨다.

    “제가, 원래 이렇게 울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 많이 당황하…….”

    “왜 울었지?”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는데 이한이 말허리를 자르고 질문해 왔다. 하람이 어, 하고 말을 길게 빼다 붉어진 목을 손으로 감쌌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어요.”

    “목소리?”

    이한이 미간을 훅 좁히며 다리를 꼬았다.

    “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널 구한 게 아니라 네가 날 구했다고. 했어요.”

    멀리서 들린 말을 다시 생각하고 따라서 말한 것뿐인데 또 슬퍼졌다. 하람이 입술을 깨무는데 이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질문에 대한 답을 했는데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이한 님?”

    물티슈로 눈가를 닦아 낸 하람이 굳은 얼굴로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이한을 보다 슬쩍 부르자 그제야 시선을 맞췄다.

    “……네가 내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게 확실한 거 같군.”

    “네?”

    이한의 기억에 연관되어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 하람이 의아해하는데 이한이 다시 생각에 빠졌다.

    물어도 답을 하지 않을 것 같다. 하람이 조용히 구급상자를 갈무리하고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을 보며 운전하고 얼마 있지 않아 하굿둑에 닿았다. 그리고 아까까지는 밝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하람이 우산을 챙겨 차에서 내리려는데 불쑥 팔이 잡혔다. 놀라 뒤를 봤다가 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기다려라.”

    무슨 일 있는지 이한의 눈매가 찌푸려져 있다.

    뭔가 하는데 이한이 스르륵 차에서 나갔다. 주변을 살피더니 검을 쥐었다.

    아무래도 뭐가 있는 것 같다.

    하람이 긴장하는데 이한이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차에서 내려 주춤주춤 다가갔다.

    “호랑이보다 더한 것을 볼 거다. 놀라지 말고 최대한 침착해라.”

    호랑이보다 더하다니. 뭐, 용이라도 보는 걸까.

    우산 손잡이를 두 손으로 바짝 부여잡고 이한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강에 거대한 무언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이한의 인사에 강물에 있는 거대한 것이 꼭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하람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시간을 세며 지내는 처지가 아니라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40년 정도 된 것 같구나.』

    용이라고 하기에는 얼굴 같은 것이 험하고, 뱀이라고 하기에는 몹시도 거대하다.

    언뜻 지독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구렁이인지 이무기인지 모를 것을 올려다보는데 미끈한 눈이 돌려졌다.

    『……내가 사람을 기피한다는 걸 그새 잊어버린 건가.』

    웬만한 빌라만큼 거대한 몸이 숙여지며 하람과 가까워졌다. 하람이 당장 커다란 아가리를 벌려 저를 삼킬 것 같은 존재에 숨을 삼켰다.

    “평범한 자가 아닙니다.”

    자동차 바퀴만 한 큰 눈알을 굴리며 하람을 살피던 이무기가 다시 뒷짐 지고 선 이한을 보았다.

    『물귀신 하나가 죽었던데, 네 짓이었구나.』

    “그 물귀신에게 먹혀 원귀가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의 원을 풀기 위해 왔습니다.”

    『……여전히 저승의 개 노릇을 하는데, 이번에는 달라 보이는구나.』

    이무기가 우산이 무기라도 된다는 듯이 꽉 쥐고 있는 하람의 손을 보고는 조금 물러났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산이고 강이고 뒤집어 대더니 이제야 정신 차렸는가 보구나. 그래, 나에게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무기의 말에 희미하게 웃던 이한이 둑을 보았다.

    “물귀신이 삼켰던 것들이 올라와 인간들의 눈에 띄도록 비를 내려주십시오.”

    『대가 없이 해 줄 수 없다는 걸 잘 알 테지.』

    이무기는 비를 불러오는 능력을 가진 요괴였다. 이한의 말대로 강물에 깊게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람이 예상 못 한 방법에 소리 없이 감탄하던 중 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자 이한이 다시 이무기를 보았다.

    “승천하실 때 제 주인이 용이라고 외치는 건 어떻습니까.”

    이한을 보고 있던 하람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내 승천을 돕겠다는 건가?』

    “연못이 강이 될 때까지 수련하셨는데 지겹지 않으십니까.”

    이한의 태연한 말을 듣던 이무기가 놀라 말을 잃어버린 하람을 보았다가 드넓은 강을 응시했다.

    『……저승의 개가 걱정할 만큼 내가 오래 살았나 보구나.』

    회한이 느껴지는 음성과 함께 이무기가 강을 보던 시선을 돌려 이한을 보았다.

    『약속을 잊지 않을 거라 믿겠다.』

    “저승에 묶인 자인데 어찌.”

    이한이 등 뒤로 감추고 있던 검을 없앴다. 동시에 하늘에서 쿠르릉 소리가 들리더니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늘어나더니 곧 우산을 뚫을 듯이 우악스레 쏟아져 내렸다.

    “가자.”

    이무기가 약속을 지켰다는 듯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한도 몸을 돌렸다. 하람이 강을 보았다가 소란스레 쏟아지는 비에 순식간에 젖은 바닥을 조심하며 이한을 뒤따랐다.

    “이무기가 나타날 줄 아셨어요?”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차로 돌아오는 그 잠깐 사이에 기껏 갈아 신은 운동화가 흠뻑 젖었다.

    하람이 찝찝한 운동화를 벗다가 조수석에 있는 이한을 보았다.

    “물에 물귀신만 있는 게 아니니까.”

    오늘 하루 별별 것을 다 보고, 별별 일을 다 겪었다.

    승천을 돕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그리고 일을 저지르기 전에 계획을 먼저 말해 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은데 이한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까부터 생각이 많아 보인다. 선뜻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에 하람이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에 집 주소를 입력하고 차를 출발했다.

    차가 한산한 도로 위를 달릴 때까지 내리던 비가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지역이 바뀌고부터는 내리지 않았다.

    이무기의 능력은 지역 한정인가 보다,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난데없이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그도 모자라 채널이 제멋대로 바뀌기까지 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제가 귀신과 요괴를 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악마까지 꼬이는 걸까.

    무서움을 지우기 위해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는데 라디오 소리가 거슬렸는지 이한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주변에 죽은 것이 많이 있나 보군.”

    시종일관 멀거니 정면만 보던 이한이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그를 따라 옆을 보았다가 불현듯 지금 있는 위치가 과거, 사람이 다수 죽었던 구간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하람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예전에 이 근처에서 사고가 크게 났어요.”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빗길인지 아니면 눈길인지 사고가 크게 났었다.

    신기해하는 사이 악마인지 귀신인지 모를 것이 들린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던 라디오가 다시 조용해졌다.

    익숙한 적막이 흘렀다. 하람이 운전하는 틈틈이 입을 가만 다물고 있는 이한을 힐끔거렸다.

    한 번 또 한 번. 엄마 모르게 간식 먹으려는 애처럼 이한을 살피길 몇 번. 핸드폰이 덜덜 떨었다.

    적막을 깨는 핸드폰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영진의 이름에 기쁘게 전화를 받았다.

    “어, 누나.”

    - 할머니가 제주도 말고 온양 어떠시냐고 하는데 넌 어때?

    통화 음질이 좋지 않았다. 꼭 물속에서 통화하는 것처럼 영진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뭐지, 하다 물에 빠졌던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한숨을 짧게 쉬었다.

    “온양? 온양에 볼 게 있나.”

    - 온천 있잖아.

    “제주도에도 온천 있잖아.”

    - 어르신들은 온천 하면 온양이야. 그래서 어떡해?

    할머니 비행기 한번 태워드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할머니가 온양 어떠냐고 물었으니 제 의견은 없느니만 못했다. 알아서 하라고 말하려는데 왜인지 이한의 눈치가 보였다. 마른침을 삼켰다.

    “……누나가 알아서 해.”

    - 저가 가자고 해놓고 반응이 뭐 이래.

    여행 가자고 한 놈이 무신경하다는 혼잣말 같은 쓴소리를 끝으로 반가운 전화가 짧게 끝났다. 하람이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정면을 보고 있는 이한을 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좁은 적막에서 벗어나고 싶어 속도를 냈더니 이르게 집으로 가는 도로에 들어섰다.

    가는 길에 이한에게 말하고 차를 잠시 세웠다. 삐진 노앵설을 달래기 위해 작은 마트에 들어갔다.

    “행사해요! 한번 보고 가세요.”

    또 귀신을 만날까. 잔뜩 긴장하던 중 향긋한 향이 맡아졌다. 향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가 여러 화장품 가운데 핸드크림이 보였다. 어쩐지 시선이 고정됐다.

    그러고 보니 우렁 각시와 우렁 도령에게 도움만 받았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밥과 간식을 차려 주고 청소도 해 주고, 옷을 다려 주기까지 했다.

    양심에 찔려 마트에 있는 핸드크림 중 가장 비싸고 보습 효과가 좋다는 것으로 두 개 사 포장을 요청했다.

    최대한 주변을 무시하며 과자 코너로 가 과자를 두 개씩 골라잡고 음료 코너로 가 아이용 음료도 몇 개 골랐다. 마트를 더 둘러보지 않고 빠르게 포장하고 도망치듯 나갔다.

    이한은 여전히 생각 중인지 마트에 가기 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안도하며 차 뒷좌석에 다움이와 노앵설에게 줄 간식이 든 상자를 두고 다시 운전했다.

    열심히 달린 차가 집이 있는 산기슭 입구에 닿을 즈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한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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