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흉측하지는 않지만 크기와 위압감에 소름이 돋았다.
숨을 삼키는데 아까부터 하람을 지켜보던 큰 호랑이가 입을 쩍 벌렸다. 하람이 움찔, 떨자 이한이 제 뒤로 물려 숨겼다.
“물에 빠져 죽은 원귀 하나의 원을 들어주러 왔다.”
『……여즉 명부의 일을 하는가?』
“그러는 귀께서도 아직도 산군의 먹이를 구하시는가.”
『먹을 것이 통 없어, 우리 산신께서 굶어 죽겠소.』
“저런.”
『그러니 그자를 내놓으시오.』
창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이한에게 가려진 하람을 지그시 보았다. 하람이 어깨를 좁히며 저도 모르게 이한의 셔츠를 부여잡았다.
“내 것을 삼켜 어찌 될 줄 알고.”
『우리 산신께서 굶주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
“내가 그 꼴을 순순히 두고 볼 것 같은가?”
『……설마 우리 산신께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원하신다면야.”
스르릉, 스산한 소리와 함께 검은 검이 겉으로 드러났다. 창귀가 북두칠성이 새겨진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을 보다 이한의 왼쪽 손목을 보았다.
『……고작 한 손으로 우리 산신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가?』
“고작 한 손이라니. 이 한 손으로 못 하는 것이 없거늘.”
이한이 한쪽 입꼬리를 늘려 웃으며 잡은 검 끝을 창귀에게 겨눴다.
『저승의 개께서는 너무 오래 살아 겁이 없어진 게요?』
“내가 정말 겁을 놓으면 어찌 될 줄 알고. 안 그러신가, 산군?”
시종일관 하람을 보던 호랑이가 이한을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한이 하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자가 내 새로운 주인인데, 살겠다고 목줄을 놓으면 감당할 수 있겠나?”
『이놈……!』
“그도 아니면 내 오랜만에 여강진에게 산군에 관해 말해 볼까?”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창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왜 저런가, 하고 생각하고 얼마 있지 않아 여강진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그러니까 호랑이를 주먹으로 때려죽인 자, 였던가. 제 기억이 맞는다면 창귀의 반응이 이해됐다.
“산군.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기쁜 것은 내 잘 안다만 이자는 내 것이다. 이만 물러나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하지.”
이한이 하람의 허리를 더욱 바짝 안았다. 창귀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저승의 개께서는 겁도 모자라 뵈는 게 없는 것 같소.』
“고작해야 산 지키는 범의 종놈 주제 말이 많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고무줄이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하람이 눈치를 살피다 이한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여는 순간 호랑이가 몸을 돌렸다. 창귀가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느냐. 주인 가는 데 따라가지 않고.”
이한이 웃는 낯으로 떠나는 호랑이를 턱짓했다. 창귀가 으득,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가 이내 몸을 홱 돌려 떠났다.
터억터억, 소리 내어 떠나는 호랑이와 창귀를 보던 하람이 맥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하.”
꼼짝없이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이한의 주인 일도 버거운데 호랑이의 종이라니. 절대 못 할 짓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손이 내밀어졌다. 하람이 고개를 들어 가까이 내밀어진 손과 이한을 보았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넌 참 무서워하는 게 많군.”
하람이 이한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호랑이가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이라면 다 무서워할 겁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과도 지내면서 호랑이가 뭐 별거라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은 호랑이처럼 무섭게 생기지 않고 잘생겼잖아요. 라고 말하면 비웃음을 사거나 능글거릴 것이 분명하다. 하람이 입술을 비죽이며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근데 진짜 창귀랑 싸울 생각이었어요?”
“창귀는 별거 아니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산군이 문제지.”
창귀 때문에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호랑이는 무리인가 보네요.”
“한 손이 없으니까.”
“……가만 보면 이한 님도 대책 없는 거 같아요.”
고작해야 산 지키는 범이라고 자극이란 자극은 다 해놓고 무리라고 한다. 하람이 무슨 소리냐는 듯 보는 이한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한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너만큼 대책 없을까.”
“저는 그래도 상대, 어…….”
눈에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하람이 어어, 소리 내며 몇 걸음 앞으로 가 한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꿈에서 봤던 풍경이예요!”
분명 남동생 같은 남자에게 쌍욕 먹다 물에 빠진 곳이다! 하람이 이한을 두고 먼저 물가 근처로 달렸다.
흙길과 엉망으로 자라 있는 잔디, 바로 옆으로 흐르는 강. 물안개는 없지만 확실했다.
“여기, 맞아요.”
금세 하람의 옆에 선 이한이 강을 보았다.
“깊어 보이는군.”
“그러게요. 아, 그런데 여긴 왜 찾은 건가요?”
그러고 보니 이한이 여길 왜 찾은 거고, 시신을 어떻게 찾을지, 예상가는 게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이한을 빤히 보자 강을 보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물 좋아하나?”
“좋아하지도, 싫어하…… 아, 아니요! 안 좋아합니다!”
왜 갑자기 물을 좋아하냐고 묻는 걸까 하다 바로 눈치챘다. 하람이 다급하게 아니라고 외치며 뒤로 물러나는데 이한이 웃었다.
“잠시면 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이 쏙 빠질 정도로 환하게 웃더니 하람의 팔을 잡아 가볍게 강에 내던졌다. 하람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강에 풍덩 빠졌다.
“이, 이한, 이!”
안 그래도 물에 빠지는 꿈을 꿔 별로인데 진짜로 물에 빠졌다. 거기다 주인이라고 하고는 저를 함부로 한다! 물 위로 떠오른 하람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물을 괴롭게 토해내는 소리 사이로 욕하는데 이한이 검을 쥐었다.
“자, 네가 좋아하는 홑몸이다. 어서 나와라.”
무슨 개소리냐고 소리치려는데 갑자기 일렁이는 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산 것을 바치는 자가 다 있구나.』
별안간 물비린내가 훅 퍼졌다. 곧 머리카락을 틀어 묶고 있으면서 바짝 마른 몸매에 눈이 길게 찢어지고, 흠뻑 젖은 여자가 나타났다. 하람이 놀랐다가 숨을 크게 삼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어색하게 헤엄쳐 뭍으로 가는데 어이없게도 바닥에 발이 닿았다. 하람이 황당해하며 어기적어기적 물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한이 물귀신을 보았다.
“가지고 있는 시신을 내놓아라.”
『감히 뭍의 존재가 어디서 내게 덤비느냐.』
꾸역꾸역 나오던 하람이 허벅지까지 물 밖으로 나온 순간 킥킥 소리가 들리더니 발목이 덥석 잡혔다. 눈을 크게 뜨며 악 소리쳤다.
『이것 참 맛있어 보이는구나.』
인어처럼 유려하게 다가온 물귀신이 기침하는 하람을 제 얼굴까지 들었다. 강한 비린내와 높은 위치에 얼굴을 구기고 있는 하람을 보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여자가 아니라 아쉽지…….』
물귀신이 눈을 번뜩이며 하람을 입가로 가져가는 것과 동시에 물이 높게 튀어 올랐다. 그리고 물귀신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마치 바로 앞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다. 큰 소리에 하람이 파르르 떨며 두 귀를 막았다.
“내가 직접 던졌다만 내 것이다. 내놔라.”
아래로 향한 찌푸려진 시야에 보이는 강물 위로 물에 젖은 커다란 천 조각이 떠올랐다. 뭐지, 하는데 물귀신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팔이다.”
『……네 이놈!』
물에 젖은 이한의 손에 검과 발로 보이는 무언가가 잡혀 있었다. 하람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물귀신이 잘린 제 발목에 소리 지르며 하람의 몸을 한 손으로 틀어잡았다.
“으, 아아……!”
압박감에 앓는 소리를 내는 하람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보다 먼저 복부가 베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이한의 검에 베인 자국 아래로 물이 쏟아져 내리고, 물귀신이 다시 한번 더 비명을 질렀다.
“다시 말하지. 내놔라.”
오래 산 물귀신인지 제법 단단하다. 생각보다 얕게 그였다.
이한이 혀를 차는데 물귀신이 하람을 놓더니 물속으로 숨었다. 황급히 검을 내던지고 떨어지는 하람을 두 팔로 받아들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하람이 슬그머니 눈 떴다. 시야에 희미하게 웃고 있는 이한이 보였다.
“물에서 벗어나 있어라.”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병이라니. 비약이 심하군.”
하람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의 이한을 황당한 눈으로 흘겨보고는 물 밖으로 나왔다.
이한이 손을 뻗어 검을 다시 쥐었다. 물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뭐, 어쩔 셈이지.”
지금 있는 곳은 강이었다. 뭍의 존재인 이한은 물귀신에게 약했다. 그도 모자라 무기라고는 검뿐이고, 손도 하나였다.
강물 위로 뒷짐 지고 서 있는 이한을 보는데 물이 훅 솟구쳤다. 곧 물귀신이 이한에게 달려들었다.
“저 스스로 물 밖으로 나오다니.”
이한이 피식 웃더니 검날이 아래로 향하게 잡았다. 곧바로 대각선으로 올려 벴다.
『아악!』
이한도 키가 컸는데 물귀신은 그보다 더 컸다. 그러다 보니 검이 가슴밖에 닿지 않았다.
검에 베인 자리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쏟아지는 물 위치로 검이 벤 자리를 확인한 이한이 검을 바로잡았다.
“위를 올려다보는 게 기분이 그리 좋지 않군.”
혀를 차고는 앞으로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검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검을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강물 표면이 얕게 일렁였다.
『네놈!』
“이한 님!”
물귀신의 몸이 반으로 고꾸라지면서 상체가 물속으로 빠지듯 기울어졌다. 동시에 물귀신에 손에 이한의 어깨가 덥석 잡혀 따라서 물속으로 사라졌다. 바닥에 앉아 멀거니 보고 있던 하람이 놀라 이한의 이름을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시야에 이한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한이 올라오지 않는다.
고요한 강물을 불안하게 훑으며 이한의 이름을 중얼거리는데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마치 전력 질주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에 이가 덜덜 떨렸다.
“이한 님, 이한 님…….”
이한은 죽은 자였다. 또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또한 목이 잘리면 귀신들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났다.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결국 주춤주춤 물가로 다가가는데 물 표면이 떨렸다.
설마 하고 물 표면을 집중해서 보는데 떨림 폭이 커지고, 점차 빨라졌다. 그리고 쿵쿵 소리가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한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한이 잘못됐을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결국에는 힘이 빠져 흙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