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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36)화 (3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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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에 들어가 물귀신을 유인해야 할까. 그러면 이한이 돌아올까.

    초조함에 스스로 물에 들어가 물귀신을 만날 생각을 하던 중 불현듯 한 존재가 생각났다. 하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도전륜대왕님!”

    이한의 진짜 주인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비는 그때, 물 위로 빛이 번쩍했다. 동시에 촤악, 물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하늘을 보던 시선을 홱 돌렸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 가운데 이한이 나타났다. 곧 한 손에 무언가를 쥐고 또 다른 한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가왔다.

    “아…….”

    너무 놀라거나, 기쁘면 말을 잃어버린다고 하던데. 정말 말을 잃어버렸다. 그저 다가오는 이한을 넋을 놓고 보았다. 금세 가까워진 이한이 쥐고 있던 물귀신을 흙바닥에 내던졌다.

    “지금껏 내가 삼킨 것들을 두는 곳을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물귀신의 시야 바로 앞에 검을 내리꽂았다. 물귀신이 파르르 떨며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힘 하나 없는 목소리로 하굿둑이라고 말했다.

    “네가 현생에서 지은 죄는 명부에서 판단할 것이다.”

    이한의 검이 조금의 자비도 없이 물귀신의 목을 베었다.

    『……원통하구나.』

    서글픈 읊조림을 끝으로 물귀신이 물이 되어 사라졌다.

    물귀신이 죽으며 흘린 물에 푹 젖어 검게 보이는 흙을 무심히 보던 이한이 아까부터 말이 없는 하람을 보았다.

    “목을 다쳤, 울었나?”

    “……네?”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이한을 마냥 올려다보던 하람이 한 박자 늦게 시린 눈을 끔뻑였다.

    “아, 죄송한데, 못 들었어요.”

    넋을 놓고 있었더니 이한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하람이 다시 말해 달라 하며 시린 눈에 눈매에 주름이 질 정도로 찡그리고는 이한을 보았다.

    “울었냐고 물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눈을 바로 한 하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이한의 어깨에서 등까지 길게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얼굴로 이한의 어깨 위를 짚었다.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왜 가만있어요! 어, 어떻게…….”

    “그냥 둬라.”

    “어떻게 그냥 둬요!”

    칼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상처가 깊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파 보여 걱정하는데 이한이 태연했다.

    “왜 이렇게 태연, 하…… 차에 약 있어요. 어서 가요.”

    “알아서 낫는다.”

    “그게 무슨…….”

    움푹 파인 것처럼 상처가 깊은데 알아서 낫는단다. 무슨 소린가 싶어 이한의 얼굴을 봤다가 더없이 무심한 얼굴에 그의 어깨 위를 짚은 손을 슬쩍 들었다.

    어깨에서 피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벌어진 틈 사이로 붉은 속살이 보이지 않고 그저 시커멓기만 했다.

    “이게…….”

    “그냥 둬도 아프지 않으니 둬라.”

    뒤늦게 이한이 사람이 아니라는 게 생각났다.

    “그보다.”

    이한의 모습이 워낙에 사람과 같아 자꾸 깜빡한다.

    당황스러운 가운데 뺨에 이한의 왼손이 닿았다. 하람이 화들짝 놀라 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가 어? 하고 목청을 높였다.

    “왼손, 돌아왔네요?”

    “누구 덕분에 대왕의 화가 이르게 풀린 듯하군.”

    이한이 멀쩡한 제 왼손을 힐끔 보고는 하람의 얼굴 가까이 옮겼다. 하람이 커다란 손을 보았다.

    “울었군.”

    “……저 물에 던진 거 기억 안 나세요?”

    “기억력이 안 좋아서.”

    안타깝게도 운 기억이 없었다. 뭐지, 하다 놀림을 눈치챘다. 지금까지 했던 걱정이 싹 날아갔다.

    하람이 앞서 하지 못했던 타박을 할까 하는데 얼굴 바로 앞에 있던 손이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것 같은 위치에 손을 마주 잡고 일어섰다.

    “찔리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요.”

    “매사가 꼬였군.”

    타박하는 말과 달리 말을 하는 사람, 아니,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자가 웃고 있다.

    몹시도 능글맞은 모양새에 하람이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하늘을 보았다.

    “……이런 사람을 뭐 하러 걱정했는지.”

    “날 걱정했나?”

    다급히 오도전륜대왕을 부른 것을 이한이 보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봤다면 꽤 끔찍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혼잣말을 읊조린 하람이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려 이한을 보았다.

    “제가 방금 사람이라고 한 거 못 들으셨나요?”

    “귀가 안 좋아서.”

    물에 빠지더니 입가를 조이는 나사가 녹슬기라도 한 걸까. 이한이 답지 않게 자꾸 능청을 부린다. 하람이 질색 어린 얼굴을 했다가 걸음을 빨리했다.

    “왜, 운 게 부끄럽나?”

    이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걸었는데 정말 유감스럽게도 이한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람이 어느새 제 바로 옆에서 능글거리는 낯으로 나란히 걷고 있는 이한을 짜증 난 얼굴로 노려보았다.

    “안 울었습니다. 물에 빠져서 얼굴에 물기가 묻은 거였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서두르지?”

    “추워서 차에 빨리 가려고요.”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걸 그새 잊었나?”

    그새 잊고 있었다.

    “……아니요. 알고 있습니다!”

    서둘러 대꾸했으나 이한이 알 만하다는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그럼 오도전륜대왕을 크게 부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나?”

    물귀신이랑 싸운다고 못 들은 줄 알았는데? 오도전륜대왕을 부른 것을, 넋을 놓았던 것을 이한이 다 알고 있었다. 하람이 입을 작게 벌리며 얼굴을 화르르 붉혔다.

    “인간에게 걱정도 다 받아 보고. 오래 살 일이군.”

    이한이 당황스러움에 굳어 버린 하람을 보며 희미하게 웃고는 뒷짐 진 채로 앞장서서 걸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놀렸냐는 소리가 이한의 마지막 말에 막혀 버렸다. 느긋한 속도로 멀어지는 이한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하람이 한 박자 늦게 뒤따랐다.

    춥다는 말을 믿었는지 이한이 시신이 있는 하굿둑이 아니라 차로 향했다.

    “저 옷 좀 갈아입을게요.”

    목적지가 강이라서 혹시나 하고 예비 옷을 가지고 왔었다.

    하람이 트렁크에서 수건을 꺼내 물기를 대충 닦아 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한은 그저 손을 튕겼다.

    “하굿둑까지 걸어가면 시간 오래 걸려요. 차로 가요.”

    이한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진이 다 빠졌다. 하람이 걷기에 무리가 있고 또 거리가 멀다고 하고는 트렁크에서 구급상자를 챙겨 운전석에 앉았다.

    “이한 님, 상처 좀 보여 주세요.”

    차 밖에 서 있던 이한이 조수석으로 와 앉았다. 하람이 허벅지에 둔 구급상자를 열어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이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냥 두어도 나아진다. 두어라.”

    분명 다친 자는 이한인데 얼굴이나 목소리가 꼭 남의 상처를 말하듯 무심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몸인데도 관심 없고, 함부로 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슬펐다.

    “절로 낫는다고 해서 그냥 두어도 된다는 건 아니잖아요.”

    하람이 어서요, 하고 단호하게 말하며 이한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에 꼼짝도 하지 않던 이한이 결국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추가 풀리면서 감춰졌던 상체가 그리고 상처가 드러났다.

    “……세상에.”

    어깨만 다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슴과 옆구리도 다쳤었다.

    마치 손톱에 길게 그인 것처럼 길고, 조금 벌어지기까지 했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가 서둘러 상처 테이프를 꺼냈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상처를 더없이 심각하게 치료한다.

    이한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숨죽여 치료에 집중하는 하람을 가만 보는데 어디선가 흡,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람이 우는 건가 싶어 잘 보이지 않는 눈가를 보기 위해 상체를 뒤로 뺐다.

    ‘왜 이리 다치십니까. 어찌…… 저 보고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저를 가장 많이 울리는 거 아십니까?’

    ‘이런,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그만 울어라. 응?’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는 힘겨운 목소리와 애가 탄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두통이 일어 미간이 훅 좁혀지고, 몸이 굳었다.

    “이한 님?”

    갑자기 이한의 복부가 바짝 조여진다. 하람이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가 혼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얼굴로 굳은 이한의 모습에 따라 굳었다.

    “왜 갑자…….”

    ‘네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널 구한 게 아니라 네가 날 구했다.’

    왜 갑자기 굳었을까. 상처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이한에게 묻는데 깊게 숨죽인 목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먹먹하고, 슬펐다. 가슴이 왈칵 조여지더니 눈에 압이 오른 것처럼 뜨거워졌다.

    “……네가 왜 울지?”

    뺨에 이한의 손이 조심스레 닿았다. 서늘한 손이 뺨을 가볍게 쓸어 눈물을 훔쳐 갔다.

    침잠하게 가라앉은 이한의 얼굴을 응시하던 하람이 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내 제 눈물을 훔쳐 간 이한의 손가락을 보며 제 뺨을 더듬었다.

    “……제가 울, 었나요?”

    이한이 대답 대신 다시 한번 더 길게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냈다.

    “내가 왜, 아…….”

    왜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견고한 둑이 갑자기 무너진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람이 당황하며 두 손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계속 훔쳐냈으나 그보다 눈물이 더 많이 나왔다.

    “이, 왜, 어, 아니, 어…….”

    눈물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말을 더듬거리며 눈물을 닦는데 혀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손에 눈이 다 덮였다.

    이한이 울지 말라고 손을 덮어 준 것일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눈물이 더 나왔다.

    “……흐윽, 흑.”

    하람이 제 눈가를 덮은 얼음팩만큼 차가운 이한의 손에 기대 이유도 모르고 아이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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