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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32)화 (32/87)

32

“그럼 저 대리님 믿고 갈게요.”

드디어 선혜가 갔다. 떠나는 선혜를 확인한 하람이 다시 운전했다가 눈에 보이는 귀신과 귀신도 아닌 무언가에 중간중간 멈춰 섰다.

“……하. 미치겠네.”

사슴 머리에 사람 몸을 한 괴이쩍은 것에 몸에서 힘이 풀렸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잘게 떠는 손으로 핸들을 잡고 그 위로 이마를 기댔다.

“……이한 님이 말한 후회한다는 게 이거였나.”

짧게 마주친 사슴의 벌건 눈이 잊히지 않는다. 이한의 말대로 후회하며 붉은색이 일렁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게 후회한다니까.”

핸들을 부여잡고 한숨을 길게 쉬는데 별안간 이한의 목소리와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하람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조수석을 봤다. 검은 안개를 두르고 장죽을 입에 물고 있는 이한의 모습에 입을 크게 벌렸다.

“여, 여기 어떻…….”

“미련한 것.”

이한이 다시 한번 더 혀를 차며 잡은 장죽을 내려놓고 몸을 틀어 하람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에서부터 서늘함이 확 퍼졌다. 아른거리는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슬금슬금 풀렸다. 동그랗게 뜨인 하람의 눈이 슬쩍 풀렸다.

“사람이 아닌 것을 이제 막 본 주제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싸돌아다니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이한이 아래로 나른하게 늘어지는 하람의 어깨를 보며 손을 거뒀다. 하람이 조금 전까지 이한이 짚고 있어 써늘함이 남아 있는 제 이마를 짚고서 멍한 눈으로 이한을 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네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생각을 해서 왔다.”

이한을 불러? 생각을 해? 이게 다 무슨 말이지? 하람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가 눈을 다시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냥, 혼잣말한 것뿐인데.”

“혼잣말을 하면서 내 생각까지 했을 텐데.”

그저 혼잣말하고, 생각한 것뿐인데 이한이 왔다. 입에서 아, 소리가 나왔다. 이한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놀라고 또 당황스러워 담뱃잎을 태우는 이한을 멀거니 응시하다 그가 도포가 아닌 검은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포가 아니네요.”

제가 부를 줄 알고 있었던 걸까. 의아함을 담아 보는데 이한이 콧방귀 뀌더니 틀고 있는 몸을 바로 했다.

도포가 왜, 하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다. 뭐지, 하다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제가, 부르길 기다리셨어요?”

출근할 때만 해도 이한이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생각하자마자 왔다. 손을 튕기기만 해도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지만 이렇게 바로 오는 건 조금 애매했다.

설마 하고 스을쩍 물었는데 또 말이 없다. 그런데 눈매가 찌푸려졌다. 설마가 맞는 것 같아 입 근육이 풀렸다.

“그러시구나.”

하람이 자꾸만 웃으려고 하는 입매를 손으로 매만지며 비상등을 껐다.

“앞으로 자주, 생각해야겠네요.”

혀를 차며 다리를 꼬는 이한 모르게 웃으며 멈췄던 차를 출발했다.

옆에 이한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가 무슨 수를 부린 걸까. 심심하면 보이던 귀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하는 게 정말 고욕이었는데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오늘 하루 종일 귀신 보여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안 보이네요.”

어쩐지 평범했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매일 이랬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람이 아프지 않은 머리에 기쁜 얼굴로 중얼거렸다.

“머리도 안 아프고, 구토감도 없고. 아까 저한테 뭐 한 거예요?”

담뱃잎을 태우며 차창 너머를 보던 이한이 하람을 짧게 보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매일 할 수 있는 건가요?”

“기억을 잃어도 상관없다면.”

“……살벌하네요.”

테라피 받은 것처럼 개운해 이한에게 부탁해 출근 전에 매일 받을까 했는데 부작용이 엄청나다.

함부로 쓰기 어려운 방법에 고민하다 다시 한번 더 이한을 힐끔 보았다.

“이한 님, 바쁘세요?”

이한이 대답하는 대신 하람을 보았다.

“바쁘지 않으시면 저랑 출…….”

“바쁘다.”

“……네. 그럴 것 같았어요.”

별로 하는 거 없어 보이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당장 사라질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집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

한남동이 아닌 청담동에 있는 지네 각시 집 앞에 차를 세웠다.

“그게, 지네 각시랑 만나기로 했어요.”

하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한의 눈치를 보다 브리프 케이스를 챙겨 차에서 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거대한 집을 보고는 대문 벨을 눌렀다.

- 누구세요?

지네 각시가 맞이할 줄 알았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했다가 헛기침을 짧게 했다.

“사모님이랑 만나기로 한 하람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생각해 낸 말인데 통한 듯 기다리라는 말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대문이 열렸다. 넓은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람 님!』

단아하게 입은 지네 각시가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하람이 허리를 짧게 숙여 인사했다.

『어머나, 이한 님도 오셨네요?』

오늘따라 정말 사람 같은 지네 각시를 신기한 눈으로 보는데 지네 각시가 갑자기 어깨너머를 보며 웃었다.

언제 왔는지 이한이 뒤에 서 있었다. 하람이 당황스러움에 굳은 사이 지네 각시가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가사도우미에게 퇴근하라고 하며 급하게 내보냈다.

『하마터면 좋은 가사도우미를 잃을 뻔했잖아요!』

“기운을 죽이고 있었는데 무슨.”

지네 각시의 큰소리에 이한이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넓은 거실을 훑었다.

『오신 김에 집 어떤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지네가 사는 집인데 어련할까. 할 일이나 해라.”

『참, 일 때문에 만났지. 하람 님, 마실 것 드릴까요? 아니면 식사?』

“아, 마실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하람과 이한이 거실 소파에 앉았다. 지네 각시가 주방에서 핫초코와 쿠키 몇 가지를 가지고 왔다.

『다른 차도 있으니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잘 마실게요.”

가지고 온 태블릿 PC와 샘플을 꺼냈다. 핫초코 마시며 오늘 온 목적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남편께서 별말씀 없으셨나요?”

『남편이랑 애들이 다 저한테 전적으로 맡긴다고 했어요.』

……자녀도 있구나.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지네 각시가 웃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요. 궁금해하는데 하람 님 불편하실까 봐 남편이랑 외식하라고 내보냈어요.』

대화하는 사이 핫초코를 다 마셨다. 하람이 카메라를 챙겨 일어섰다.

지네 각시는 장난으로 요청한 게 아니라는 듯 제법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요청했다.

“……음, 저 혼자서 다 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다음에 다른 직원과 같이 와도 될까요?”

예상보다 작업량이 많다. 지네 각시의 말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던 하람이 난감한 얼굴로 지네 각시를 보았다. 지네 각시가 웃었다.

『그럼요, 그럼요. 한 시간 전에 연락만 주세요.』

지네 각시의 말을 듣는데 별안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람과 지네 각시가 동시에 거실 창 너머를 보았다. 그보다 먼저 거실 창 앞에 서 있던 이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왔군.”

창 너머로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검붉은 빛 털을 가진 호랑이가 보였다.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지네 각시, 저거 좀 들여야겠어.”

『……이거야 원. 우리 집에 신령님도 모자라 원귀까지 다 들이게 됐네요.』

지네 각시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한숨 쉬며 허락했다.

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호랑이 영령이 물고 있던 원귀를 바닥에 뱉었다.

“주제에 꽤나 잘 도망 다녔군.”

바닥에 맥없이 누워 있던 원귀가 이한의 목소리에 눈에 띄게 놀라 하더니 천천히 앉았다.

『……최근 차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고 또 괴상한 악귀까지 돌아다녀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귀가 염치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소파에 앉은 이한이 드러내 놓고 혀를 차고는 하람을 보았다. 옆에 앉아 있던 하람이 아, 소리 내고는 원귀를 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찾고 있었습니다.”

『……네?』

머리카락 끝이 바닥에 끌릴 만큼 고개 숙이고 있던 원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제가 다 돕겠다는 건 아니고, 제 옆에 계시는 분이 많이 도와주실 겁니다.”

하람을 멀거니 보던 원귀가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귀찮다는 낯으로 한숨을 길게 쉬며 다리를 바꿔 꼬았다.

“기억나는 것을 말씀해 주세요.”

그저 도와준다고만 했을 뿐인데 원귀가 감격한 듯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원귀를 탐탁지 않아 하던 지네 각시가 아휴, 소리를 낼 만큼 서럽게 울던 원귀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에. 천하의 몹쓸 놈들이군요!』

이전에 들은 것보다 조금 더 상세한 이야기가 마침내 끝났다.

원귀의 목소리를 녹음할 수 없어 태블릿 PC에 타이핑하던 하람이 지네 각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이한을 보았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나요?”

“몹쓸 것들이 가득한데 없을 리가.”

하긴 전래동화만 봐도 질 나쁜 부사와 지주, 가족이 관아에 많이 불려가고는 했다. 하람이 고개를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이건 제가 도와야겠네요.”

원귀의 원이 모두 살아 있는 사람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한의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제가 나선다고 하자 이한이 미간을 좁혔다.

“왜지?”

“그야, 다 살아 있는 사람…….”

“네 쌍둥이 동생은 어디 있지?”

이한이 하람의 말허리를 자르고 원귀를 보았다.

『동생은 충격에 말을 잃은 채로 죽어 말을 할 수도, 제대로 운신할 수도 없는 상태라 숨어 있습니다.』

“동생도 같은 곳에 빠져 죽었나?”

『예. 그렇습니다…….』

“원한을 정확히 어떻게 풀고 싶은 거지?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게 다인가?”

이한이 굳은 얼굴로 원귀를 응시했다. 그를 보던 하람이 복잡한 얼굴의 원귀를 보았다.

『……가능하다면, 저희 시신을 수습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면 되나? 새 어미와 남동생은 그냥 두어도 상관없나?”

이한의 말에 원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이내 그렇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 대답 없이 원귀를 보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람이 따라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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